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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묵상글 (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 사람과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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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2 04:06
- 사람과 사랑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 복음의 장면은 처음서부터 팽팽한 긴장이 느껴집니다.
물론 이 긴장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야기를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장애인을 고쳐주실지 지켜보고 있었고,
고쳐주실 때는 고발해야겠다고 미리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주님도 이것을 미리 알고 계셨을 테지만 정면 돌파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을 미루거나 하지 않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충돌이 불가피한데 주님은 충돌도 피할 생각이 없습니다.
주변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핵심으로 직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핵심입니까?
제 생각에 핵심 중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남의 목숨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는 당시 유대교가 중시하는 안식일이 핵심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중요한 것일 뿐이지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이 이것이기에 안식일도 살리는 데 이바지해야만 됩니다.
안식일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핵심을 간과합니까?
사실 우리는 지극히 하찮은 일들 때문에 자주 핵심을 간과합니다.
간과(看過)란 지나쳐본다는 뜻인데
어느 것을 보느라 봐야 할 것을 지나친다는 뜻이 있으며,
과오(過誤)를 범한다는 뜻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과의 잘못을 우리도 자주 범합니다.
복음의 사람들처럼 덜 중요한 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에 이어 오늘 또 말씀드리지만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과 사랑.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려는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중요한 일을 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든
사람과 사랑이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핵심인 가치를
간과하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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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책은 아주 인상 깊습니다. 주인공은 체코 공산 정권 시절, 전도유망한 대학생입니다. 그는 방학 중에 여자 친구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여자 친구는 공산당 교육에 참여해 버립니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가 공산당 교육이 너무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에 짜증이 난 주인공 루디빅은 곧바로 농담이 섞인 엽서를 아래와 같이 보내지요.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이 엽서는 공산당을 비판한 것이 되어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5년을 지내게 됩니다. 사실 가장 믿었던 친구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당에서 쫓겨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친구에 대한 복수와 저주를 계속 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15년 뒤, 수용소 출소 후에 곧바로 복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인 친구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복수하려던 대상은 과거이고 자기 환상으로만 존재함을 깨닫게 되지요. 즉,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말, 행동은 언제나 과거일 뿐입니다. 현재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현재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모두 현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도 안식일 논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하고 있지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안식일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 죽이는 것 등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과거에 매여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더 확장되어서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맞춰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현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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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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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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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펴집니다
저수지 얼음이 깨지면서 빙판 위에서 놀던 중학생들이 물에 빠졌는데 친구를 구하려고 애쓰다가 한 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구해야 한다’ 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서 이기심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습니다(탈출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고하고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저항과 반대에도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 용기를 지녀야만 합니다. 이러한 인내와 지구력은 예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무시하고 불평합니다. 좋은 일에는 인색하고 남을 해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섭니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완고한 마음을 지닌 환자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자격지심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 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죽인 카인의 손은 살인의 손,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무리의 손은 폭력의 손이다. 예리코를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사제나 레위의 손은 오그라든 손이다. 반면 강도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간호해 준 사마리아 사람의 손은 선한 손이요, 봉사의 손이요, 활짝 펴진 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쥔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쥔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믿습니까? 이 믿음은 나의 삶을 변화시킵니까?"(프란치스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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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목사님이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가는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최근의 통계를 설명하였습니다. 한때 개신교 신자는 천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팔백만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는 이백만 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금은 오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의 증가는 세례받는 새 신자도 있지만, 개신교에서 개종한 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개신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한 자료에서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품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말씀, 친교, 봉사, 나눔이 있어서 좋은데 허전한 무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허전함이 ‘영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개신교처럼 다양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명품 같은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동안 같은 전례를 이어오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례와 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톨릭의 전례, 성사, 수도자, 성직자의 모습은 마치 명품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접근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봉사하면서 직급이 있는데, 가톨릭은 그런 직급이 없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어느 곳이나 같은 전례와 말씀으로 미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여행을 가도, 출장을 가도 성당만 찾아가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그날 전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지순례 다닐 때는 제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른 미사 도구는 모두 성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명품은 비싸기도 하고,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명품 같은 가톨릭은 쉽게 찾을 수 있고, 큰 비용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작은 정성을 칭찬하셨듯이, 가톨릭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톨릭이 지닌 소중함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179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심문하던 관원의 말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제로서 1년 짧게 사셨지만,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고, 목자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짧았지만,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의 수호자가 되셨고, 사제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179년 전에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신이 천주교인요?”라는 말을 ‘주제어’로 삼았던 것은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가난, 병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예언자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엘리야가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례자 요한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 중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나는 이제 천국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천주교인답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체적인 혈통이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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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손이 오그라든 나는 회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회당에 앉아 하느님을 원망도 하고 간청도 하며 지냈습니다. 회당 안이라 큰 소리는 못 내지만 마음속으로 크게 부르짖으며 하느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내 소원은 단 하나입니다. 오그라든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기도하던 한 젊은 사람이 가운데로 나오라고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회당을 더럽혔다고 끌려 나가 돌을 맞을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어 회당 가운데로 걸어 나갑니다.
