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문화관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하시기에 원주에 있는 문학애호가를 만나는 줄 알고 왔습니다. 그런데 와보니까 서울에서도 오시고 대구에서도 오시고 해서 부담스럽고,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카메라 세례를 받는 것도 생전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릿어릿하고 정신도 없고 그래요. 양해해 주세요.
오늘 여러분들이 여기저기서 오시고, 저도 멀리서 왔는데 제가 허튼 소리를 하거나 너무 빨리 끝내버린다면 '저 작가한테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데 공연한 헛걸음 했다' 고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는 속으로만 아쉬워하시지 말고 질문을 해주세요. 저는 학교 교단이나 대학 강단에 서 본 경험이 없어서 그냥 혼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내리 말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오늘 제목은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까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나 소설가로 살아온 세월이나 비슷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목은 여러분들을 위한 제목이 아니라 제가 자신에게 내 반생, 일생을 돌아보는 의미에서 붙인 제목입니다.
우선 제가 소설에 의해서 받은 혜택은 많죠. 모든 것에서 물러날 나이인 일흔을 넘어서도 모든 여성들이 갖고 싶어 하는 <일>을 가졌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죠. 또 제 얘기를 들으러 이렇게 많이 와 주실 만큼 작가로서의 명성도 어느 정도 가졌습니다. 또 돈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만한 부도 가졌습니다. 그 부라는 것을 요즘 말하는 갑부들하고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워낙 욕망이 작습니다. 원하는 게 별로 많지 않아요. 갖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먹는 것도 소박한 걸로 조금 먹습니다. 다만 노후를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넉넉하게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는데 돈이 얼마 안 드니까, 더 늙어 몹쓸 병이나 치매에 걸린다 해도 인간적인 대접과 돌봄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저축이 생겼고, 그만하면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늦게 등단을 했다고 했는데 저는 40세에 등단을 했습니다. 제가 작가가 되기 전까지 생활은 무의미했느냐 하면 그때도 사실 저는 행복했어요. 어쩌면 제가 작가생활을 나이 먹은 후까지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40세까지 제가 보통여자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작가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보통여자로서 보통시민으로서의 삶과 경험은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농촌에서 태어나고 서울 올라온 20세까지 농촌에서 지낸 경험이 그래요. 지역적인 고향이라기보다 제가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고장으로서의 고향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인간성 속에 조금이라도 좋은 점이 있다면 죄다 농촌 공동체에서 얻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여기 오면서도 느꼈지만 논 빛깔이 지금도 너무 좋아요. 이맘때의 들판도 좋지만, 한없이 걸어도 파란, 푸른 비단결 같은 한여름의 논은 보기 좋다 못해 감동스럽기까지 합니다. 그건 아마 농사꾼의 노고와 쌀을 하늘처럼 귀하게 여기는 우리 고향마을의 심성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른지요.
쌀이 왜 그렇게 좋았던지…. 6.25 때라던가 일제 말기, 쌀이 극도로 부족했을 때도 우리 민족이 굶어죽는 사람 없이 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제 생각으로는 우리문화가 쌀 문화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만일 빵을 먹고 살았다면 빵이라는 것은 군식구가 생겼을 때 뚝 잘라주면 자리가 나잖아요. 그러나 밥은 안 그렇지요. 생각하면, 쌀은 나눠 먹으라고 있는 것 같아요. 누구든지 끼니 때 집에 오는 사람은 우선 밥 먹고 가라고 불러 앉히잖아요? 밥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늘려 먹을 수 있어요. 어려울 때는 잡곡을 섞어 먹고 그래도 안 되면 물에 말고, 죽을 쑤고 한없이 늘려 먹을 수 있는 게 쌀인 것 같아요. 먹을 적에 항상 이웃을 배려합니다. 화수분이라는 말이 있지만 쌀을 볼 때면 저는 쌀 자체가 화수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셋이 먹을 것을 잘하면 열명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쌀과 어머니를 연관지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개성 사람이었는데, 6.25때 피난민들이 우리 집엘 들려가는 수가 많았어요. 그러면 덮어놓고 먹고 가라고 붙드는 거예요. 저는 올케하고 부엌에서 가난한 밥상을 차리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가 우린 넉넉하다면서 군식구를 붙들면 너무 싫었어요. 겨우 수제비나 끓일 때 식구가 늘어나면 어쩌겠어요. 밀가루를 아끼려고 물하고 우거지만 더 넣고 끓이는 거예요. 손님한테는 하얀 수제비를 많이 넣고 우리 먹을 건 시커먼 우거지가 대부분이었지만, 손님이 미안해 할까봐 위에만 살짝 하얀 수제비를 서너 개 얹는 거죠. 그런 것이 다 밥, 쌀에서 배운 지혜가 아닌가 싶어요.
