▲봉황산 부석사는 언제나 운무가 노닐고, 봉황이 날개짓을 하는 길지(吉地) 중의 영지(靈地)이다. 바라만 보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안온해지고,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은 그곳에는 따스함과 질그릇같은 소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선묘낭자의 국경을 초월한 지순한 사랑이 옥잠화로 피어나는 곳... 부석사!!!
부석사는676년(신라 문무왕 16) 2월 의상(義湘)이 문무왕의 명으로 창건했다. 당시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 법회를 열고 화엄을 설법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쳤으며, 이 절을 화엄종의 중심도량으로 삼았다. 의상대사의 존호를 '부석존자' 라고 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모두 이 절과 연관 때문이다. 이 절이 창건된 이후 신라를 대변하는 걸출한 승려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br>
고려시대에는 절 이름을 선달사 또는 흥교사 라고 했는데, '선달' 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생각된다. 1203년(고려 신종 6)에는 당시의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부석사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붙잡아 섬으로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580년(선조 13) 사명대사 유정이 중건했으며, 1746년(영조 22) 화재로 추승당, 만월당, 만세루, 범종각 등이 불에 타자 그 뒤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浮石寺... 뜰 부浮, 돌 석石, 절 사寺.
절 이름 치고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이름은 아름답고 고상한 문자를 쓰는데, 부석사라면 '뜬돌 절"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상한 이름을 가진 절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조 건축물인 '무량수전' 을 품고있다. 창건설화도 예사롭지가 않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는 곳
여름에는 짙푸른 풀내음과 벌레소리가 진동하는 곳
가을에는 봉황산을 곱게 물들인 단풍잎이 여울지는 곳
겨울에는 무성함의 치장을 거둔 개골(皆骨)스런 모습이 더 좋은 곳
동녁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이 장관인 곳
낙조의 잔광(殘光)이 무량수전 소조불을 금색으로 물들이는 신묘한 곳
소백산을 넘은 구름이 먼 발치에서 불도량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곳
배흘림 기둥과 목조건축물의 단백함과 고결함이 최고의 백미인 무량수전
날렵한 여인이 곱게 분단장한듯 고운 자태의 석등
1400년 이슬 맞음이 없이도 싱싱하게 살아가는 선비화의 신비스러움
선묘낭자의 지고지순한 순애보같은 사랑이 애틋하게 머무는 곳
의상대사의 호방한 기개와 불법홍포의 의지가 유감없이 발휘된 곳
.
.
.
부석사는 불교의 전유물을 훨씬 초월한 온 백성의 사랑을 받는 '국민의 절'이다.
'마음의 본향', '가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곳' 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 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절 입구에 펼쳐지는 상점. 음식점. 노점상들 상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을 일컬어 '사하촌' 이라고 부른다. 부석사의 입구는 사하촌은 촌로(村老)들이 직접 가꾼 농산물을 파는 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들의 이마와 손에서 후한 인심과 함께 세월의 연륜을 느낄수 있어 첫 발부터 마음이 포근하다.
매표소를 지나면 양옆으로 도열하듯 늘어선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계절따라 색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수 너머에는 인근 농민들이 경작하는 사과농장과 채소밭이 있어 요즘같은 가을에 부석사를 찾으면 노란 은행나무 잎새와 빨갛게 익은 사과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어 좋다. 이렇게 자연에 젖어 한참을 오르다 보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세운지 오래지 않아 단청도 깔끔하고 전체적으로 산뜻하여 고풍스런 맛은 없다.
입구에서 바라보면 일주문 한복판에 <太白山浮石寺>라는 편액이, 반대편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고 쓰여있다. 일반적으로 절이름은 반드시 그 절을 품고 있는 산이름과 함께 쓰고 부르는 것이 맞는 예법이다. 그래서 앞면에는 <봉황산부석사>라고 쓰여 있는 것이고, 그 반대면에는 보통 그대로 백지이나 특별한 경우에는 적당한 문구를 넣는다. 부석사의 경우같이 " 이 절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총본산 또는 근거지" 라는 의미로 <해동화엄종찰>이라고 썼다.
일주문을 지나 은행나무 도열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나타난다. 누가 보아도 기닿라게 다듬은 돌기둥 두개가 높이 서있고, 그 복판에 연꽃모양의 돌에 훔이 패여 있는게 고작인데 우리나라의 보물이라니.... 이 돌에 대하여 문외한인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
이 당간지주는 당간(幢竿)이라는 긴 장대를 양쪽에서 바쳐주는 받침대인데, 당간은 그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러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거의없다. 공주 갑사의 철당간이나 속리산법주사의 철당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당간은 지금의 국기게양대와 성격이 비숫하다고 보면된다. 옛날같이 단층건물 시대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장대가 금방 눈에 잘 보인다. 이 당간은 절의 깃발을 달고 좋은 말을 적어서 걸어놓음으로써 경계의 표시로, 또는 교화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사찰의 사세가 클수록 당간이 높았으므로 당간지주도 당연히 그 규모가 커야 함은 물론이다. 부석사의 당간지주도 당시의 사세를 가름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사료로써 보물로서의 가치가 되고도 남는 것이다.