주위의 사람들은 ‘저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나 한번 보자’라고 말하며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앞에 세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강하게 그러나 격하지 않게 소리를 치시는데 그 소리가 내 귀에 들렸을 때 나의 모든 지난 행실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을 몰라라 했던 날들, 시기와 질투, 방탕과 저주로 일상을 살아온 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손을 펴달라고 간청하고 있지만 실제로 병들고 오그라들어 있는 것은 나의 행실과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 부끄럽습니다. 오그라든 손은 이제 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진정 부끄러운 것은 바로 나의 더러운 마음입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이 가까이 오시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고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손을 뻗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렇게 오그라든 손은 치유되었습니다. 손이 나은 것도 기쁘지만 더욱 기쁜 것은 마음도 깨끗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이 지금 내 눈앞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에 더욱 기뻤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오늘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배낭 두 개
-사람은 누구나 단점을 넣는 배낭 두 개를 메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을 담는 배낭은 앞쪽으로 메고
자신의 단점을 담는 배낭은 뒤쪽으로 멥니다.
그러니 늘 잘 보이는 것은 나의 단점이 아닌 다른 이의 단점일 수밖에요.- (바오로 만평집)
우리는 모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은 잘 보면서 자신의 단점은 잘 못 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가 우리 단점에 관해 말하면 괜히 미움의 싹이 자라나니까요.
다시 한번 배낭을 고쳐 메야겠습니다.
내 단점 배낭을 앞으로, 다른 사람 단점 배낭은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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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법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사람이 먼저다”, 옛 대선 후보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어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이,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람을, 사랑을 중심에 놓고 보면 결론은 단순명쾌하게 나옵니다. 전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대한 분별의 잣대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생각하면 역시 답은 자명해집니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분별의 잣대 예수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의 경계하는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 고유의 자유로운 처신으로 두려움없이 용기있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불쌍한 사람을 주시하며 말씀하시니 첫눈에 들어온 불구의 사람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절과 자존감의 상실로 위축된 모든 이들이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 분연히 일어나 예수님 앞에, 삶의 중심 자리에 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늘 화두처럼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선이나 악이냐? 살림이냐 죽임이냐? 선택해야 하고 답은 이미 제기하는 물음 안에 있습니다. 양비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교황님 말씀도, ‘선을 행하라’ 무수히 말하는 시편도 연상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부터 불순했고, 상식도 양심도 오염되어 있어 올바른 분별을 못합니다. 비열하고 비겁하며 애당초 정직성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말그대로 인간실격입니다.
