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동영상은 KBS드라마 서울1945 6회 중 개희가 석경의 몸종이었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개희의 실제인물 김수임은 어렸을 때 부모가 남의 집 첩으로 팔았는데(KBS 인물현대사 다큐멘터리 '여간첩 김수임' 참조), 드라마에서는 김수임이 남의 집 시녀였다는 모티브는 그대로 가져오고 친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는 소녀로 그려진다.
일제 시대를 잘 모르는 시청자들은 KBS드라마 서울1945 6회를 보고 일제시대를 그대로 옮겨온
드라마같다는 시청소감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6회는 엄청난 역사왜곡 투성이이며, 작가가 1933년의 조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예를 살펴 보자.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이 드라마는 6회의 줄거를 이렇게
소개한다: <동우(아역, 김수민 분)가 석경(아역, 박은빈 분)을 찾아온 후, 운혁(아역, 김석 분)은 집안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끌려간다. 문자작(김영철 분)은 이인평(최종원 분)에게 석경을 구해준 은혜를 갚고 싶다고 하자, 이인평은 덕산광산이라도 줄 것이냐며 넌지시 묻는다. 이에 문자작은 덕산을 동우에게 주겠노라며 석경과의 혼사를 제안하고, 이인평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문자작은 박창주(아역 고규필 분)에게도 감사의 표시를 하는데, 창주는 자신도 문자작과 같이 출세를 해보이겠다며 만주헌병교습소의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
그런데, 1933년에 만주국에 만주헌병교습소라라는 것이 있었는가? 아직 만주국 국군이 창군되지도않았던 때였고, 1930년대 후반에 만주국 국군이 창군된 후에도 조선인은 먼저 만주국에서 여러 해 거주하여 조선족으로서의 만주국 국적 신분을 취득한 후에야 입대가 가능하였다. 일본국 국적의 조선인이 입대할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헌병이 되는 것은 먼저 군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민간인에 더군다나 당시 미성년자였던 창주가 문자작 추천서로 헌병학교에 입교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하였다. 문자작 아니라 총독의 추천서로도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하였다. 당시 법률은 조선인은 군인이 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일본은 조선군의 현대화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식민지 백성은 사관학교 지원은커녕 사병 지원도 할 수 없도록 법령으로 규정하였다. 대한제국 시절 이미 군인이었던 이들의 신분은 평생 보장하되 한일합방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인이 군인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 국적은 일본국 국적이었으되 조선인은 군인 직업을 가지지 못하도록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총독부가 조선인 지원병제도를 도입한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부터였다. 조선인이 군대에 입대하려면 열우당 의원들 부친 혹은 조부들처럼 경성과 평양의 조선총독부국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하여야만 하였다. 예를 들어, 신동아는 2004년 9월호에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부친 신상묵(辛相黙.1916-1984)씨가 1938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전남 화순군 청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40년 일본군에 지원, 일본군 헌병 오장(伍長.하사)로 근무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에 따르면 ‘시게미쓰구니오(重光國雄)’로 창씨 개명한 신씨는 조선총독부국군병 지원자 훈련소를 수료한 직후인 같은해 11월8일 반도호텔에서 일본군 지원병수료생 자격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좌담회에 참석했다.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5기 동기생들에 따르면 신상묵씨는 조선총독부국군병지원자 훈련소를 나온 뒤 주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에 배치받아 근무했으며 일본군 헌병 오장(憲兵 伍長․겐뻬이 고쪼)이 됐다. 오장은 한국군의 하사관에 해당한다.
이처럼 조선인은 1937년부터서야 군대에 입대 지원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창주가 1933년에 헌병 지원을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1937년 이후 조선인이 군대에 입대하는 유일한 길은 경성과 평양의 조선총독부국군병 지원자 훈련소에 지원하는 것이었는데, 타국 만주국 헌병 지원을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37년 이후 해방 전까지 조선총독부국군이 된 자들을 한국인은 일본군이라 부르지만 총독부 법이 조선인 병사의 해외 파병을 금지하고 있어 엄밀한 의미의 일본군은 아니었다. 병역법 개정으로 조선인 병사의 해외 파병을 허용한 때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2월부터였다.)
본래 아무에게나 친일파 누명을 씌우는 것도 현명한 애국은 아닐뿐더러,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 1933년이면 조선인은 아무리 신체 조건이 좋고 아무리 직업 군인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더라도 사병 지원조차 불가능하였던 시대였다. 그런데 창주가 헌병 지원을 했다고 드라마가 방영하는 것은 역사왜곡이요, 박창주 실제인물과 그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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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논객의 토론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시사논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