당간지주를 지나서 올라가면 돌계단이 높게 있고 찬왕문(天王門)이 나타난다. 이 천왕문을 들어서면 굉장히 신체가 크고 우람하면서 험상궂게 생긴 장군같은 사람이 칼. 비파. 용. 금탑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조선시대의 탐관오리같이 생긴 사람들을 깔아 뭉기고 있다.
이는 사악한 사람을 골라 징벌하는 것이다.
이 탐관오리같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어떤 사람들은 절에 가고 싶어도 이 천왕문을 통과하기가 무서워서 못간다고 할 정도이니... 이 사천왕은 우리 인간보다 한 단계 뛰어난 세계에 사는 왕들인데, 각각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방위신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여, 부처님을 수호하고 절을 지키면서 악한 무리를 혼내주는 하늘신으로써 우리의 경찰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구의 400년이 이 사천왕천의 하루에 해당한다고 하며, 온 우주에 동시에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몇방울의 빗방울이 떨어졌는가를 실시간으로 헤아릴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한다.
이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부석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삼층석탑 2기와 아기자기하게 펼쳐지는 전각들... <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백골단청의 2층 누각이 곰삭은 나뭇결을 드러낸채 담백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 누각의 1층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2층에는 법고(法鼓 : 큰북), 목어(木魚), 운판(雲版)의 삼물이 있다. 원칙으로는 범종(梵鐘: 큰 종)을 같이 놓아 사물(四物)이라고 하는데, 부석사는 종각을 짓고 그곳에 범종을 놓았기 때문에 이 누각에는 삼물(三物)만 있다.
이 누각을 지나면 또 다른 2층의 백골단청인 안양루(安養樓)가 나타난다. 2층에는 <부석사>, 1층에는 <안양문> 의 편액을 달고 있는데 단청이 없는 질박한 나뭇결에 자꾸 눈길이 간다. 보통사람들은 <安養>의 뜻을 잘 모르기에 부연설명을 한다. 불교에서 "안양" 이란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안양문을 통과하면 바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극락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문이 바로 유토피아인 피안의 세계 즉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드는 문이니 어찌 경건하게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우리 조상은 참으로 지혜롭고, 정성이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아마타부처님이 계신 무량수전을 그냥 쉽게 오르도록 하지 않았다. 첫번째 누각의 아랫층을 통과하면서 고개를 숙이게 하였고, 이 안양문을 통과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정화하는 의미에서 또 고개를 잔뜩 숙이고 통과해야만 비로소 무량수전에 들어갈 자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 안양문을 간신히 통과하면 무량수전의 방정한 모습과 함께 날렵한 여인을 연상케하는 석등(石燈)이 고운미소를 띠고 맞이한다. 이 석등을 자세히 살펴모았는가? 땅에 접한 지대석과 기둥같은 간주, 그리고 등불을 밝힐 수 있는 불집(火舍), 상륜부가 군더더기 없이 모시한복 입은 여인인 양 서있는 것이다. 이 석등이 우리나라 국보이다. 국보보다 더한 명칭이 있다면 이 석등에 붙여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일품이다. 이 석등에서 안양문을 바라보면 단층으로 보이는 으젓한 누각이다. 이름하여 <안양루>이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무량수전은 가슴벅찬 환희심으로,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시야가 확트이며 구름이 발 아래서 노는 신선의 경지이다.
드디어 무량수전에 당도한다.
비단 불자가 아니라도 이 장엄하고 웅대한 무량수전 앞에 서면 마음이 경건해지게 마련이다.
한국미를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원더풀'을 연발하면서 놀라는 모습인데, 이 땅에 사는 우리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서, 부석사의 중심건물이며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 ·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이 건물의 기둥은 모두 배흘림기둥이다. 기둥의 양 끝부분이 약가나 가느랗고, 배가 불룩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는 공법이다. 어느 작가가 이 무량수전을 보고,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 라는 수필을 써서 더 유명해 졌는지도 모른다.
무량수전 안에는 불상이 한 분 있는데, 공식명칭은 <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이며 국보 제45호이다.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부처님이다.