이들은 묵묵부답 입을 열지 않았고, 주님은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 보시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정말 완고한 마음 역시 마음의 중병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들어 온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수행의 노력을 게을리하면 세월 흘러가면서 마음은 절로 편협해 지고 굳어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주님께는 사람이, 사랑이 먼저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또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흡사 “마음을 뻗어라,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역시 오그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집니다. 손과 더불어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져 심신이 치유되었을 불구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실정법을 초월하는 두 가지 원칙을 배웁니다. 더 큰 선이 거부되지 않는 한, 선을 행하는 것은 항상 정당화 된다는 것이며, 진실로 사랑에 찬 행동은 비록 법을 위반하더라도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법앞에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사랑이 아닌 안식일법이 절대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역시 절대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사랑의 법에 따라 주일을 못지킬 수도 있는 것이니, 새삼 사랑이, 예수님 마음이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었듯이, 예수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3,2)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밝힙니다. 새삼 사랑밖에 길이 없음을,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착한목자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착한목자’이자 ‘대사제’가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입니다. 히브리서가 시편110장 4절은 근거로 옳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너는 멜키세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이자 ‘사제’로서의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목자직의 영성과 사제직의 영성을,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배우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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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느 안식일에>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적대자들이
회당에서 만났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인가 일을 하셨지만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던
적대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까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뭇시선을 피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측은하게 보셨지
적대자들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예수님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있는 지 없는 지조차 모를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따뜻하게 가운데로 부르셨지
적대자들은
조심스럽게 가운데로 나오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가는 눈길조차 건네지 않으며
예수님을 더욱 매섭게 노려보았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을 수 없다고
손을 뻗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얽어매었던 사람에게
손을 뻗어 자유가 되라 하셨지
적대자들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서서히 힘겹게 손을 뻗어
성하여지는 감격스러운 시간에
분노 가득한 마음 안에서
부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예수님의 목을 조였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다시 살리셨지
적대자들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그냥 버렸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려 애쓰셨지
적대자들은
살리시는 분을
어떻게든 죽이려 마음먹었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선한 눈빛으로
아픈 이를 보셨지
적대자들은
독기 품은 눈빛으로
살리시는 분을 보았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좋은 일을 하셨고
적대자들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였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구하셨고
적대자들은 죽였지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일하셨고
적대자들도 일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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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마르 3,5)
분노의 조절
선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하고 거룩한 애덕에서 유래하는 이 움직임, 이 감정을 악덕이라 불러야한다면, 우리는 진짜 악덕 또한 덕목이라고 부르도록 내버려 둡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올바른 이성을 따르는 한, 그리고 필요한 곳에서 발휘된다면 그땐 감히 누가 그것을 병고라거나 타락한 정염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 친히 종의 모습으로 인간 생활을 하기로 작정하셨으며(필리 2,7 참조), 아무 죄가 없으면서도 그 감정을 표명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주저 없이 표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육체도 진짜고 정신도 진짜인데 인간 감정만은 가짜였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복음서에서 전하기를, 그분은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대해 분개하고 슬퍼하셨고(마르 3,5 참조), “너희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참조) 하고 말씀하셨으며,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때는 눈물을 흘리셨고(요한 l1,35 참조), 당신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나누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라셨으며 (루카22,15 참조), 수난이 다가오자 그분의 영혼이 근심싸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마태 26,38 참조).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둘째,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하느님을 위해서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말을 달리 표현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러한 가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든 진리를 위해서든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초차 모를 정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알지도,깨닫지도, 감지하지도 못할 만큼 모든 지식을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일체의 지식을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 속에 있던 때는 우리 안에서 아무것도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살던 것은 우리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 그랬듯이 우리 자신의 지식을 여의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을 하느님이 이루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빈손으로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319)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그러나 이 싸움은 근본적인 의미도 지니면서 교횡권 자체에 예상 밖의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황제의 반격은 이미 각 교황이 아니고, 처음으로 제도로서의 교황직 자체를 목표로 삼았다. 1324년에 루드비히는 요한 22세를 공의회에 항소하였다. 그의 궁정에 모든 교황 반대자들이 모였다. 프랑스에서 도망해 온 파리의 두 박사, 즉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와 얀됭의 요한은 1326년에 레겐스부르크에서 <평화의 옹호자>라는 제목의 논란서를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이 논란서에서 그들은 교회의 교계제도를 의문시하고, 민주적인 구조를 요구하였다. 또한 그들은 교황 수위권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고, 교회에서의 최고 권한을 오로지 민중에게 귀속시켰다.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공동체이다. 평신도를 우선하는 성직자의 우위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도, 주교와 사제도 그리스도로부터 하나의 특별하고 고유한 기능을 받지 않았고, 다만 그들은 신자단의 위촉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 신자단은 공의회에 의하여 대표된다. 그러므로 최고 기관은 교회의 백성을 대표하는 공의회이다.
이러한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교회 개념은 교황직을 공의회의 단순한 집행기관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교황을 공의회에 종속시키고 교황에게 공의회에 복종할 의무를 지웠으며, 공의회에는 언제나 교황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를 폐위시킬 권려를 부여하였다. 공의회를 근본적으로 교황 위에 두는 이 이론은, 보통 “공의회 우위셜”로 불린다.
