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8
9월22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경축이동)/연중 제2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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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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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F7DVdO5eu4
[서울대교구 김준호 하드리아노(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담담) 신부님 집전]
**[순교자 성월 특강]**
서울대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새남터 순교 성지)
<일상의 순교는 성실한 한 명의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https://youtu.be/9XVnNEft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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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 줍시다!>
젊은 수도자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초단기간에 세상의 물을 쫙 빼고 멋진 수도자로 탈바꿈시키려는 욕심에 도에 지나친 요구도 참 많이 했습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저도 제대로 실천 못하면서 형제들을 몰아붙이던 기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안에는 어떻게든 형제들의 초보 수도 생활을 일취월장시키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구도 많았고 기대치도 높았습니다. 그 결과 갈등도 많았고 실망도 컸습니다.
12사도를 당신의 최측근 협력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 한명 한명을 두고 따져보니 한 마디로 오합지졸, 당나라 군사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가방끈도 짧았고, 뭔가 내세울 것도 마땅히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을뿐 아니라 묻는 것조차도 두려워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들이었지만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으로 가득했고, 예수님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한 자리 차지하고픈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단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길에서 한바탕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분노에 앞서 큰 서글픔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높아지지 말고 낮아져라, 커지지 말고 작아져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섬겨라, 그렇게 목청껏 외쳤건만, 아직도 서열 싸움을 하고 있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아무리 말로 교육을 시키려 해도 안되니, 특별한 교육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살암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어쩌면 오늘 우리도 그 옛날 극도로 미성숙했던 제자들, 틈만 나면 내가 높으니, 네가 높으니, 서열 싸움을 하는 제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너를 존중하고 인정해주면 좋으련만, 수시로 나와 그를 비교하고, 어떻게든 상대의 위에 서려고 발버둥 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은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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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_45bcTLg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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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과연 행복한 선택인가?>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으려는 마음을 갖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즘 순교는 조금 남의 이야기이고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지만, 사실 사람은 어떤 것이 ‘행복’으로 보여야 선택합니다. 자살까지도 이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의 길로 가려면 순교가 참으로 행복으로 보여야 합니다.
만약 죽을 때도 후회가 없다면 그 삶은 행복일 것입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쓴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직전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중에 공통된 다섯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
둘째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입니다. 대부분 남성 환자들이 이러한 후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직장 생활 때문에 아내, 자녀들과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셋째는 `감정 표현에 솔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타인들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긴 것이 어쩌면 지금의 `병`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넷째는 `옛 친구들의 소중함`입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오랜 친구들이 보고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절망스러웠다고 합니다.
마지막은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많은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순교자의 삶을 이 다섯 가지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초에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한 광암 이벽 성조를 봅시다. 그는 정약용이 친구로서 인정할 정도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 연구를 통해 천주교가 진리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일하는 것보다 진리에 더 심취했습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찾았습니다. 이승훈을 중국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은 스승인 권일신, 권철신까지 설득하여 박해받는 상황에도 천주교 신자를 늘렸습니다.
