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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묻지 마세요
창세기 12: 1-9
○ 부름받은 아브람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행7:3, 히11:8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신11:30, 삿7:1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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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올라오는 새끼를 잘 키운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동물의 왕이 되는 겁니다. 퍽 거친 양육방식입니다. 하기야 그런 거친 방식이 아니면 동물의 왕이 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한 시련과 혹독한 훈련을 통해야만 왕의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되, 손으로 사랑하지 않고 발로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발로 내찬다는 겁니다. 이는 사자가 새끼를 양육하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발로 내차서 시련을 겪게 하시고, 그런 시련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손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손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 일부러 시련을 주신다는 겁니다. 혹독한 훈련을 시키시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은 모두 하나님의 차원 높은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발과 손으로 사랑하신다"가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이 양면성이 함께 있습니다. 손으로만 사랑한다면,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발로만 사랑한다면, 아마도 감당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과 손을 적절히 배합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발로 사랑하시는 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지금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당시는 기원전 18-17세기 무렵입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난다는 것은, 그리고 속해 있는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주 "떠돌이, 나그네, 이방인을 보호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들이 바로 자신이 속한 고향 공동체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대단히 위험한 지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위험한 길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대단히 혹독한 명령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람이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떠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아브람은 몹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를 원(전)역사라고 말합니다. 원(전)역사란 역사 이전의 시대라는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12장부터를 실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12장부터는 사실적 역사인 것입니다. 물론 사실적 역사라 하더라도, 성경이 역사책이 아닌 만큼, 엄격한 사실의 역사는 아닙니다.
성서기자의 신앙고백이 섞여진 이야기들입니다. 성서기자의 편집을 거쳐 나온 내용입니다. 하지만 11장까지의 원(전)역사에 비해 보면 대체로 실제로 있었던 일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신화적(설화적) 이야기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그런대로 사실적 역사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사실적인 역사는 바로 "떠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남에서 성경의 은혜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시사해 줍니다. 곧 은혜의 출발은 떠남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떠남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으로부터 떠난다는 말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과거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관계, 습관, 가치관, 기억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기존의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과거의 관계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예컨대 결혼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성경은 결혼에 대하여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2:2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결혼이란 신랑과 신부가 부모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떠나지 못한 결혼 생활이 많이 있습니다. 고부간 갈등의 상당 부분은 남자가 자기 어머니로부터 떠나지 못하여 생겨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고부간 갈등의 근본 뿌리가 시어머니와 갈등을 갖는 며느리보다는, 그 남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자기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곧 떠나지 못한 남자는 자기 어머니와 아내, 두 여자를 데리고 사는 꼴인 것입니다. 이 삼각관계에서 고부간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며느리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떠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떠나지 못한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하고서도 여전히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여 사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떠나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결혼을 하고서도 옛 애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옛 애인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관계로부터 떠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둘째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현재 자신의 습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굳어진 습관으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습관입니다. 음식을 맵게 먹는 것도 습관입니다. 우리가 한국말을 하는 것도 습관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두려움도 습관입니다. 악업을 짓는 습관이 있다면, 선업을 짓는 습관으로 바꿔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습관이 바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과거의 가치관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과거의 가치관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좋았지만, 더 이상은 좋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떠나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패라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는 사물이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과거의 가치관으로부터 떠나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패라다임의 전환을 이룬 사람이 21세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라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지만, 하지만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여 고심을 하고 있습니다.
패라다임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는 아픔에 친해져야 합니다. 낯선 것들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모험심이 필요합니다. 모험심은 용기입니다. 용기의 수준은 성취의 수준과 비례합니다. "지금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게 편한 가치관이 만약 틀린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화두처럼 붙들고, 순간순간을 맞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바로 진정으로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된 제자에게 스승은 나타납니다. 이런 자세에서 창의성이 나올 것이고, 그리하여 패라다임의 전환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상을 필요로 합니다.