그것은 이후 시대에서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비뇽의 교황직이 전개한 재정 조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교황령으로부터 수입이 점차 감소되는 데 대한 대안을 마련해야 했던 것과 관계가 있었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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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작은 이 향해 우리 손 내밀 때 /
박윤식 [big-llight] 2025-01-21 ㅣNo.179477
회당에 모인 군중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쪽 손 오그라든 이를 고치시는지를 주목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고비를 어떻게 맞으시는지 보고 싶었고, 그분을 고발할 적당한 구실도 찾으려는 속셈인 게다. 안식일에 그를 고치시면 안식일법 위반이고, 그 잘난 율법 지킨다면 사랑실천을 하지 못한 게 되니까. 우리도 오그라든 마음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를 늘 돌아봐야 한다. 우둔한 원숭이가 먹잇감 욕심에 움켜쥐고는, 사냥꾼이 친 올무에 그냥 잡히는 신세마냥.
사람의 아들인 안식일의 제정자이신 예수님과, 겉으로만 율법의 준수자요 속으로는 백성과 하느님사이를 가로막는 바르사이들의 결전장이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일어나 나와라.”하시며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 하는 게 합당하냐? 남을 해쳐야 하냐? 목숨 구하는 게 합당하냐? 죽여야 하냐?” 그들은 침묵이다.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이 완고한 것에 슬퍼하시면서 그에게, “손을 뻗어라.” 이르셨다. 그가 손을 뻗자, 다시 성하여졌다.
어디에나 마음 뒤틀린 이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말도 시큰둥해 한다. 선한 행동은 깎아내리고 착한 것에도 꼭 토를 달더라. 칭찬은 아예 하지 않으면서, 늘 따지며 부정적이다. 긍정적인 면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이들이다. 가끔 이런 이들은 실눈으로 위아래를 쬐려보며, 막판에 가서는 내가 내라는 식으로 막무가내 눈살을 크게 뜬다. 평생을 그렇게 따지고 살며, 이웃의 아픔은 전혀 아랑곳없다고나 할까. 우리는 살면서 적어도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에 직면하기도.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는 버릴 수밖에. 주먹 쥘 건가, 펼 것인가?
이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선택하여야만 한다. 움켜쥐는 것과 내어 주는 것 중에 하나를.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예수님께서는 쬐려보는 이들이 수두룩해도, 안식일에 당당하게 보란 듯이 손이 오그라든 이를 고치셨다. 그것도 손 오그라든 이를 불만투성인 그들이 정면으로 보도록 앞으로 불러내시고, 보무도 당당하게 치유하셨다. 자비가 가득하신 그분께서는 속으로는 그들의 완고함에 슬퍼하셨지만, 겉으로는 노기 띠시며 확신에 가득 찬 사랑으로 힘차게 외치셨다.
이렇게 그분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우리도 이런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그러기에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매번 신중히 고민하고 결단해야만 한다. 그 선택 기준은 수차례나 들어온 예수님 말씀이리라. 그분은 자기 뜻 관철을 위해서는 어떤 도전에도 굴하지 않으셨다. 그만큼 보무도 당당하셨다. 때로는 칼을 치켜 뽑으신 거나 별반 다름없는 노기마저 띠셨다. 그 확신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선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사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살다보면 손을 움켜쥘 때가 있다. 화났을 때나, 앙심 품었을 때, 누군가에게 폭력 휘두를 때에, 그리고 자신 능력을 과신할 때 손을 움켜쥐리라. 그것도 두 주먹 다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이도 이와 비슷할 게다. 어쩌면 그의 오그라든 손은 분노와 좌절, 절망과 앙심의 표상일 수도.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보다 마음이 굳어진 이들을 더 슬픈 눈으로 바라보신다. “손을 뻗어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병자 치유가 아닌,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도움의 손 내밀지 말라는 이들을 향한다. 손을 뻗어 이제 이웃과 함께하라는 외침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손을 움켜쥐고 사는지? 내 손 뻗어, 그분께서 주시는 기적과 함께 하루를 살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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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예수님을 어떻게든 망신 주고 혼내는 데만 쏠려 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이가 온전해지는 일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아마도 고발하려는 자들이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 불행한 모습을 바라보며 연민을 가져 그 무디고 완고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생기기를 바라셨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으로 그들을 부드럽게 다독이시며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3,4)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습니다.