아버지가 문중의 꾸중을 받고 오자 아버지는 이벽을 집에 가둡니다. 그리고 배교하라고 강요합니다. 이벽은 솔직히 자기감정을 털어놓고 집에 갇혀 죽습니다. 아버지에게 독살을 당한 것으려 여겨집니다.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을까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유배나 순교의 길을 가야만 했지만,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외에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수많은 목숨을 함께할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의 행복도 아닌 자기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길을 갔기 때문에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75년간 하버드에서 연구한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관계’였습니다. 주위에 생명의 은인이 많이 모이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을 자신이 사는 언덕으로 올라오게 하려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면 그 사람은 집을 잃었어도 사람을 얻었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 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거저 치료해주었지만, 가난한 그 환자들이 자신에게는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맞아준 철거민들과 학생들은 그분을 생명의 은인처럼 좋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나 마더 데레사 주위의 많은 이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모읍니다.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하는 수많은 사람을.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행복의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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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본당의 날’입니다. 본당의 날을 지내면서 4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당연히 친교를 나누어야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본당의 날에 잔치를 벌였습니다. 맛있는 점심이 준비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었습니다. ‘족구, 피클 볼, 포인트 게임, 길거리 노래방, 찬양 팀 공연, 경품추첨’이 있습니다. 모두들 잔치에 참여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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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사람의 아들이 잡혀 넘어갈 것이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도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신비를 계속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문제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여 스승의 수난을 거부했던 것처럼 오늘도 제자들은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듣고 같은 태도를 보인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2) 오늘 복음을 보면 수난 예고를 듣고도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다른 군중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 여정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 길은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넘어가다, paradidotai”라는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께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암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승리가 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이렇게 승리의 빛이 비치고 있지만, 사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32절) 메시아의 고통은 그들에게 터무니없고 부활의 영광도 체험해 보지도 않았고 상상도 안 되는 엄청난 사건이다.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32절)
복음은 메시아의 수난 앞에 두려움에 싸여 있는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지를 다투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길과 인간의 길이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버리기까지 스스로 낮추시는 데 반해, 사도들은 걸레 조각 같은 명예 다툼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흔히 일어날 수 있다. 만일에 그렇다면 교회의 참모습은 상실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이것은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 공동체나 교회 안에도 다른 형제들을 보살펴줄 첫째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다만, 첫 자리의 의미와 권위의 의미를 뒤집어놓으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보다 낫다고 여겨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첫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왕권을 획득하셨다. 참된 권위라는 것은 봉사와 사랑에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명심으로 가득 찬 적대감이나 천박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교회는 고사하고 그 어떤 인간 공동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 그들 가운데 세운 뒤 그를 안으시며 그들의 본보기로 제시해 주신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첫째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같이 ‘꼴찌’가 되는 것이 당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과 동일시했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사도들이 예수님의 참된 증표가 되려면 어린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꼴찌가 되어야 하고 그때 첫째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어린아이는 무한한 가치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 신비롭게 현존하신다. 즉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 등 그들 가운데 항상 현존하신다.(참조: 마태 25,31-46) 바로 그들의 품위와 가치를 존중해주시고 그들의 나약함을 감싸주시기 위해 그들 가운데 계시다. 그래서 그 어린이들이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 사랑의 성사라고 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어린아이의 미소와 사랑스러움과 같은 단순한 사실들의 가치를 발견한다면 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야고 3,17)는 겸손되이 항구히 원함으로써만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지혜가 우리 마음에 올 때 “평화로운”(야고 3,17) 그 지혜는 우리와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의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윗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이 인간의 마음과 사회에 야기하는 부패의 면모를 이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함을 느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 가르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표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봉사를 통한 세상의 변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변화이며 기적을 이루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봉사와 사랑(꼴찌)을 통하여 진정한 권위(첫째)를 드러낼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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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제자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은 자주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모이면 이런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으면,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두고 다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평화롭고 관대한 자비와도 거리가 멀고, 평화 속에 심어진 의로움의 열매도 아닙니다.(3,17-18 참조) 싸움과 다툼, 분쟁은 욕심 때문에 일어납니다. 시기는 살인까지 불러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바라는 바를 얻지도 못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논쟁하였을 때, 그들은 위에서 오는 지혜에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일으키는 욕정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는 그림들에서 어린이들이 매우 예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입니다. 나이가 어린 어린이만이 아니라, 제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무능력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서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박해자들 앞에서 모욕과 고통을 견디는 인내입니다. 박해자들을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죽임까지 당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 여기에서 그가 예수님의 제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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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ㄴ-26)
1) 신앙생활은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동시에 그 믿음을 생활로(온 삶으로)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신앙을 증언하는 생활”입니다.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교는 신앙의 완성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완성이기도 하고, 증언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인이 아니고, 믿음이 없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사랑’은 믿음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희망’은 믿음의 방향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고, 희망도 없습니다.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가 믿음을 뒤로 밀어내는 이가 있는데, 신앙인의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과 희망’이 없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결코 순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믿음 없이 사랑만으로 죽는 일이 더러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그 죽음을 고귀한 희생이라고 부르더라도, 우리 교회가 말하는 순교는 아닙니다.
