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여행21 - 아라시야마에서 걸어서 텐류지에 입장해 절과 정원까지 구경하다!
2024년 11월 21일 다이도쿠지 (大徳寺, 대덕사) 를 거쳐 다카미네 겐코안( 鷹峯源光庵) 을 구경하고
백제계 조상신을 모시는 히라노 진자 (平野神社) 를 거쳐 학자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를 모시는 기타노 텐만구 진자 ( 北野の天満宮 神社 ) 를 보고는 전철로 란덴 사가역에서 내립니다.
JR 사가 아라시야마역 (嵯峨嵐山駅)을 지나 도롯코 사가에키 (トロッコ 嵯峨駅) 로 들어가니 열차는
인터넷 사전 예약제라 만석이니 다시 걸어서 내려와 텐류지 절로 가는데....
텐류지 天龍寺( 천룡사) 는 소겐치 정원이 특별명승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아라시야마 嵐山(풍산) 는 교토 서쪽에 위치한 관광 명소로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794∼1185) 에 귀족들의 별장지 로 개발되었는데 사계절의 변화가 선명하며
특히나 봄철의 벚꽃 과 가을철의 단풍 명소로 교토 시민 사이에에 유명하다고 합니다.
목조로 된 길이 154m 도게츠교 渡月橋 (도월교) 는 아라시야마의 상징이며 도게츠쿄와
게이후쿠전철의 아라시야마역 주변에는 선종의 절 덴류사 天竜寺(천룡사) 와
마쓰노오대사 松尾大社(송미대사) 등 여러 사찰과 신사, 불상, 전각이 모여 있습니다.
북쪽에는 아라시야마치쿠린 竹林 の小經 (죽림노소경) 이라고 불리는 대나무숲
과 수풀이 우거진 산의 출발점을 따라 작은 절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호즈강 保津川 (보진천) 에서는 관광객들은 보트 투어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도게쓰교 渡月橋 (도월교) 를 건너면 아라시야마코엔 嵐山公園(풍산공원) 인지라 다리를
건넜다가 오늘 교토 동쪽에 키요미즈데라 까지 모두 열곳 을 보아야 하니 시간이
부족한지라 되돌아 오는데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객으로 거리는 인파로 넘쳐납니다.
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사람들이 서른명이나 줄을 선 집이 있어 기웃거려보니 별 것은 아니고..... 보통
오뎅 가게 인데 어째서 이리도 긴 줄이 서 있는지 궁금한데 아마도 맛이 있기 때문일테지요?
좀 더 걸어 우리가 내린 아라시야마 嵐山(풍산)역을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니 오래된
사찰인 텐류지 天龍寺(천룡사)에 도착하는데... 일본에서 신사는 돈을 받지
않지만 유명한 절은 입장료를 받으니 400엔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 대방장 을 봅니다.
여기 유서깊은 사찰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절은 임제종 텐류지파 대본산 이라는데
1339년에 나라 남부 요시노에서 죽은 고다이고왕(천황)의 보리사 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소 소세키 를 창시로 교토시 우쿄구 사가에 건립한 절입니다.
원래 이 땅은 사가왕(천황) 의 황후인 단린이 개창한 단린지 절 이 있던 곳으로 후에
고사가왕(천황)이 작은 궁궐을 세우니 황자 고다이고가 어릴때 여기서
지냈으니 여기에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보리사 를 세운건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는 무로마치 막부 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가 막부를
세우기 위해 교토에서 몰아낸 고다이고왕(천황) 의 명복 을 빌기위해 지었다는
얘기인데..... 무소 소세키는 건립 자금 마련을 위해 덴류사선 을 띄울 것을 건의합니다.
원나라와 무역해 얻은 자금 으로 1343년에 칠당가람을 갖추었으며 텐류지는 교토 임제종
5산중에 최고의 세력을 구가했으나 1356년부터 8회의 대화재로 인해 가람이
소실되고 무로마치 막부가 망하면서 몰락했다가 메이지유신 이후에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텐류지 절에 딸린 무소 소세키 가 만든 소겐치 정원 은 특별 명승으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분위기는 가마쿠라의
겐초지 建長寺 (건장사) 나 료안지 龍安寺 (용안사) 하고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창설자인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는 고다이고왕과 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싸움에서 막부측 토벌대장이었으나 유배지를 탈출한 일왕이 전국에
막부 토벌의 명령을 내리자 고다이고 천황 측으로 돌아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 시킵니다.
그러나 조정의 공경 중심의 논공행상 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야심 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천황(일왕)의 겐무신정에 반대하며 거병해 이후 고다이고왕(천황)을 요시노 (吉野) 로
내쫓고 북조에 고묘 천황(일왕)을 세워 자신이 쇼군의 자리에 오르니 무로마치 막부 입니다.
예로부터 신상필벌 이라고 했으니 전쟁후 논공행상 은 국가운영의 기본인데 고다이고왕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장 보다는 자신의 측근으로 문신인 공경들을 우대한 것은
마치 임금 선조를 생각나게 하니 조선에서는 임진왜란후 "공신책봉" 을 하면서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한 문신 들은 일개 내시 까지 포함해서 공신의 숫자가 무려 90여명 입니다.