또한 쌀을 중요시하는 것 중에는 쌀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나 하는 것입니다. 모낼 때나 추수할 때나 혼자서는 절대로 못 하는 것이 벼농사잖아요. 몇 달 전 여기 올 때 어떤 청년이 이앙기로 혼자 농사짓는 것을 보면서 '논농사라는 것은 저렇게 고독
한 노동이 아니었는데' 싶더라고요. 모 낼 때도 추수할 때도 온 동네 사람들이 어울려서 신명나게 하던 일을 어떻게 저렇게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혼자 커피도 시켜먹고 자장면도 시켜먹고 그렇겠구나 싶더라고요. 농사가 딴 노동과 다른 미덕이 있다면 그건 고독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이젠 옛날 얘기가 돼버렸네요.
제가 고향을 상실한 건 6.25가 나고부터입니다. 제 고향 개성 땅은 6.25전 까지는 38선 이남 땅이었다가 휴전이 되면서 휴전선 이북 땅이 돼버렸습니다. 그때 누가 고생 안한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제가 본 경험 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6.25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같은 어머니의 자식이 인민군도 되고 국군도 되고, 반동분자도 되고 빨갱이도 됐습니다. 마을 공동체도 주인, 상전이라는 계급으로 갈라지고, 같은 혈육끼리 이념의 이름으로 서로 쏴 죽이는 문자 그대로 동족상잔의 피비린 내 나는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오빠가 좌익운동 하다가 전향한 후 6.25를 맞은 우리 집 사정은 더 나빴습니다.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는 반동분자로, 국군이 들어왔을 때는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인 성분이었지요. 저는 그때 군인보다도 경찰이 무섭고 경찰보다는 청년단이 더 무섭고 그랬어요. 서울이 몇 번씩 뒤바뀌는 상황에서, 국군이 들어오거나 인민군이 들어오거나 성분이 수상한 집의 스무 살 처녀가 당해야 했던 수모, 인간 이하의 모욕이라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간 해에 6.25가 났어요. 저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 저는 서울대학이면 굉장한 줄 알았어요. 그것도 여자애가 들어갔으니 기고만장해서 나 외에는 누구도 없는 줄 알다가 별안간 나락으로 빠진 거죠.
인간이라기보다는 버러지처럼 기어야 했던 상황에서 제가 마음속까지 버러지가 안 되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자존심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내가 이것을 글로 쓰리라, 하는 다짐이었습니다.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이었죠.
레미제라블을 보면 테나르디에 같은 악인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저 인간을 형상화해서 나만 미워할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미워하도록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그 시간과 상황을 기억하도록 했던 거죠. 스무 살 먹은 처녀의 복수심이었고 앙심이었던 거예요. 제가 그때를 잊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시기가 그렇게 지독했던 시기였어요.
그렇지만 복수심, 증오가 직접적인 글이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 시기를 넘기고 스물 셋에 결혼을 해서 아주 무사안일하고 평온한 생활이 계속되니까 복수심, 증오 같은 것은 다 가라앉더라고요. 제가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글을 써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요.