그런데 순교는 신앙인이 신앙을 증언하는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지만, 순교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고, 순교는 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계속하라는 뜻입니다.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박해자들이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도 죽기를 자청하는 것은 순교가 아니라 자살입니다. 사실 순교는 인간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은총이며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에 순교한 분들도 많지만,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 속 같은 곳으로 가서 교우촌을 만들고, 신앙생활을 계속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을 아까워하지 말고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인데,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사람마다 그 성격과 내용과 크기가 다릅니다. 박해와 순교가 십자가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육신의 목숨에만 집착하는 사람”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입니다. “나 때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는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만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면, ‘온 세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누구든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은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때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주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항상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전에,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잃은 양’ 하나를 찾기 위해서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주님을 버리고 떠난 양은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이고, 그가 받게 되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주님의 사랑’만 믿고 방심하고 자만하는 것은, 그 사랑을 배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더욱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언제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항상 ‘지금’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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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혁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매일 김범우 순교자 묘역을 드나들면서, 새삼스레 순교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고, 심지어는 목숨조차 바쳤을까 생각해 봅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타니아의 “라자로에게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마스 사도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하게 대답합니다.
과거 서구에서는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도 죽으러 갑시다.” 하면서 앞 다투어 선교지로 갔다고 합니다. 순교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고 탄압하는 자들 때문이지 죽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순교)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려면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순교의 정신일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순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폭력 앞에서 우리 신앙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돈독하지 않은 교우님들이 많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님들이 그러한 우리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죄송스런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바라는 것이 있어서입니까? 하느님이 목적입니까, 세상의 재물이 목적입니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의심쟁이로만 알려진 토마스 사도의 비장한 결기가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 비록 비루한 신앙인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말씀을 떳떳하게 여겨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멸시, 고통과 희생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가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숙명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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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고봉연 요셉 신부님]
<피, 땀, 눈물로 봉헌된 한국천주교회>
이벽 성지에는 이벽께서 감금되어 순교하신 집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출입문은 큰 자물쇠로 잠겨 있는데, 자물쇠를 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배교입니다. 신앙을 버리면 즉시 문이 열리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죽음입니다. 신앙을 고수하면 그 안에서 죽고, 그제야 문이 열립니다. ‘나’ 라면 집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100년 동안 4번의 박해를 일으켜 천주교회를 말살하려 하였고,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자들은 육신의 살고 죽는 문제보다 하느님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살아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느님을 위해 죽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 살았습니다.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그의 백서(1801)에서 致命之血, 爲斯敎之種(치명지혈, 위사교지종)이라고 말합니다. ‘순교의 피는 이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 선조들의 유혈 무혈의 순교로 한국교회는 탄생하였고, 성장하였습니다.
“교회라는 나무는 수고의 땀, 기도의 눈물 그리고 순교의 피라는 세 가지 수액을 먹고 자란다.”고 하신 교부 떼르툴리아누스의 말씀처럼, 한국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 땀, 눈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교회는 삶으로 증거하는 피와 땀과 눈물을 필요로 합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고닦는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순교자들이 귀하게 여긴 것은 신앙과 하느님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바친 피, 땀, 눈물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럼, 오늘을 사는 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바칠 수 있습니까? 순교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가운데 나의 피와 땀과 눈물로 내가 변화하고, 교회가 성장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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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백광현 세례자 요한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신앙 선조를 둔 행복한 민족입니다. 선조의 신앙은 피의 증거로 꽃을 피웠고, 우리는 선조의 모범을 통하여 오늘의 삶 안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조가 있다 해도 그 후손이 선조가 증거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오히려 선조에게 누를 끼치게 되며, 세상으로부터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아 가신 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순교자의 성지를 찾아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합니다.
대전교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인 솔뫼를 비롯하여 27곳의 성지와 순례지가 성역화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풍요로운 순교자의 교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지에서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을 묵상하다 보면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이도 성별도 능력도 서로 다른 하느님 백성이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셨고, 인류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전해지는 사랑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와 순교자가 짊어진 십자가도 사랑의 십자가였고,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도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기적인 입신양명을 위한 고단한 삶의 짐이 아닌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성인들을 기억하며 순교성지와 순례지를 경건하게 방문하고 선조의 삶을 본받아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가 새로운 성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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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여름은 정말로 더웠습니다. 수도권에만 38일간의 열대야가 있었고, 열대야가 끝났어도 낮 더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9월의 중순도 넘어가면서 좀 살 만합니다. 이렇게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 하면 겨울나무가 떠올려집니다. 봄의 화사한 꽃도, 여름의 싱싱하게 푸르던 잎도, 가을의 풍성한 열매도 다 떨어뜨리고 마치 죽은 것처럼 딱딱한 가지만 남아있습니다. 사실 아주 현명한 모습입니다. 푸르른 나뭇잎을 겨울까지도 가지고 있으면 혹독한 추위에 가지고 있는 많은 물기가 얼어서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나무 전체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나무는 가을이 되고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 잎사귀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 버립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아서 나뭇잎은 마르고 땅에 떨어집니다.