입도 마음도 모두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3,5)라고 말씀하시고,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곧바로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우리이지만, 우리 마음이 때때로 무관용과 적대로 완고해지고 경직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각박해지고 입이 사나워질 때도 있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나날에 따스한 연민과 친절함이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그리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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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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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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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 3)
우리는
더 이상
오그라듦의
노예가
아닙니다.
아픔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오그라듦을
풀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지켜보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오그라든
아픔을
풀어주시며
우리의
자존감을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오그라든
우리의
아픔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더 이상
눈치의 노예로
살지 않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는
꺾이고
뒤틀린
우리 마음 속을
들여다보십니다.
그만큼
귀한
사람입니다.
당당하게
가운데로
나오고
당당하게
손을 뻗어
사랑을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오그라들게 한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아픈 과거가
오그라들어
우리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그라듦의
헛것이 아닌
치유의
온전하고
건강한
생활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오그라든
영혼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영혼입니다.
사랑의 영혼은
가운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며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마음을 뻗어
손을 뻗어
기도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속을
정직하게
만나는
온전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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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국 문학의 치열함과 높은 품격, 우아함과 섬세함을 전 세계 앞에 드러낸 한강 작가의 한림원 강연 중의 한 표현이 지금 오늘 우리 세월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작가의 우리 시대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예지력에 큰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찌 그리 몰상식하고 저급한지요?
동시에 폭력적이고 잔인한지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뻔뻔한지요?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인지요?
자신들이 매일 자행하고 있는 일상적 폭력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반인륜적인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추종하고 맹신하고 있는 대상들이 그릇되고, 얼마나 무모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제발 빨리 깨닫고, 그 끔찍한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고, 오랜 장애로부터 해방된 동료 인간을 향해 축하의 박수를 쳐주고, 함께 기쁨을 나누어도 부족할 텐데...
치유자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오히려 그 잘난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그분을 고발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 율법을 오래 전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 속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단1도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음의 올가미에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 앞에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노기 띤 표정, 슬픈 얼굴로 외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 3-4)
세상 구리고 사악한 고발자들의 모습과 요즘 우리 모두의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습니다.
법꾸라지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법을 공부했다면, 그 법을 정의와 공정한 판결을 위해 사용해야 마땅한데, 어떻게든 자신과 가족의 비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합니다.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해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슬프고 사악한 시대지만 일상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동시에 이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금수만도 못한 존재들이 널려있지만, 동시에 존재 자체로 기쁨과 위로를 선사하는 천사 같은 존재들도 수두룩합니다.
이 소중한 조국 우리 대한민국이 다시는 독재자나 폭도들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그 야심한 밤, 그 강추위를 뚫고 국회로 달려가 온몸으로 맞선 꽃같은 사람들, 그분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존재들이시며 길이길이 감사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끝끝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마음이 오그라 들대로 오그라든 사람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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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죽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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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일의 의미: "졸지 마! 세상은 호구야!"
오늘 복음도 안식일 법의 의미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는 이는 부모이고 창조자입니다.
불안을 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부적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 평화로서 자녀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안식일에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세상에 나갈 용기도 낼 수 없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중앙으로 부르십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쫄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시는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호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시고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자녀에게 평화를 줄 수 없음을.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금쪽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나옵니다.
엄마가 음주운전 피해자로 사망하자 아들은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하고 컴퓨터만 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자 아들은 울면서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진짜 너무나도 살기 힘든데….
제 인생에서! 제 가정에서! 진짜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제 가정에서! 인생에서!
(컴퓨터가) 유일하게 살길을 만들어주고 있다고요! 유일하게….”
아빠는 왜 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을까요? 아빠조차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 옷장을 열어놓고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들 좀 지켜줘. 내가 더 열심히 할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당신은 못 와도 내가 갈 수 있으니까 갈게. 가서 또 잔소리해 줘. 너무 그립다. 미안해.”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날 수 있을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크리스 가드너란 자수성가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954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가난, 가정 폭력, 위탁 양육으로 얼룩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드너는 유명 중개 회사에 무급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노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보호소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가드너의 인내심은 결실을 보았고 결국 Series 7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 주식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 자신의 중개 회사인 Gardner Rich & Co.를 설립하여 재정적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수천억을 번 가드너는 자신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엄마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노숙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군가가 네게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두지 마라.