새로운 인간은 영성가이고 시인인 동시에 과학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협소한 시각을 통해 세상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늘 예민하게 느낍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성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을 노래하고 온몸으로 춤추며 축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인입니다. 또한 그는 과학자가 될 것입니다. 그는 과학적 방법론까지 동원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탐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영성가이고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때, 그는 전체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성한 인간이 됩니다.
옛 인간은 부정의 가치관을 갖고 있고, 새로운 인간은 긍정의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다. 옛 인간은 상대방의 부
족한 점에 대해 가차없이 부정의 에너지를 퍼붓습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눈을 감습니다. 곧 부정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간은 상대방의 부족한 점에 대해 이해의 차원에서 긍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합니다. 곧 긍정합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상대방이 하나임을 긍정합니다. 고통받는 이웃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봅니다. 그리고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을 봅니다. 그리하여 본래의 자신과 고통당하는 이웃의 모습을 가진 자신, 그리고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의 모습을 가진 자신, 이렇게 자신이 셋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봅니다. 이 셋이 하나임을 이해하고, 긍정합니다. 그 긍정에서 신성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기운을 내<97><9F>습니다.
또한 그는 특별히 자연친화적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무, 풀, 바람, 시냇물, 구름, 달, 별, 장미꽃 등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것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것입니다. 마침내 자연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다만 하나가 존재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성적 감수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 안에 있는 여성적 감수성과 깊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여성적 감수성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현상에 대해 따뜻하고 섬세하게 감응할 것입니다. 과거의 가치관에서 새로운 생명의 가치관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넷째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많은 사건을 경험했고, 그로 말미암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나쁜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기억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 기억을 갖고 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불행은 바로 복수하려는 마음입니다. 복수의 전형적인 인물로 연산군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자신의 생모를 죽였다는 생각으로, 인수대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합니다. 그 복수에 집착하여 국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광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결국 자신마저도 왕에서 쫓겨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산군은 대단히 똑똑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복수에 집착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면, 곧 과거로부터 떠났다면 그은 아주 현명한 임금이 되었을 겁니다. 복수는 과거의 반영이고 용서는 현재의 반영인 것입니다.
여러분 미움은 과거의 반영이고 사랑은 현재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 기억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의식입니다. 죄의식은 인간을 몹시 상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그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상 우리는 네 가지 차원에서 과거로부터 떠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떠나라"라는 명령은 거친 광야로 내모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과거로부터 떠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익숙한 것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함은 그를 불행으로 인도합니다. 과거의 관계, 습관, 가치관, 기억 등 모든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에는 모험심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불편함과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끝내는 행복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따라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가혹해 보이는 명령은, 사실은 가장 큰 은총인 것입니다. 진정한 희망인 것입니다.
누구나 아프고 쓰라린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과거로부터 온전히 떠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삶이 시작됩니다. 몸은 현재를 살면서도 마음은 과거를 사는 사람, 그런 부정합의 삶에 성장과 행복이 깃들리 만무합니다. 이는 소돔성을 떠나는 롯이,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고 마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 그 사람과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그를 용서하시고, 그를 사랑하는 존재로 성장시켜 주시고, 그를 새로운 인간으로 바꿔주십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떠나야 함과 더불어 상대방의 과거로부터도 떠나야 합니다.
곧 상대방의 어두운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의 현재로 만나지 않고, 그의 과거로 그를 대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관계가 비극이 되는 것은 대부분 서로 과거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회도 과거로 만나는 관계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전과를 영원히 기억하는 겁니다. 전과를 가진 사람에게 과거를 묻지 않는 것 이상의 복음은 없을 것입니다. 전과를 묻지 않고 현재의 그를 믿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과거를 묻지 말아달라고 애타게 호소하는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떠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바로 그런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떠나라"는 말씀은 최고의 희망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구약성경 사실적 역사는 그런 희망과 복음의 메시지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가야할 때가 어느 때인가 분명히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 아름다움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저자| 노창식 목사(신명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