어릴 때 우리 어머니가 제게 바란 것은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일찍 과부가 되신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저에게 좋은 교육을 시키시면서 당시 어머니가 가장 우러러 본 직업이 선생님이었던 같아요. 그러나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졸업하고 사범학교로 진학할 수 있으려면 공부를 특별하게 잘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저를 똑똑한 애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공부를 잘 못했어요. 줄곧 중하위권으로 돌다가 고학년이 되면서 공부를 잘하게 됐지만 사범학교 갈 만하지는 못해 숙명여고에 진학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의 꿈을 접기는커녕 오히려 한 단계 높이셨습니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숙명에서 일등으로 졸업하면 장학금으로 동경 유학을 시켜준다더라, 그러면 중학교 선생도 할 수 있다고 저를 격려하셨지요. 숙명 이학년 때 해방이 됐으니 동경유학의 꿈도 수포로 돌아갔지만 선생님이 돼야한다는 어머니의 꿈에서 벗어날 엄두는 내지 못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게 되니 어머니의 꿈은 자연히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저는 결혼하고 평온하게 살게 됐는데 그 시기, 살림만 하면서 애를 오남매나 낳아 기르던 시기도 저에겐 아주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에 앙심과 복수심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한 열망의 부질없음을 깨달아 갔으니까요. 앙심이나 복수심은 위무 받아야지 급하게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40세에 '나목'이라는 작품을 처음 쓰게 됐습니다. 거기에는 화가가 주인공인데 처음에는 전기를 쓰려고 준비한 것이었어요. 박수근 화백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좀 거슬러 올라가는데, 좌우대립 속에 우리 오빠도 비참한 최후를 맞고 제가 가장이 됐습니다. 어머니, 올케, 어린 조카, 저까지 다섯 식구를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제가 학교도 그만두고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어찌어찌하다가 미 8군 피엑스(PX)에 취직을 하게 됐습니다.
미 8군 피엑스라는 데가 지금 서울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입니다. 그때는 휴전되기 전 시민은 물론 정부 기관도 부산 대구에 피난 가 있고 서울은 텅 빈 최전방 도시일 적이라 취직할 만한 데라고는 없었어요. 그런데 피엑스를 중심으로 해서 남대문시장 일대는 PX에서 흘러나온 미제 물품으로 특수한 경기를 누리고 있었죠. 그 활기 넘치는 곳을 배회하다가 뜻하지 않은 행운을 잡게 되었는데, PX에 취직이 된 겁니다. 당시 PX에 취직하기는 어렵다고도 할 수 있고 쉽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여직원들은 미군을 시켜 물건을 사서 빼돌려서 암시장에 팔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떼돈을 벌수 있는 선망의 직업이었지만, 그 대신 들키면 당장 내쫓고 그때 그때 충원을 하니까요. 결원이 생겼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중에 섞였다가 제가 대학생이라고 하고 하니까 의외로 쉽게 뽑혀서 취직이 된 겁니다. 첫날은 임시패스만 주었는데도 나는 이제부터 먹고사는 건 해결 됐다고 마음을 놓았고 우리 집 형편을 걱정하던 동네사람까지도 '저 집 이제 좀
살게 됐다'면서 우리 집에 아부를 다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 다음날 출근 해보니까 같이 충원된 사람들은 다들 좋은 데 가는데 저는 제일 나중까지 남겨놨어요. 그러다가 데려 간 데가 가장 구석지고 후줄근한 커튼이 쳐있는 곳이었어요. 그곳이 어디냐 하면 초상화 그리는 곳입니다. 저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게 아니고 지나가는 미군들을 꼬셔서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저는 정말 기가 막히죠. 물건 파는 것이라면 정가대로 돈 받고 거슬러주면 되는 거니까 벙어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건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라니, 그건 저처럼 영어도 못하고 비시사교적인 꽁한 성격에 아랑곳인가요. 제 고난의 날이 시작됐죠. 전임자가 맡아 놓은 주문이 있으니까 아직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건 자꾸 줄어드는데 저는 새로운 주문을 하나도 못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안해진 화가들이 막 아우성을 치는 거예요. 아니, 미스 박은 누구 목구멍에 거미줄 치는 거 보고 싶어 취직한거냐, 맨날 벙어리 노릇만 하고 있으니,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죠. 그래도 저는 속으로 한달만 하자. 한달만 있으면 월급을 받을 테니까. 이런 뱃장으로 그냥 버텨나갔죠. 화가들은 일한만큼 돈을 받지만 저는 월급제였거든요. 그러나 일 안하고 월급만 받을 얌체 짓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죠. 저에게도 그 자리가 밥줄이지만 화가들에게도 그 자리가 밥줄 아니겠어요. 여러 식구의 밥줄이란 무섭고도 신성한 거죠. 조금씩 말문이 열리면서 주문도 받을 수 있게 됐죠.