나조차도 마찬가지야. 알겠니?
네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네게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 해.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그걸 가져. 끝이야. 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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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삶 전부’가 ‘신앙인의 삶’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1) 이 이야기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데리고 온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라는 말은, 함정을 파 놓고서 예수님께서 그 함정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안식일을 어겼다고 고발당하고, 그 고발이 사실이라는 것이 입증되면, 안식일을 어긴 죄인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했다는 말은 곧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당연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아니라면 공동체에서 추방하거나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자는 죽여야 한다는 구약 율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고방식입니다.>
2)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그 장애자를 고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들에게는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점만 중요했습니다.
바리사이들도 생명이 위독한 응급 환자라면 안식일에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자는 생명이 위독한 응급 환자가 아닙니다.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치료를 미루어도 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애자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모든 상황과 함정을 알고 계셨음을 나타내고, 바리사이들의 악한 의도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들의 함정을 완전히 무너뜨리려고 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정면으로 맞서신 것은, 글자 그대로 당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바리사이들도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3) 여기서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이(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은 ‘안식일’이라는 특정 요일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관한 질문입니다.
선 자체이신 하느님의 뜻은, 사람들이 언제나 항상 ‘좋은 일(선한 일)’과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안식일에만 하고 다른 날은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날과 모든 시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질문에는 “선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 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침묵은 자기들의 사고방식과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기를, 또 회개하기를 거부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함에 노여워하면서 슬퍼하신 것은, 그들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신 것입니다.
4) 신앙인은 ‘삶 전체’가 ‘신앙인의 삶’인 사람입니다.
주일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다른 날에는 하지 않는다면, 또 교회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처럼 산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신앙인이어야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 뜻에 합당한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존재와 신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한 번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곳에서는, 또는 어떤 시간에는, 또는 어떤 상황에서는 신앙인이 아닌 척 하거나, 비신자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부인하는 일이고, 그것은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정치인’의 경우에,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정치를 해야 하고, ‘군인’의 경우에, 신앙인이라면 신앙인으로서 군 복무를 해야 합니다.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또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신앙인이라는 존재와 신원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또 신앙생활이 면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세속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런 때에 더욱더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고, 신앙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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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3,1-6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어떤 마부가 당나귀 한 마리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나귀는 마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고삐를 앞으로 당기면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다가 억지로 끌려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부는 당나귀의 고삐를 잡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마부와 당나귀가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나귀가 그만 실수로 미끄러져 절벽 끝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마부는 당나귀를 구하기 위해 당나귀의 꼬리를 힘껏 잡아 당겼습니다. 그리고 절벽에서 당나귀를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고집스러운 당나귀는 마부가 꼬리를 잡아 당기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습니다. 마부는 그런 당나귀가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지만 그대로 둘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잡아당겼고, 당나귀는 끌려가지 않게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치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실랑이를 하느라 힘이 빠진 마부는 어쩔 수 없이 당나귀의 꼬리를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내가 졌다. 하지만 너는 그 고집 때문에 절벽에서 떨어지고 마는거야."