버리는 길이 바로 자기 살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지만 버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돈, 명예, 지위…. 그 밖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바로 집착 때문입니다.
자기 삶에서 무엇을 첫 번째 자리에 두어야 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입니다. 과연 무엇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제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무엇을 가져가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수난과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세상의 칼날에 쓰러질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판단하고 있어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까지 합니다. 그들은 모두 첫째가 중요했고, 가장 높은 자리가 중요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보는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며, 어린이 하나를 세우시고 그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즉, 집착을 내려놓고 겸손하고 낮은 이,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큰 것을 차지하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까지 짊어지는 용기와 자기 비움, 그리고 작아짐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진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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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오신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생각하는 가운데 모두를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바실리오 성인은“여러분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랑과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겸손의 의미를 잘 가르쳐 줍니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이 참된 겸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순하고 얌전한 사람의 모습이 겸손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성공을 기뻐하되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내가 너보다 더 낫다’, ‘내가 너보다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자다’ 하는 생각을 다스립니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알아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아직 겸손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정받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 하였느냐?” 물으셨고,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은 아주 가슴 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를 하셨는데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전혀 엉뚱한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생각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다볼산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기억하며 극복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수난과 죽음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높은 자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베드로일까? 안드레아, 아니면? 요한...줄 끊어질까 조바심을 갖는 것은 요즘도 여전합니다. 사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다 큰 사람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큰 사람은 품이 큰 사람이요,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부들도 인사 철이 되면 누가 어느 본당으로 가나?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자리가 어디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열두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고 말씀하셨는데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지고 그의 행복과 완성을 위하여 나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압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이 잘되어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분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참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공했다는 것은 그 재물을 어떻게 잘 썼느냐가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며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끌려다니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우리의 모습이 빛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세우시고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여라!’ 하신 이유는 어린이의 단순함과 순진무구, 천진난만한 모습을 받아들여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린이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에 의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선 인간은 하느님께 온전히 낮추어 의탁하는 존재, 하느님의 사랑과 도움에 힘입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또 하나, 당시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는 미성숙한 존재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껴안으며 말씀하신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소외되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그분을 힘입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큰 꾸중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1). 남의 험담을 하는 사람 2). 험담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3).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을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듣고 있는 사람만이 악한 말을 멈출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이미 나쁘게 말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만이 대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매맞을 사람이 있는데 맞아도 많이 맞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의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혹 듣게 되면 흐름을 바꾸십시오. 바꾸지 못하면 응분의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이는데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그는 하느님 눈앞에서 죽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말을 싸움 붙이고 욕을 보이고 남들의 사생활에 수군거리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목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결국 자신도 그의 먹이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를 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면 결국에는 자신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힐 수 있고 그의 명예는 회복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듣는 것은 험담하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남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며 자기 자랑을 하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시기와 질투, 이기심을 멀리하여 겸손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랑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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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님과 함께>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내님과 함께>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뒤서려고