그런데 이 직업이 물건 파는 것보다 고약한 것은 물건은 한번 파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림은 찾으러 와서 만족스러워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다시 그려 달래기도 하고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런 불평 달래기가 또 보통일이 아니죠. 미군들도 자기 얼굴 그려달라는 이는 거의 없어요. 대개 여자친구나 아내, 여동생의 사진을 맡기고 그려달라는 건데 다 된 그림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까닭의 대부분은 사진보다 덜 예쁘다는 거죠. 웬만한 불만은 잘 다둑거려 수정을 해주는 정도로 끝내지만 완전히 다시 그려줘야 할 때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그 손해가 고스란히 화가들에게 돌아갑니다. 주로 스카프에다 그렸는데 화가들은 두 번 일에다가 스카프 값까지 물어내야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화가도 살아야 하고 나도 살아야하는 상부상조의 상황인데도 항상 상극하는 사이
가 돼요. 저는 '왜 이렇게 밖에 못 그리냐, 사진보다 조금만 더 예쁘게 그리면 될 텐데 그것도 못하느냐‘ 고 하고, 화가들은 저에게 '애교도 부릴 줄 알고 화장도 하고 파마도 하고 다녀라. 여기가 대학인 줄 아냐'고 하죠.
전쟁 나기 전엔 극장 간판을 그리던 화가들을 저는 속으로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나 봐요. 나이로 봐서 아버지벌도 되는 어른들이니까 선생님이나 아저씨로 불러도 될 걸 이씨, 김씨 하는 식으로 마구 대했죠. 그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미군과 다투기라도 하고 나면 마구 신경질을 부리면서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냐고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이 열등생 다루듯이 화가들을 몰아붙였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하는 자기모멸 때문이었지만 화가들한테도 견디기 힘든 수모였겠지요.
어느 날, 저에게 이런 수모를 받던 화가 한 사람이 두꺼운 화집을 하나 끼고 왔어요. 저는 속으로 같잖게 여겼죠. 모든 것이 짜증나고 신경질만 나고 세상 다 산 것 같을 때니까, '제까짓 게 화집이나 끼고 다닌다고 누가 진짜 화가로 봐줄 줄 아남‘ 이렇게 얕잡는 마음으로 바라봤죠.
그런데 그 화가가 저한테 화집을 펼쳐 보여줬어요. 보니까 일제시대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던 작품들을 모은 화집이었는데 거기 실린 그림 하나가 자기 작품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박수근 화백입니다. 그 대단한 화가가 거기서 싸구려 초상화를 그리면서 저 같은 철부지한테 그런 수모까지 당했던 거죠. 그때 저는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그 사건은 저에게 어떤 전기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 사람을 모델로 해서 소설을 씀으로써 변신의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세상 다 산 것처럼 아무렇게나 마구 살던 제 삶도 반성이 있는 삶이 되고, 마음을 열고 주변 사람들을 살펴볼 여유도 생기게 됐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하는 마음도 결국은 제 잘난 맛이었는데 그 안에서 저보다 훨씬 못한 막일에 종사하는 분들도 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중에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선망하는 여학교 선생님도 계셨고, 우리학교 3학년 영문과 선배, 은행 지점장 하던 이도 보일러실이나 창고에서 막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식구들 굶기지 않으려고 그런 일이라도 밥벌이가 있다는 걸 고마워하며 다들 열심히 일하더라구요.