소조불상인데 높이는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한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건물로는 조사당(국보 제19호)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응진전, 자인당, 취현암, 요사채 등이 있다.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던 선원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 삼층석탑 2기(보물 제249호 및 경북유형문화재 제130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 석룡, 녹유전, 선비화 등이 있다.
보물 제249호인 삼층석탑은 본래 인근 약사골의 동방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서 익산의 왕궁리석탑에서 출토된사리를 그 안에 봉안한 것이다.
石龍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에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녹유전은 표면에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벽돌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근거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고 하는데, <택리지>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않으리라.' 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다. 조사전 봉당의 한 켠에 나 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데, 일년내내 누가 물을 주거나 또는 비를 맞거나, 이슬조차도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이 나무는 싱싱하게 1,400년을 살아오는 것이다. 물론 뿌리가 밑에서 옆으로 길게 뻗혀있어 생육에는 지장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의상대사의 영혼이 이 부석사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신비한 선비화를 사람들이 그냥둘리 만무하다. 그래서 절에서는 특단의 조치로 손가락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촘촘한 철망을 두겹으로 튼튼하게 감싸놓아서 육안으로도 이 나무를 자세히 보기가 쉽지 않다. 어렵게 수 십번 시도하여 카메라 렌즈를 철망 구멍에 일치 시켜서 사진 한 장을 찰영했다. 여기에 공개하니 잘 보면서 그 신비함을 보기바랍니다.
부석사는 하루 종일 돌아도 지루함이 들지않는 포근함과 역사성, 그리고 불교문화재의 보고이다.
단청을 하지 않은 나무결 그대로의 상태를 불교계에서는 "백골단청"이라고 한다. 백골단청은 웅장하고 기교스런 멋은 없지만, 나무결이 그대로 배어나는 담백함과 포근함이 있어서 좋다. 무량수전과 두 채의 누각, 종무소 등이 모두 백골단청이라서 시각적으로 따스한 감이 든다.
마지막으로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애틋한 얘기를 <삼국유사>에서 발췌하여 본다.
661년(문무왕 1) 불교 공부를 위해 당나라에 들어간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어느 불자의 집에서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안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했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독실한 불자의 길을 가게 했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어 드리겠다." 라는 원을 발하게 되었다.
공부를 다 마친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장 배에 올랐다. 선묘는 그동안 의상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승복과 집기 등을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이들을 넣은 상자를 가지고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고 말았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자만큼 떠나는 배를 향해 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했다.
곧 이어 선묘는 디시 서원을 세우고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하는 용이 되었다. 용은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의상을 호위하고 다녔다. 의상이 그동안 당나라에서 배운 불교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거기에는 500여 명의 도둑떼가 살고 있었다.
이때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요 공중에 떠서 도둑들을 위협하여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고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현재 부석사 무령수전 뒤 좌측에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당시의 그 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한문으로 '浮石' 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돌 석자 石' 에 점이 한 점 찍혀 있는데 사람들이 자못 궁금해 한다. 이는 당시 돌에 글을 쓴 사람의 멋스런 기교일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부석사가 앞으로 더욱 창성하고 융성하여 의상대사가 절을 창건할 당싱의 정신이 계승발전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선묘낭자가 화석으로 변해버린 부석도 다른 곳으로 가지말고 영원히 의상정신과 함께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에서 날지 못하도록 점을 찍었다고 생각해 보았다.
선묘남자의 숭고한 사랑,
의상대상의 불법홍포에 바친 숭고한 구도자의 향기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묻어나는 역사의 현장 부석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삭막한 사람들의 정신적인 의지처요, 언제나 가고 싶은 노스탈쟈의 노란 손수건이다.
항상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봉사활동과 종교활동, 홈페이지 운영, 매월 40페이지의 회보 발행, 각 잡지사및 신문사에서 의뢰한 원고작성 등... 늘 분주한 일정이지만 여러분이 계시기에 용기 백배하여 이렇게 틈틈히 글을 쓰게 됩니다. 사실 저는 회계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글쟁이'는 아닙니다. 그냥 마음에서 나오는 느낌을 문자로 표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형화되었거나 다듬어지지않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한 중년 남성의 마음이려니 하고 보아주십시요. 고맙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덕분에 잘 감상했어요.바로 시간을 내어 찾아가 봐야겠어요.
감사 합니다--- 옛전에 한번 가보았는데-- 조금 내용 을 알고 다시 가면 도 좋은 시간 될것 같군요
이번 여름에 다녀온 부석사.. 이처럼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다니.. . 안양문을 올라서는 순간 느껴지던 편안한 기.....정말 명찰이란 생각을 했었는데...잘 읽었습니다.
사진과, 설명 감사합니다. 뜻도 모르고 휙 둘러보고만 왔는데 뜻을알고 다시 한번 가봐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