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할리우드 성격파 배우, 데니스 호퍼를 떠나 보내며
신인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당돌했다. 아니, 겁이 없다는 표현이 더 적당한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딘의 유작 <자이언트>(1956)의 마지막, 제트 링크(제임스 딘)의 유전 발견으로 실의에 빠진 빅 베네딕트(록 허드슨)는 그의 아들 조단(데니스 호퍼)과 설전을 벌인다. 무려 3시간2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유일하게 조단이 빛나는 순간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록 허드슨 앞에서 새파란 애송이 데니스 호퍼는 한치의 물러섬없이 아버지의 잘잘못을 따진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대배우로 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은 이후 그가 연기한 캐릭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했다.
지난 2010년 5월29일(현지시각) LA, 데니스 호퍼가 지병인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살. 그는 지난해 10월 암 진단을 받은 뒤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받아왔다고 한다. 1936년 미국 캔사스주 다지시에서 태어난 그는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1955년작 <이유 없는 반항>에서 주인공 제임스 딘을 괴롭히는 갱단 중 한명으로 데뷔했다. 그의 반골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고집이 세고, 다루기 힘든 성격 때문에 <OK 목장의 결투>(1957)를 비롯한 몇몇 영화에만 겨우 출연할 수 있었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하지 않아 “테이크를 80번이나 간” 일화만 봐도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인생의 전환점은 <이지 라이더>(1969)였다. LA에서 마약을 팔아 오토바이를 구입한 두 남자가 뉴올리언스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의 로드무비다. 전작인 <트립>(당시 무명이었던 잭 니콜슨이 각본을 썼다)에서 만난 배우 피터 폰다가 그에게 영화의 연출과 주인공을 제안했다. 1960년대 자유주의 물결에 심취하고 있던 그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감독 데니스 호퍼는 기성 세대에 대한 반항,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발을 카메라에 담았고, 배우 데니스 호퍼는 온몸을 내던져 ‘진정한 자유’를 연기했다. 결과는? 그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당대 현실을 반영한 <이지 라이더>는 그야말로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고, 그는 전성기를 열었다.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1971년에 만든 <라스트 무비>가 실패하면서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존 휴스턴 감독처럼 되고 싶다”던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물론 <미국인 친구>(1977)에서 친구의 병을 이용하려는 사기꾼,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말론 브랜도를 추종하는 사진작가, <럼블 피쉬>(1983)에서 알코올에 중독된 아빠 등 배우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70년대의 대부분을 정신과 병동에서 보냈다”고 할 정도로 약물과 알코올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1986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에서 성도착증 살인범으로 재기하기 전까지.
이후 그는 악당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뒤로 가는 남과 여>(1989), <배반의 도시>(1992)에서 킬러를, <스피드>(1994)에서 테러리스트를, <워터월드>(1995)에서 애꾸눈 악당을 맡아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데니스 호퍼 하면 반항, 저항, 악당 등 주류사회와 거리가 먼, 안티히어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도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성격파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났다. 스크린을 압도한 배우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그가 바라본 할리우드와 영화 매체는 어땠을까. 생전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캔사스주의 농촌 소년이 출세한 거지. (웃음) 내게 할리우드는 든든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데니스 호퍼, 필모그래피와 바이오그래피
<이유없는 반항 Rebel without a Cause> (1955)의 아역으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할리우드에서 추방된 채 국외를 떠돌던 방랑자로, 그리고 다시 할리우드의 성격파 배우로 재기하기까지 데니스 호퍼는 그의 인생 역정만큼이나 다사다난한 영화 이력을 보냈다.
<이유없는 반항>의 주인공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이 작품의 강렬한 이미지와 다루기 어렵고 까다롭고 불같은 성격 탓에 좀체 할리우드 주류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맡을 수가 없었다. 1967년 로저 코먼 감독의 B급영화 <여행 The Trip>(1967)에서 만난 피터 폰다와 의기투합한 데니스 호퍼는 각본을 쓰고 돈을 모으고 스스로 주연한 영화 <이지 라이더 Easy Rider>로 한방에 할리우드를 경악시킨다. 40만달러를 들여 1600만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는 60년대 최고 영화 중 하나가 됐으며, 모터사이클을 탄 두 젊은이 데니스 호퍼와 피터 폰다는 균열하기 시작하는 아메리카의 도덕을 예견하는 단초가 됐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할리우드가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동안에도 그는 전혀 통제 불가능한 독불장군으로 군림했다. 그는 오히려 피터 폰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같은 스타들과 스탭들을 페루로 내몬 후 자신의 영화인생에 관한 자화자찬격인 <라스트 무비 The Last Movie>(1971)를 만든다. 이 영화의 실패로 그는 한동안 할리우드에서 철저히 외면당했고 70년대 대부분을 마약과 술에 찌들어 살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빔 벤더스의 영화 <리플리의 게임, 미국인 친구>(1977)나 비록 조역이지만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에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1983년 나이 47살에 그는 다시 감독에 도전한다. <아웃 오브 더 블루 Out of the Blue>는 미국 중산층의 가장자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한 미국인 가족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강렬한 터치로 그려낸 문제작이었다.
연기자로 데니스 호퍼의 르네상스는 1986년에 도래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 Blue Velvet>에서 사이코 유괴범 프랭크 부스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 이후 그는 마약에서 손을 끊고 더 말쑥해진 모습으로 한해에 5∼6작품을 할 정도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 Colors>(1988)은 숀 펜과 로버트 듀발을 기용하여 경찰대 갱단의 전투라는 소재를 별다른 무리없이 그려낸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1989년 발표한 <뒤로 가는 남과 여 Catch Fire>(1989)는 조디 포스터와 자신을 주연으로 하여 인질범과 유괴당한 여자 사이의 미묘한 연애심리를 포착한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자신의 승인없이 커팅과 편집을 하자 아예 자신의 이름을 감독직에서 빼버리고 알란 스미시라는 가명으로 대신했다.
1990년대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는 감독보다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90년에 발표된 <돈존슨의 정오의 열정 Hot Spot>은 강력한 비주얼 스타일과 누아르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에로틱 스릴러로 그도 이제는 할리우드의 주류감독에 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는 <이지 라이더>의 감독이다. 그의 통렬한 냉소주의와 반골기질은 그가 감독한 영화가 그 주제의식뿐 아니라 장면 구성이나 주인공 성격, 비주얼 등에서 그다운 비주류적인 냄새를 배어 있게 한다. 언제나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고집하는 그는, 사실 스크린 밖에서는 아메리칸 팝 아트 작품의 수집가로, 개인적인 전시회를 개최할 정도로 유명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 영화감독사전, 1999.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