박수근씨는 양구 출신입니다. 양구는 격전지였어요. 전선에서 온 군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갓 뎀 양구'라고 할 정도였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양구 출신의 화가가 그곳에 앉아서 싸구려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박수근 화백이 싸구려 인조 스카프에 그려서 받은 초상화 값이 6달러였습니다.
우리 매장에서 받은 정가가 그러했으니 화가에게 그중 얼마가 돌아갔겠습니까.
저는 그 분이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소문으로만 듣다가 69년경에 유작전을 했는데 이중섭 화가와 막상막하의 그림값을 받더라고요. 제가 유작전을 보고나서 그렇게 속이 부글댈 수가 없는 거예요. 샘이 나서 부글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고 가난하게 살았는가를 생각하니 그랬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속이 상하더라고요.
제가 속물이라 그런지 '진정한 예술가는 죽고 나서 평가를 받는다.'고 하는 말도 헛소리로 들리더라구요. 고생도 보통 고생이어야 말이죠. 이왕이면 살아서 평가도 받고 호강도 좀 하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족들도 그 사람 그림을 가진 게 없는데 그 사람 그림값을 올려 받으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들끓다보니 그 분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고 싶더라고요. 그 분은 미술학교도 제대로 안 나온 분이라 제 생각에 다른 누구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양구에서 소학교만 나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제가 의도한 건 그 분의 전기를 쓰는 거였습니다.
전기를 소설로 바꾸는 동안이 저에게는 자기발견의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기라는 것은 그 사람의 실제 생활, 사실을 가지고 써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이라
고는 일 끝나서 퇴근할 때 을지로 입구까지 전차 타러 걸어가면서 나눈 얘기, 추울 때 어묵국물 마시면서 나눈 쓸쓸한 얘기, 이 놈의 전쟁이 언제나 끝나나 하는 출구 없는 절망의 추억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억지로 이것저것 실지로는 있지도 않았던 거짓말을 보태게 되고, 그러면 훨씬 잘 써지더라구요. 잘 써진 날은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이건 아닌데 싶은 꾸며진 얘기 천지고. 그래서 다 덜어내고 사실만 가지고 쓰려고 하면 또 너무 삭막하고 재미가 없어져요.
그러다가 제가 아, 이건 안 되겠다. 이왕이면 쓸 때 기쁨도 느끼고 싶고, 그 사람 얘기 중에 제 얘기도 끼워 넣고 싶더라고요. 상상력을 보태자는 생각으로 여태까지 쓴 것을 다 파기하고 소설로 쓰니까 너무 편하고 쓰는 데 보람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목'에는 그분 모습도 나오지만 저를 투사한 여주인공 얘기도 나오는 거죠. 그분의 모습도 사실만 가지고 쓴 것보다 상상력을 보태니까 내가 이해하고 좋아한 그 분과 훨씬 더 가까워지더라구요.
긴 얘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증오심, 복수심 이런 것이 소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그때는 그런 것이 정열인 줄 알았는데, 역시 소설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닌가 싶어요. 증오로 소설이 쓰여지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물론 증오만 가지고 쓴 소설도 없으란 법은 없죠. 불의에 대한 증오가 그 좋은 예인데 그런 경우도 반대되는 상황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증오로 나타나는 것이지 순전히 증오만 가지고 쓴 소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증오심이나 복수심은 위무 받아 순화될 시간을 기다려야지 즉각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되고 소설을 쓰는 동력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소설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일, 명예, 돈 등을 말씀 드렸는데 또 하나,
정신의 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설 쓰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젊음이란 용모나 체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감수성을 말하는 겁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신인시절 선배들이 '글 쓰는 일이란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 말 하는 걸 들었을 때 첫 작품을 너무 기쁨을 가지고 빨리 썼기 때문인지 저렇게까지 말할 게 뭐있나 싶었어요. 그러나 이후 글을 쓰면서는 피보다 더한 것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진이 빠진다고 할까…. 내가 다 바스러지고 아무것도 안 남은 느낌이 나요. 어떤 때는 비참할 만큼 힘든 일이예요. 그러니까 작품 하나 쓰고 나면 한동안은 정신을 이완시키고 풀어줘야 해요. 머리를 비우기 위해 휴식도 취하고 멋대로 방만하게 살아 보는 거죠.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반복은 정신의 탄력을 잃지 않는 운동 같은 것이죠. 그런 것 때문에 아직도 제가 이 나이에도 젊은 감수성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아요. 기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슬픈 것을 보고 슬픔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저는 젊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정신의 운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많이 했네요. 여러분들의 욕구에 맞추기보다는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 내 문학의 뿌리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나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됐습니다.