날마다
낮춥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따르려고
날마다
걷습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닮으려고
날마다
비웁니다
아직 모를
마지막 날까지
내님
살리려고
날마다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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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들 혹은 영원한 그것>
+찬미예수님
학교에서 윤리 과목들을 가르치다 보면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목의 특성상 윤리적인 문제들에서 비롯되는 사건 사고들을 다뤄야 하는데, 결국 인간의 악한 성향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들을 마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죽음, 돈과 명예를 쫒는 현실, 육체적인 것에 대한 욕망. 그로인해 희생되는 피해자들을 수업시간에 다루노라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 인간이 보편적으로 갈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요약하자면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구나 되도록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재물을 원합니다. 그 다음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에 대한 욕심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원하고 내 뜻에 맞춰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명예와 사랑 또한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고 싶고 좋은 평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저 또한 이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신자분들과 학생들에게 인기 있고 싶고, 괜찮은 신부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이 모두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겨지기에 일정한 목표에 다다르면 인간은 더욱 더 커다란 목표를 설정하게 됩니다. 또한 혹시라도 이것이 사라질까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 더욱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으로 인해 질투와 미움, 열등감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처럼 어리석은 인간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러한 묵상을 하게 되면, “그렇다면 무엇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 최종 목표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첫 번째, 그 목표가 재물과 같이 변화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권력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번째, 명예 혹은 사랑과 같이 타인의 주관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결국, 변화하지 않는 가치로써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할 이것은 한가지로 귀결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모여있는 이유인 “하느님”입니다. 이 하느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충만하게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 가치와 존재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빼앗길 위험도 없고 다른 이의 주관과 나에 대한 평판으로 인해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다른 민족의 선교가 아닌 자생적으로 교리를 받아들여 탄생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과 희생으로 발전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하느님을 위해 재물, 권력, 명예, 사랑과 같은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했으며 생명을 바쳐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이러한 행동에는 어떠한 세속적인 욕심도 존재하지 않았고 하느님 외에 다른 목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라고 해서 어찌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러한 순교자들의 생애를 상기하노라면 오늘 제 2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가 매우 의미있게 들립니다.“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그렇다면 이들이 순교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바로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즉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질투, 원망, 미움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으며 그저 진리와 사랑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수많은 유혹과 위협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신앙으로 인한 순교의 위험이 없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지도 않고 물리적인 손해를 받지도 않는 시대임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록 핍박은 없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을 위협하는 것들은 많습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물질의 유혹, 바쁜 일상, 봉사를 할 때 느껴지는 손실감, 성당에 나오는 것에 대한 귀찮음과 게으름. 이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또 다른 모습의 유혹이며 박해입니다. 이 밖에도 점점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이 시대는 신앙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비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들은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증거 하고자 애써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충만한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이 이러한 우리가 얻게 될 결과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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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첫째의 삶>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시편54,6)
오늘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 생명을 떠받쳐주시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을 기억하고 신망애(信望愛) 삶을, 진선미(眞善美) 삶을 두터이 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은총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너무 잊고 지낸 생명의 주님입니다.
어제 위에서 오는 지혜를 갈망하여 피정자들과 파견미사후 퇴장성가 부르기전 일어나 함께 부른 만세칠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좋은 추억을 선물하고자 강론에 이어 실제 일어나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양손을 활짝 펴들고 만세칠창을 바쳤습니다. 피정자들도 이런 체험은 처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우리 가정 만세!”