이솝우화에 나오는 '마부와 당나귀'라는 이야기입니다. 마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절벽 위쪽으로 끌어당기는데도,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며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마는 당나귀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집 세고 완고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지금 가는 길이 파멸의 나락을 향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 생각이 맞다는 교만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면 체면이 망가지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까봐 겁이 나서,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가던 길을 계속 가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화를 내시고, 그 교만함 때문에 당신께서 알려주시는 올바른 길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려고 하는 고집 때문에 슬퍼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실지 말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샌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문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나쁜 길로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제와서 예수님께로 돌아설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창피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 등을 돌렸다가는 어떤 불이익과 보복을 당하게 될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의 잘못 때문에 부모님께 혼나는 어린 아이처럼, 어떻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 옳은 일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삐쭉 내밀고 침묵으로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지만 그들을 잃지 않으려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꼬리'를 잡고 계신 손을 놓고, 안식일이지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충분히 기회를 주셨기에, 예수님께서 최선을 다해 멸망의 나락에서 건져주려고 애쓰셨음에도 그분의 손을 뿌리친 것은 그들이기에,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될 것입니다. '지옥'은 이처럼 '고집 센 당나귀'들이 가는 곳입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고집을 꺾고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그분께서 내미시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파멸의 나락으로부터 구원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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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손을 뻗어라! ”
성경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제 ‘멜키체덱’이라는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살렘의 왕'이라는 설명 외에는 성경 어디에도 그의 부모도 가족에 대한 개인 신원에 대한 어떤도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특히 시편 저자에 이르기까지 멜키체덱은 마치 이상적인 대사제의 대명사처럼 불려왔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서간 저자도 창세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사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살렘’이라는 히브리어가 ‘정의’라는 말을 들어서 설명까지 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살렘’이 훗날 ‘예루살렘’이 되었다고 설명을 하지만 그 장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증된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 서간 저자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대 사제 ‘멜키체덱’과 닮은 사제,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해서 설명하며 시편 110,4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사제에 대한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히브 7,15-16)
대사제는 사제들의 으뜸입니다. 성전에서 그의 권위로 사제들이 각자의 임무에 질서정연하게 충실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위치가 아니라면 성전은 하느님의 집으로 하느님께 대한 전례의 장소로서의 기초가 흔들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이면서도 또한 구원자이십니다. 세상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의 역할은 성전에서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백성의 원의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사제도 성전 밖의 백성의 아픔까지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이시면서도 또한 치유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도 찾아 나서는 목사이십니다. 그 길이 험하고 어둡다고 해서 포기하는 삯꾼의 목자와는 다릅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라도 헤매는 양을 애타게 부르며 찾아다니십니다.
안식이라고 해서 치유의 일을 그만 두실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의 이런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반대자들은 회당에서 안식일 법을 어기는지에 대해 주님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들의 반대나 질시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그것도 안식일에 당당하게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으라.’고 사랑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는 이제까지 손이 오그라든 불구의 몸이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손을 펴서 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병자의 처지였지만 이제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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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혼의 석화(石化)를 벗어나
오늘 복음은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해치고 죽이려는 적대자들의 행동(3,6)에도 불구하고 병으로 위축된 삶을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준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자는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탈출 31,14).
에세네파에 속한 다마스커스 학파는 이를 매우 엄격하게 해석했지만, 바리사이들은 인간을 고려한 다소 완화된 해석을 했다. 곧 생명이 위독한 경우에는 안식일일지라도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았다. 결국 그들의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율법을 어긴 셈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하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3,4). 여기서 예수님의 의도는 안식일일지라도 죽을 위험에 있는 이들을 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일반 병자까지 고쳐주는 선행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셨다.
그분은 철저히 인간을 위하시는 분이시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은 너희는 어찌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 가운데 가장 고약한 짓, 곧 사람을 죽이는 일을 꾀하려 하느냐 하는 반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고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셨다.’(3,5)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완고함과 불신앙에 대해 분노하시고 슬퍼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시기, 질투, 모함, 험담, 과장, 비난, 헛된 말은 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목덜미가 뻣뻣한 백성’, ‘마음이 고약한 자들’ 등으로 표현되는 ‘마음의 완고’함은 신명기 계통의 심판 사상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불순종을 함으로써 선민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는 사상을 계승한 것이고, 동시에 예언자들의 사상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어떤 의미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완고한 백성 이스라엘의 손에 의해서 희생되는 예언자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태도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일회적 반박이 아니라 안식일 자체를 하느님의 선과 생명이 드러나는 날로 바꾸시고자 하신 것이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뻗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3,5).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위축된 그의 삶을 회복시켜주셨다.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육신의 병(질병)과 영혼의 병(죄)으로 인해 위축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또 진리 앞에 문을 걸어 잠근 바리사이들처럼 오만과 고집, 닫힌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에 만족하면서 소극적으로 안주하지 말고, 선행을 하지 않음이 곧 남을 해치는 것임을 인식하여 좀 더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인간을 살린다.”