독자와의 대담
○ 산본에서 온 한영섭입니다. 선생님의 신산스럽고 때론 옥실옥실 재미있는 이야기들 잘 들었습니다. 소설을 써오시면서 길어 올린 표현들 중에 가장 인상 깊고, 소중하게 아끼는 표현이나 구절, 말이 있다면 소개 해주십시오.
아이고 그럴 줄 알았더라면 무슨 책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것을 그랬어요. 모르겠는데요. 저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선택한 단어도 독자에게 가서 아무런 울림도 못 준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겠지요. 생각나는 게 없는데요. 오히려 제가 기대하는 건 독자가 어휴 이런 표현은 좋더란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 원주에 있는 고창령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을 주어 받는데 우리사회에서는 드러내놓고 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측 하고 망측한 것처럼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이는데요. 선생님께서 바라보는 문학 속에서의 인간의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저는 거의 여성이 주인공인 걸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절 보고 페미니즘 작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전 페미니즘 이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등단한 때가 70년이고 70년대에 70년대 작가군 이라고 해서 기라성 같은 젊은 작가들이 많이 나왔어요. 그 작가들의 소설 속에 나타난 여성상을 보면서 이건 뭇 남상들이 여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또는 이러저러 했으면 하고 바라는 순정적 창녀적 모성적 여성상일 뿐 주체적인 여성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소설에서 여성도 그냥 솔직하게 여성의 목소리를 내게 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도 똑같이 여성이 욕구하는 남성도 그릴 수 있고 여성도 이 시대를 보는 눈이 있고 그런 것이 페미니즘으로 비쳐졌다면 저는 페미니즘 작가라고 분류가 되도 이의 없습니다. 또 제가 남성 작가로부터 들은 비판의 소리 중에는 ‘왜 당신이 그리는 여성은 왜 그렇게 드세고 상대적으로 남성은 소심하고 왜소하냐?’ 는 건데 그건 아마 제가 살아온 시대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물론 드센 분이었지만, 저는 우리의 근세사가 여성을 드세게 만든 게 아닌가, 그만큼 우리 근세사는 여성에게 빚 진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6.25 때 남자를 살아남기기 위해서, 아들을 살아남기기 위해서 어머니의 치마폭이 얼마나 넓었고 눈물겨웠던가를 우리는 잊어서도 안 되겠고, 또 전쟁 중과 그 후의 극도로 궁핍했을 때 유일한 외화벌이 수단이 양공주라는 성상품이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버스 차장, 구로공단의 저임금 여성노동력등 현재 누리고 있는 경제발전은 여성에게 빚진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후 엄마들의 치맛바람 이런 것도 나중에 우리의 근대화를 촉구하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드셌기 때문에, 아까 쌀 문화 때문에 고비를 넘겼다고 했는데 어려울 때 무한히 나눌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이 바로 여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충주에서 온 권오국입니다. 올해 문학상 수상작에서 친척동생이 진짜 친척 동생이십니까? 선생님 글에서 막판 되짚기처럼 참 오묘하게 써내려 가신 것 중에 사촌동생이 나중에 섬에 가서 결혼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너무 좀 상상을 못했던 설정으로 갔는데 그 분이 진짜 친척인가가 정말 궁금합니다.(웃음)
진짜 사촌동생이고 진짜 지금도 거기서 삽니다.(웃음)”
○ 단양에서 온 김순례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재능이 복합적으로 갖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끄집어내서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실 때 작가는 재능과 삶의 경험 중 어느 것에 더 비중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작가지망생에겐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샌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참 많잖아요. 그러면 전 ‘아이고 참으세요. 당신이 안 써도 쓸 사람 너무 많으니까요.’라고 말해버리는 적이 많아요. 참아도 안 되는 것이 있으면 뭔가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떠도는 이야기지만 요새는 강남의 부모들이 학교에서 엄마의 직업도 물으니까 이왕이면 시인이라든가 수필가라고 하면 그럴 듯 할 것 같아서, 많이들 글을 쓰고 싶어 한다고도 해요. 장신구를 고르듯이 하는 문학, 액세서리로서의 문학은 하지 말았으면 싶어요.
