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특성상 한 달에 5대 정도 시승과 촬영을 한다. 얼추 계산해보면 지금까지 수 백대의 차를 타봤다. 엄청나게 크거나 작은 차, 빠른 차, 그리고 알뜰살뜰한 차 등 다양한 브랜드의 여러 장르 모델을 경험했다. 유일하게 한 번도 몰아보지 못한 차가 있다. 바로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카 브랜드 애스턴마틴이다. 애스턴마틴이라면 제임스 본드가 떠오르고 레고로 DB5를 만들어 본 게 전부다. 여하튼 이번 촬영을 계기로 처음으로 애스턴마틴 키를 손에 쥐었다. 궁금했다. 제임스 본드가 타는 차가. 게다가 내 생애 처음 타는 애스턴마틴이 애스턴마틴 최초의 SUV DBX다. 뭔가 진한 데이트가 될 것 같아 타기 전부터 설렌다. 두근대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겸 외관을 감상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디자인이다. 론칭쇼 당시 실물을 보고 두 번째로 보지만 화려한 조명이 감싸지 않아도 아름답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근사하다.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벤틀리 벤테이가나 람보르기니 우르스가 각을 살린 디자인이라면 DBX는 각을 모조리 부드럽게 다듬어 유려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다. 패널의 수를 최소화하고 잔 기교를 부리지 않아 콘셉트카처럼 보이는 것도 매력 중 하나다. 전면부는 DBS에서 가져온 것 같은 헤드램프와 애스턴마틴 시그니처 라디에이터 그릴로 미적지수를 올렸다. SUV면 얼굴이 무식하게 크고 둔탁하게 생겼다는 편견을 깨버린다. 주간주행등은 헤드램프에 포함시키지 않고 범퍼 가장자리로 내렸다.
DBX 외관에서 하이라이트는 옆모습이다. 보닛부터 해치 리드까지 이어지는 라인이 기가 막힌다. 최근 출시되는 SUV들 중에 간혹 모델명 ‘쿠페’를 붙이고 억지로 C필러 이후 모양이 어색한 경우가 있다. DBX는 SUV 쿠페라고 하진 않지만 이런 라인이야말로 진짜 쿠페다. 덧붙여 도어핸들은 숨겨놓고 캐릭터 라인도 없지만, 전혀 밋밋하지 않다. 한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디자인이 아니다. 전체를 감상하게 만드는 완성도 높은 그림이다. 프런트 오버행도 극단적으로 짧아 전투적인 자세를 연출하고 있다. 기하학적 형상의 휠은 22인치로 거대한 휠하우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타이어는 앞 285/40, 뒤 325/35다. 이 타이어 조합만 보더라도 DBX의 기본적인 섀시는 뉴트럴스티어에 가깝게 설계되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만약 스퀘어 세팅을 했다면 언더스티어의 정도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마음 놓고 편하게 타라는 애스턴마틴의 배려가 느껴지는 세팅이다.
자리를 옮겨 엉덩이를 만져본다. 리어 글라스를 한껏 눕혀놓고 밴티지처럼 하나로 이어진 테일램프가 눈에 들어온다. 클리어 램프인데 그레이 차체 색상과 잘 어우러진다. 어디선가 또 밴티지의 향이 난다. 밴티지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해치를 접어놨다. 이는 다운포스와 동시에 미적지수를 올려준다. 범퍼에 깔끔하게 매립된 머플러 커터는 제임스 본드가 적에게 쫓길 때 무기로 사용할 것처럼 생겼다. 여기에서 박력 터지는 배기 사운드가 뿜어져 나온다. 중저음 음색에 음량은 크지 않게 조율했다. 내가 더 어렸다면 사운드 볼륨이 더 컸으면 하고 아쉬워했겠지만, 이 정도가 세련된 것이다.
두툼한 도어를 열고 실내로 들어간다. 대칭형 레이아웃의 센터페시아가 안정감을 선사한다. 최고급 가죽으로 도배를 해놔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럽다. 선바이저와 천정에 달린 손잡이마저 정말 고급스럽다. 하물며 방향지시등 소리도 고급스럽다. 노크하는 것 같다. 묵직하면서 동글동글한 소리다. 이 소리를 설명하기 어려운데 유튜브에서 확인해보길 권한다. 모름지기 하이엔드 브랜드의 맛은 낯섦에 있다. DBX는 기어 레버 대신 버튼으로 드라이빙 레인지를 조절한다. 이 버튼 사이에 날개 배지가 그려진 엔진스타트 버튼도 멋스럽다. 스티어링 휠은 차체 사이즈와 장르에 비해 직경이 작다. 덕분에 스포츠카를 타고 있는 기분이 물씬 나며 큰 차를 모는 부담감을 주지 않는다. 페달은 플로어 타입이다. 독자들이 궁금하진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펜던트 타입보다 플로어 타입이 발도 편하고 보기에도 좋아 선호한다.
