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맨 뒷장부터
조수빈 (TV조선 '강적들' 진행자)
난 신문을 거꾸로 읽는다. 맨 뒷장 칼럼부터. 어떤 날은 시 한 편, 어떤 날은 인생 철학이 반갑다. 앞장으로 갈수록 점점 뜨겁고, 시끄러워진다. 1면이 가장 뜨겁다. 정치 공방, 경제 위기, 사회적 논란으로 맨 앞장은 달궈진다. 분노하고 해결을 요구하지만 숙명이 있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시간 지나면 결국 조용해진다는…. 반면, 신문 구석에서 시간 지나도 읽어볼 글을 꽤 발견한다. 하루만 지나도 가치가 떨어지는 속보가 아니라, 천천히 곱씹을 지혜 말이다.
20년 동안 뉴스를 전했다. 떠들썩하던 뉴스가 밀려나는 과정을 수없이 봐 왔다. 정치적 효능과 맞아떨어지면 그나마 관심의 수명이 더 가려나 싶지만, 결국 예외는 없다. 최근에도 큰 사고가 터졌고 희생자 사연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지만 몇 주 뒤, 몇 달 뒤, 사람들은 얼마나 기억할까?
학대받던 아이가 굶어 죽은 날이었다. 오전 뉴스에서는 톱이었지만 저녁 방송에선 사라졌다. 같은 날 대형 참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속보, 속보, 속보. 관심은 빠르게 옮아갔다. 가끔 그 아이의 죽음이 떠오른다. 벌써 십 수년 전 일이다.
한번은 코로나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를 인터뷰했다. 아버지는 지역 의료를 바꾸는 데 목소리를 내고 싶어 했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사회가 호응하나 싶더니 이내 묻혔다. 지금도 그분과는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버지는 아들을 잊지 못했는데…. 세상은 너무 빨리 잊었다. 어차피 잊을 거라면, 왜 매일 전해야 하는가?
신문을 거꾸로 읽은 건, 질문의 답을 찾고 싶어서였을까. 시끄러운 세상사가 들어오지 않아 뒷장부터 펼친 어느 날, 칼럼 속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걷는다는 것은 시간을 천천히 마주하는 일이다.” 앵커라는 역할 때문인지, 오랫동안 ‘신문은 반드시 순서대로, 다 읽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하지만 그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뛰듯이 해치우는 게 아니라 걷는 것처럼, 1면보다 생각의 여유가 느껴지는 구석의 글들부터 읽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현재’를 찬찬히 마주하게 되었다.
뉴스는 잊힐지언정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모습으로 재현되기도 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었다. 양극단으로 으르렁대는 오늘을, 고전에 빗대 해석한 기획 기사부터 읽은 날은 어땠을까? 1면 뉴스에 ‘앗 뜨거워’ 데기 전에 ‘그래도 인간사 수백 년 망하지 않고 이어왔으니 결국 조금씩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품게 된다.
아! 신문을 종이로 읽어야만 변화가 일어난다. 눈길 끄는 제목, 클릭을 유도하는 문구를 쫓다 보면 ‘지금 당장’에만 집착하게 된다. 알고리즘은 또 어떤가? 남이 설계한 대로 보는 뉴스, O X 중 하나만 선택하라 강요받는 게임 같은 세상이 얼마나 숨 막히는지! 신문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건 오늘의 속보가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지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종이 신문을 펼친다. 맨 뒷장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