저는 대학을 다니다 말았기 때문에 전통적인 문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고등학교 때 나중에 좌익으로 몰려서 사형 당해서 거의 문학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소설가가 문과 담임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기억이 저에겐 지금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어떤 세대냐 하면 중학교 2학년 때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사춘기 때 달콤한 일본의 연애소설을 많이 읽었죠. 거기서 영향 받은, 우리의 체험이 실리지 않은 공허한 미사여구를 그 선생님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혐오스러워하시고 야단을 치셨어요. 그때 그 분이 우리에게 한 말씀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게 있는데 ‘포도주 만들 때 무엇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포도요, 설탕이요, 소주요 하면 ‘또, 또’ 하시면 나중에는 병이다 항아리다라는 소리까지 나왔는데 그러면 ‘시간이다’ 그러니까 항아리도 없고 설탕도 없고 소주도 없어서 포도를 땅에 버려도 시간이 지나서 발효가 되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너희들이 쓰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냥 참아라, 그냥 참아지면 그것은 소화되어서 대소변이 되어서 나올 것이나 안 참아지는 건 폭발하게 돼있다 이런 말씀이었던 같습니다. 그 때는 잘못 알아들은 대신 지금까지도 유효합니다. 아무리 남다른 체험과 상상력과 글재주가 있다고 해도 그게 밀도 높은 문장이 되기 위해서는 참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연세대학교 국문과 김미영이라고 합니다. 과거로서 기억하게 되는 시대의 아픔이나 한반도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지금 선생님 작품에서 상처를 어루만지고 다시 따뜻하게 치유하고 있지만 그리움이나 향수로서 묻어두기에는 아직도 진행형의 역사란 생각이 듭니다. 글 쓴다는 사람이, 사회적 인지도가 있는 사람에게 던져지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동감입니다. 6 25는 오십년 전에 일어난 전쟁이지만 마무리 되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전쟁입니다. 양쪽이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미워하던 극한 대립은 많이 완화되어 이산가족들이 서로 오가며 만나는 좋은 세상이 됐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속엔 레드 콤플렉스가 있고, 북쪽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나마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데 자그마치 50년이 걸렸습니다. 저도 6 25이야기를 몇 번씩 반복해서 썼는데 시대에 눈치를 봐가며 창작의 자유를 조금씩 확대시켜 나가느라 그리 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통일을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이건 벌 받을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죽은 후에 통일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원한에 사무친 세대가 여기에도 살아있고 저쪽에도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무조건 용서하고 화합하는 게, 구호를 외치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조금 더뎌도 좋으니 서로 다방면으로 교류의 폭을 넓혀가면서 경제적 격차와 정서적 이질감이 비슷한 수준으로 줄어든 후에 진짜 통일은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제 생전에는 그저 외국여행 하듯 서로 비자를 발급해도 좋으니 여행의 자유라도 보장되는 걸 보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 원주를 사랑하는 김정희라고 합니다. 문학을 통해 일과 명예와 돈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예전과 환경이 달라졌습니다. 매체가 많아져 책을 많이 읽지 않게 되고, 여러 가지 영상적인 즐거움들이 많다 보니까 이제 소설은 죽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앞으로 21세기 소설과 문학의 진로를 어떻게 보시는지, 또 젊은 사람들이 문학을 꿈꿀 때 많이 절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이지만 한 사람의 노동으로서 소중한 일로서 선택하게 될 때 많이 망설이게 되고, 대가도 충분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한 각오와 소박하고 가난한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은데 문학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소설의 미래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그렇게 어둡게 보지 않습니다. 