헤드레스트 일체형 시트는 컴포트와 스포츠성 모두를 아우른다. 사이드볼스터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코너에서 운전자를 잘 잡아준다. 쿠션감도 좋아 장거리 이동에도 몸이 피곤하지 않다. DBX는 휠베이스가 3m가 넘는다. 덕분에 2열 공간이 만족스럽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앉아도 레그룸이 여유롭다.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는 없지만 착석감이 좋다. 유려한 루프 라인 때문에 헤드룸을 걱정했는데 부족하지 않다. 트렁크 공간은 632ℓ를 제공해 거창한 취미생활을 영유할 수 있다. 또한 2열이 40:20:40으로 나눠 접을 수 있어 실용성이 높다.
이제 DBX와 본격적으로 놀아보자. 기다란 후드 아래 담긴 파워유닛은 V8 4.0ℓ 트윈 터보다. 최고출력 최대토크 71.4kgm의 힘을 생산하고 9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네 바퀴를 굴린다.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4.5초이며 최고시속은 291km에 달한다. 실제로 밟아보니 브로셔에 적힌 스펙에 거짓은 없다. 가속 페달의 명령에 스로틀이 재빨리 반응한다. 출력이 출력인지라 시원스레 나간다. 도로에서 이보다 강한 녀석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추월할 수 있는 괴력이다.
특정 속도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중저속 영역보다 고속에서 더 박차게 튀어 나간다. 아무래도 SUV인지라 실루엣을 유려하게 빚었다고 해도 차고가 높아 고속 저항이 심하다. 최고시속 300km 근처까지 가려면 후반에 기어비가 늘어지면 안 된다. 오히려 중저속에서 튀어 나가고 고속에서 맥이 빠지는 세팅보다는 이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전하기 훨씬 편하다. 변속기는 이 매콤한 엔진에 장단을 잘 맞춰준다. 토크컨버터지만 변속 속도가 빠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저속에서 울컥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는 S클래스에서도 이 울컥거림으로 운전자를 불편하게 만드는데 애스턴마틴은 로직만으로 이를 해결했다.
고속안정감이 환상적이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차체 무게중심이 노면에 깔린다. 덕분에 스티어링 휠에 손은 얹고 음악을 즐기며 평화로운 고속크루징이 가능하다. 신기한 것은 풍절음도 정말 잘 잡았다. 이는 꼼꼼한 방음과 윈드실드의 각도를 스포츠카 수준으로 잡아 놓은 혜택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보통의 SUV 설령 프리미엄 브랜드의 것이라 할지라도 시속 110km 이상에서의 바람 소리는 어쩔 수 없다. 대기업들도 놓치는 부분을 잘 챙겼다.
지상고가 높은 SUV지만 애스턴마틴 배지가 박힌 만큼 코너링 퍼포먼스가 기대가 된다. 최근 하체를 조율하는 실력들이 극에 달하면서 SUV도 꽤나 매콤한 실력을 보여준다. 애스턴마틴 역시 그러하다. 스티어링 기어비가 촘촘하고 피드백이 솔직하다. 덕분에 스티어링 휠을 이리저리 휘젓는 맛이 있다. 코너링 성향은 언더스티어다. 허나 그 농도가 진하지 않다. 진입만 서두르지 않으면 이상적인 라인을 만들 수 있다. 복합코너에서도 섀시가 엉키지 않는다. 한쪽으로 쏠린 중량을 반대쪽으로 넘기는 리듬이 자연스러워 미꾸라지처럼 잘도 탈출한다. 오랜 시간 동안 모터스포츠에서 쌓인 데이터를 DBX에 잘 녹였다.
잘 달리고 잘 도니 잘 서는 것만 남았다. 거대한 캘리퍼부터 믿음직스럽다. 제동성능은 출력과 섀시를 채찍질하기에 충분하다. 브레이크스티어나 노즈다이브를 잘 억제했고 고속에서 강한 제동이 연거푸 들어가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 페이드 혹은 베이퍼록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코너를 돌면서 브레이킹이 걸려도 차체가 안쪽으로 말리지 않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본디 영국차들이 브레이크 시스템을 오버 스펙으로 다는 전통(?)이 있는데 그 중심에 애스턴마틴이 있다.
달콤한 데이트는 끝났다. 애스턴마틴, 그리고 DBX는 기대 이상의 매력을 보여줬다. 조립 완성도에 있어서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독일차 수준이었다. 원래 영국차는 개성이 강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서는 허점이 많았는데 DBX는 운전자를 거슬리게 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 시승하는 내내 잡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SUV 장르에 걸맞은 실용성, 명품 브랜드가 준비한 탄탄한 기본기, 운전자랑 잘 놀아주기까지 한다. 운전실력이 비루해도 마음껏 달릴 수 있는 게 DBX다. 여기에 애스턴마틴 브랜드 밸류와 희소성이 더해져 비싸고 좋고 시선 몰이까지 가능한 SUV를 찾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 돈이면 다른 어떠한 것을 사겠다고 하는 이들은 애스턴마틴의 타깃이 아니다. DBX는 톰포드 슈트를 입고 오메가를 차고 애스턴마틴을 타는 상상이 현실로 이어지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SPECIFICATION _ ASTON MARTIN DBX
길이×너비×높이 5039×2220×1680mm | 휠베이스 3060mm
엔진형식 V8 터보, 가솔린 | 배기량 3982cc | 최고출력 550ps
최대토크 72.4kg·m | 변속기 9단 자동 | 구동방식 AWD
복합연비 - | 가격 2억48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