함께 부르는 만세칠창 기도 얼마나 좋은지요! 두발로 서서 눈들어 하늘 보고 기도하라고 직립인간(直立人間)입니다. 순교자성월 9월, 묵주기도성월 10월, 위령성월 11월, 가을철은 정말 기도의 계절입니다. 우리 생명을 떠받쳐 주는 주님께 기도할 때 활력넘치는 충만한 삶이요, 위에서부터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는 수제자 베드로가 격렬하게 반응했고, 오늘 복음에서 두 번째 예고 때는 철부지 제자들은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승이자 주님께 공감하는 분위기가 전무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신, 생명과 진리의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길은 걸을 때 마다 상기해야 할 사실은 길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의 현자 무위당 장일순과 목사 이현주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목사인 자기에게 왜 도인이라 써주었는지 묻자 장일순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허, 자네는 길 가는 사람이 아니신가? 길 도(道)에 사람 인(人), 그러면 그게 길 가는 사람이지, 사람이 길을 간다는 건 길을 닦는 거라.”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길이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길 가는 사람’ 도인(道人)이자 길을 닦는 수도자(修道者)들임을 깨닫습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말마디가 도(道)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 중국한자 성경은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인이 보내준 삶의 지혜도 길 가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된다 싶어 나눕니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을 위해, 소식(小食)에 고기를 먹기, 뭘하든 계속하기, 햇빛 쬐기, 눕지 말고 움직이기, 일부러 외출하기, SNS를 즐기기, 지인과 대화하기, 느슨한 운동을 습관화하기”
이보다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기, 적절한 걷기 운동”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에 필시 이런 삶의 지혜도 적절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차마 부끄러워 대답을 못합니다. 주님은 이들의 속내를 환히 아시고 위에서 오는 지혜의 절정을 가르쳐 주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이야 말로 이런 지혜를 체현(體現)하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역설적 영적 진리의, 겸손의 최고봉이자 천상 지혜의 결정체같은 말씀입니다. 이런 첫째의 삶은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런 첫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공동체의 첫째 원리입니다. 모두가 “커지기 경쟁”이 아니라 모든 이의 “꼴찌 되기, 작아지기의 경쟁, 모든 이의 종이 되기 경쟁”이라면 상상만해도 너무 흐뭇한 '복음적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지체없이 택한 오늘 강론 제목, “첫째의 삶-모든 이의 꼴지, 모든 이의 종”입니다. 영어 말마디 역시 은혜롭게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부터 또 하나의 평생 좌우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Last of all, Servant of all(모두의 꼴찌, 모두의 종)”
얼마나 멋집니까! 이러면 다투거나 싸울 일이 없습니다.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삼 우리의 파스카 영성은 어원도 같은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어 어린이를 껴안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참 감동적입니다. 제가 간혹 면담성사시 감동하여 형제자매를 안아들일 때도 이런 심정입니다. 예수님 제자 공동체는 물론 교회 공동체의 두 번째 원리로 이 또한 ‘위에서의 지혜’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 건강하고 건전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어린이 환대가 예수님 환대요 하느님 환대라는 놀라운 신비를 보여줍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무엇입니까?
어린이는 물론 모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약자, 병자, 죄인, 난민, 노인들, 변두리 소외된 사람들...끝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들을 환대함이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일이요, 이런 이들을 받아들여 모든 이의 꼴지로, 모든 이의 종으로 사는 자가 참 영성가이자 신비가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가한 박해와 시련중에도 이런 위에서의 지혜와 하나된 이들의 내공은 놀랍고 주님 친히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녕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바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파스카 과정을 통해 입증된 영적승리자, 하늘 지혜의 화신 예수님입니다. 우리 영적전쟁의 상황은 흡사 온유와 겸손, 인내력, 분별력의 시험장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한 “지혜의 도(道)”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내적 일치가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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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
<순교자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9,23-26)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9,23ㄴ)고 하십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바쳐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103위 순교 성인들을 경축 이동하여 기억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된 분들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 중에는 '남자가 56명 여자가 47명'입니다. '주교가 3명이고 사제가 8명'입니다. 가장 연장자는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모친이신 '유소사 체칠리아(79세)'이고, 가장 어린 성인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이들인 '유대철 베드로(14세)'입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큰 믿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신 분들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고한 희망 때문에' 모든 역경과 박해와 칼을 이겨내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손 안에서 영원한 기쁨 속에 있는 분들입니다.
자랑스런 순교자들이요, 우리 신앙의 선조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앙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 위에 서 있는 신앙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103위 순교 성인께 감사드립시다!
불편함과 고통과 시련 앞에서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나약한 믿음을 반성합시다! 모든 것을 이겨내면서 예수님(복음)을 따라가는 순교자가 됩시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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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사람냄새 나는
꼴찌가 더욱
그립습니다.
우리 안에 살고있는
첫째와 꼴찌의
어쩔 수 없는
모습입니다.
꼴찌가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영원한 첫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첫째도 언젠가는
끝이 있고
꼴찌도 언젠가는
끝이 있습니다.
모두가 첫째가
되려하기에 삶이
복잡한 것입니다.
단순한 삶은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꼴찌의 삶입니다.
꼴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존중과
감사로 다가옵니다.
꼴찌가 첫째를
끌어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은 대개
꼴찌였습니다.
꼴찌를
채워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사랑은 섬기는
꼴찌에게 있습니다.
꼴찌는 오늘도
십자가를 지고
자신이 있어야 할
삶의 자리에서
꼴찌의 향기를
나눕니다.
우리의 길을
꼴찌에게서 찾는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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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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