하지만 8년간 전쟁터에서 풍찬노숙하며 부모처자까지 돌보지 않고 실제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운 장수(무신) 는 불과 18명 뿐이었으니 그럼 90 대 18 이라 조선은 "칼의 나라"
가 아니고 "붓의 나라" 이었기 때문??? 그것도 1등 공신 3명 은 이미
전사한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전쟁이 끝난후 이미 병사한 권율등 모두 "죽은자들 뿐" 입니다.
"전쟁터 나간 장수의 공이 지극히 높으면 임금도 시기하고 하늘도 미워한다 " 고 했던가요?
붓을 쥔자들의 농간으로 내시도 십수명이나 공신칭호 를 받는데 전장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무장과 재산을 바쳐 궐기한 의병들은 공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으니...
그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장수들은 싸우는 시늉만 했고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임금 선조도 할말은 있을터... 임진왜란이 발발해 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왜군을 끌어
들였다고 의심했으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장정이 걸어서 스무날 걸리는 거리인데
왜군이 불과 스무날만에 서울에 입성했으니 이는 조선이 왜군 길안내 를 했다는 뜻이라?
명나라 관리가 평양성에 와서 왜군과 대치중인 조선군을 보고 비로소 의심을 거두게 됩니다.
해서 명나라 황제는 먼저 엄청난 양의 은을 군자금 으로 보내주는데 선조는 군사비로
쓰지 않고 왕비와 후궁이며 왕자들 그리고 호종하는 대신과 내시 들에게
나누어 주는지라..... 광해군과 유성룡 등은 황망해서 사양하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조선의 최일선인 부산 경상좌수영 박홍 은 배 한척 띄우지 않고 불지르고 도주했으며 경상죄병사
이각도 달아나고 우병사는 숨어버렸으며 이일은 병정놀음에 학살당하고 신립 은 충주
에서 한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 한강 방어군과 한양 수비군 은 화살 한대 날리지
않고 도주했으며 남도근왕군 이광등 6만은 1600명 와키자카에게 몰살당했는데 조선군을 믿으랴?
왜군을 막을 군대는 천조인 명나라 군대 뿐이니, 간곡하게 글을 써서 명나라군을 청해오고
그 뒷바라지를 하는 문신들과 내시 들이 중요하다고 미리 은을 나누어 주었으며
후일 논공행상을 할 때도 왜군을 물리친 명나라군을 접대한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런 잘못된 생각이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교토에 아시카가 막부(무로마치 막부) 를 열어 동생 다다요시와 이원정치체제를 수립하나
요시노로 쫃겨간 남조 고다이고왕(천황)군 과 싸우는 한편 동생과 대립하니
10여 년에 걸친 치열한 싸움 끝에 다다요시를 살해하고는 무로마치 막부 를 안정시킵니다.
고다이고왕(천황) 은 제96대 일왕으로 귀족 사회의 기존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을 장려하는등 조정정치를 개혁 하는 한편, 비밀리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을 진행하였으나 두 차례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막부에 의해 오키로 유배 됩니다.
그러나 무사들의 봉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복귀하였으나 귀족과
무사들의 반발을 사게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기 를 들자 삼종의 신기를 넘겨주고
요시노로 탈출해 60년간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가 병존하는 남북조 시대 가 열립니다.
고다이고왕(천황)은 요시노에서 권토중래 를 꿈꿨으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의 주력이 전사하고 무쓰로 향하던 노리요시 친왕의 배가 폭풍우를
만나는 등.... 남조의 세력이 급속히 쇠퇴하자 1339년 노리요시 친왕 에게 양위하고 죽습니다.
“조적토멸 · 교토탈환”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52세였는데 고다이고왕(천황)
은 ‘이화집’ 과 ‘신엽화가집 (新葉和歌集)’ 에 일본 고유 형식의 시가인 와카 를
남겼으니 적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영리하게도 여기에 절을 세워 민심수습에 나선 것입니다.
고다이고 천황(일왕)이 죽은후에도 남북조의 대립은 계속되다가 1350년 북조의 내분을
계기로 남조군은 한때 교토를 점령 하기도 했으나 3대 쇼군 요시미쓰대에 이르러
이마가와 사다요가 남군을 제압한후 1392년 막부는 남조 고카메야마가 황위를 북조
고코마쓰에게 넘기면 고카메야마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어 황위를 잇는 조건으로 통일됩니다.
남북조 시대 는 1333년부터 1392년까지 60년간으로 왜구의 침략 700회가 이때 집중되었으니
공민왕(1352년~1374년) 시기에 100회 에 달하고 우왕(1375년~1,388년) 때에는 370회 로
합쳐 470회 이니 경상도와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전국이 약탈당했으며
강화도가 함락되고 황해도에 상륙하니 고려는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 으로 옮길려고 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런 대규모의 왜구라면 개인이기 보다는 남조의 군대 가 교토를 회복하기
위한 군자금 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고려를 약탈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북조와 대치해 그럴 여유는 없었으니..... 중앙이 혼란에 빠져 지방에 대한 통제력 이
상실되자 규슈와 서부일본 지방 영주 들이 민간의 왜구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으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