(2코린 3,6)는 말을 가슴에 새겨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규범 안에 가두는 완고함에서 벗어나자! 혹시라도 나만이 옳다는 생각, 편협, 편견, 고집, 자아도취, 강한 자기주장, 폐쇄적 사고 등 영혼의 석화(石化) 과정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지 들여다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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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르코는 안식일 논쟁을 이어갑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 율법 중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규정이 중요하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았음을 말해 줍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쉬어야한다는 규정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로 삼아라."는 원래의 뜻과 취지는 어디로 가버리고, "일 해서는 안 된다."는 말마디에만 집착함으로써,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는 일이 아닌지 사안마다 해석을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먹고자고 다니는 일 등 일을 안 하고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율법을 해석해 줄 전문가들이 필요했고 그들이 바로 율법교사들인 셈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넘어서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과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으냐는 질문으로 바꾸면서, 안식일의 의미를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던 관례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쪽 손(루카는 굳이 오른쪽 손이라고)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정상적인 사회활동과 정상적인 생업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 나와서도 마치 죄인인 양 뒷쪽 구석진 곳에 움츠려 있어야만 했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당당하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고 하십니다. 사실 장애인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무시당해야 할 죄인이 아닌데도 그들은 스스로 움츠려들고 또 사람들도 그들을 무시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사고 때문에 그를 돕기는커녕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일까지 문제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노기를 띠시고"(마르 3,5ㄱ),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시고 "몹시 슬퍼"(마르 3,5ㄴ)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얽메어 사랑하고 좋은 일을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의 그 닫힌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마음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저 "손을 뻗어라."(마르 3,5ㄷ)고 하십니다. 그는 아마도 늘 자신이 없어 손을 감추고만 살았을 겁니다. 남이 보고 무시할까봐 스스로 죄인인 양 움츠리고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치유는 자신감 회복으로부터 시작되어야 옳습니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실로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 3,5ㄹ)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도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처럼, 감추고 싶은 약점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있게 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손을 뻗어라." 하시네요. 그렇습니다. 약점이나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귀한 아들딸입니다. 자신있게 손을 뻗어봅시다. 그러면 우리도 치유되어 성한 몸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들 특히 나처럼 자신 없어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시게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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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2. 연중 제 2주간 수요일.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삶
<2025.1.22>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4:1~15절)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삶❞
❚ 어떠한 환경과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행동할 때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 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명령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절).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합니다. 엘르아살은 아론의 셋째 아들로 요단 서편 지역의 땅 분배에 있어서 여호수아와 함께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가 기업을 분배받지는 않았지만, 요셉의 자손이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로 나누어졌기 때문에 기업 분배는 열두 지파가 됩니다. 땅 분배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진 것입니다.
가나안 땅 분배는 제비뽑기였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에 특별히 영향력이 있는 지파에게 치우친 것이 아니라 모든 지파에게 균등하게 배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으로 인해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에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땅 분배였습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불만의 요소가 많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머물게 하신 곳이기에 이곳이 그리고 이 교회가 가장 좋은 환경이고,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사명에 충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12절).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6절). 45년전 갈렙의 나이 40세였던 그 때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10명의 정탐꾼들은 백성들을 절망하게 하는 내용을 보고 했지만, 갈렙은 ‘성실한 마음’(7절)으로 모세에게 보고했고,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기에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네 자손의 기업이 될 것’(8~9절)이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팔십오 세가 되었음에도 강건하고,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약속하신 산지를 달라고 담대하게 요청(12절)합니다.
갈렙에게는 분명하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설령 땅을 정복하기 불가능해 보여도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이기에 분명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사명에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마음’과 ‘하나님께 충성’함과 ‘하나님을 신뢰’함이 45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대로 행하는 믿음이 있을 때,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어리석은 믿음의 삶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명에 충성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 믿음으로 행동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3~15절).
여호수아가 갈렙의 말을 듣고 그를 위해 축복하고 그의 요청대로 헤브론을 기업으로 삼게 합니다(13절).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14절)입니다. 갈렙은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던 아르바의 이름을 딴 옛 성읍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음으로써 비로소 그 땅에 전쟁이 그쳤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과감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행동이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행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열심히 선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에게 꿈으로 약속을 주셨던 하나님은 결국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았고, 믿음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의 약속하심의 복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하는 삶이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사명에 충성하며, 믿음으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뿐 아니라 갈렙과 같은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14:1~1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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