소설만 써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도 예전과 비슷하지 근래에 갑자기 나빠진 건 아닙니다. 소설로 큰 돈을 번 작가도 적지 않게 생겨난 건 오히려 예전보다 근래에 자주 눈에 띄는 현상입니다. 그런 성공사례가 갓 등단한 신인도 여태까지 종사하던 생업을 걷어치우고 전업작가로 나서게 용기를 주는 것도 사실이나 그런 행운이 자주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열정과 소신을 다해 쓴 작품은 잘 안 팔려도 본인에게는 궁핍을 위로하고 보상해주는 보물이요 긍지가 되는 게 아닐까요. 긍지와 자신감만 있다면 딴 일을 가져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육체적인 막노동 같은 것과 글쓰기를 겸하는 건 다양한 경험을 위해 권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게 성급하게 팔리는 소설을 쓰려고 문학을 타락시키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제 경험에서 우러난 소리입니다. 저는 가정주부로 있다가 등단을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업작가인 줄 알지만 실은 주부노릇과 작가노릇을 겸업한 거죠. 열 식구나 되는 대가족의 주부노릇이 얼마나 중노동인지 알기나 하십니까. 작가가 된 지는 32년이 되지만 잠 자는 시간을 줄여서 밤에만 글을 썼지 낮에 당당히 서재에서 글을 읽고 쓴 지는 15년밖에 안됩니다. 또 한국 사회는 작가에게 호의적이고 음으로 양으로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충북 제천에서 온 전호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꿈이 소설가인데 저에게 필요한 말 한 가지만 해주시기 바랍니다.(초등학교 어린이의 질문)
요새 꿈이 소설가라고 하는 아이 참 드문데 너무 반가워.(웃음) 오늘 네가 나에게 가장 큰 수확이야. 그런데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공부하란 말이지? 그 말씀 맞아. 우선 공부 열심히 해. 문학을 모르고도 다른 거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변호사도 할 수 있고, 의사도 할 수 있고, 장사도 할 수 있고. 그렇지만 소설을 쓰려면 다방면으로 뭐든지 다 알아야 돼. 그러니까 나는 이 다음에 소설가가 될 테니까 동화책만 읽자, 그러고는 수학이나 과학같은 건 못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돼. 그러니까 공부도 잘 하고 좋은 책도 많이 골라서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체력도 단련하고. 마음만 먹으면 그럴 시간 얼마든지 있을 거야. 네가 희망이다.
아버지를 여읨. 어머니와 오빠가 서울로 나가고 혼자 조부모, 숙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38(8세)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 현저동 골짜기에서 살다. 매동초등학교에 입학.
1944(14세)
숙명여고에 입학하다.
1945(15세)
소개령 때문에 개성으로 이사하여 호수돈여고로 전학 여름방학 때 박적골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서울에 와서 숙명여고에 복학숙명여고 시절 소설가 한말숙, 시인 박명성, 김양식과 같은 문과 반에서 공부한다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소설가 박노갑이었다
1950(21세)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 6월 초순에 입학식이 있고, 곧 이어 6.25가 발발하여 학교를 다닌 기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 오빠와 숙부가 돌아가고 가족 부양을 위해 미8군 피엑스의 초상화부에 취직하다.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되는데,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은 데뷔작 <나목>에 형상화되어 있다.
1953(24세)
4월 21일 직장 동료인 호영진과 결혼하다. 1954년에 첫딸 원숙을 얻은 후 원순(1955), 원경(1958), 원균(1960), 원태(1963), 모두 1남 4녀를 두다.
1970(40세)
<나목>으로 『여성동아』의 여류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하여 당선되다.
1971(41세)
<세모>(여성동아 3월호), <어떤 나들이>(월간문학 9월호) 발표.
1972(42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현대문학 8월호), <다이아몬드>(한국일보) 발표. 7월부터 장편 <한발기>를 『여성동아』에 연재하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