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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인에 감사계획 PT받고 재무제표 대리작성 요구
회계업계 "감사인지정제 전면 도입해 '갑질' 막아야"
우리나라 회계시장에선 해마다 주총시즌이면 기업들의 코미디 같은 '갑질'이 유행한다.
기업의 회계처리가 적정한지 감사해야 할 회계법인이 기업의 입맛에 맞게 감사활동을 하겠다고 줄을 서서 PT(프레젠테이션)를 하는 어색한 풍경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회계감사를 성실하게 진행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은 적이 없는 회계법인은 이같은 PT때면 기업 앞에서 죄인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기업의 분식회계를 눈감아 주는데 '총대'를 대신 멘 적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외부감사인에 대한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갑질'의 폐단이다. 그러니 기업의 회계투명성과 외부감사인의 독립성은 멀어져만 가고 있다.
기업의 '갑질'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재무제표 대리작성 요구와 감사보수 삭감은 단골 메뉴이다. 최근에는 감사인 선임과 관련해 회계법인 대표가 PT에서 직접 참석했는지 여부도 주요한 선정기준이 될 정도이다. 회계법인 대표가 기업에 '눈도장'을 찍는 일도 회계감사업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된 셈이다.
□ 외부감사인 선임 과정부터 기업 횡포 극심
피감기업의 재무 담당 임원이 기업 회계처리의 적정성을 짚어야 하는 회계법인으로부터 어떻게 회계감사를 진행할 것인지 사전에 보고받는 것은 오랜 관행이 됐다.
대기업의 감사인 선임 PT에 참석한 적이 있는 회계법인 관계자는 "회계감사를 철두철미하게 한다고 해야 할지, 기업 입맛대로 건성건성 감사를 진행하고 적정 의견을 내주겠다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하소연했다. 시험을 봐야 할 수험생에게 시험 출제자가 문제를 보고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또 회계감사와 관련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외부감사 입찰 때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형회계법인의 고위 임원은 "회계감사 입찰에서 외부감사와 관련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재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랑이 아니다"며 "오히려 꼼꼼하고 철저하게 감사를 벌였다는 증거가 돼 입찰에서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외부감사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에 우려감을 나타냈다.
□ 재무제표 대리작성 요구 여전…"감독 의지없는 당국이 문제"
회계업계 관계자들은 기업들이 자신의 재무상태를 외부감사인이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감사인이 요청하는 자료를 제공하지 않거나 시간을 질질 끌어 제대로 감사를 벌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러한 기업의 태도는 감사품질을 떨어뜨리고 재무정보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훼손하기 때문에 회계투명성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기업이 외부감사인에게 재무제표를 대신 작성하도록 요구하는 관행도 여전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외부감사인의 재무제표 대리작성을 금지한 외감법 개정안 시행령이 지난해 6월부터 적용됐다. 또 한국공인회계사회는 11월 재무제표 대리작성 신고센터를 개설했다.
회계감사는 물론 주총도 마무리된 시점이어서 재무제표 대리작성을 요구한 기업에 대한 신고가 있을 법 했지만 한 건의 신고도 들어오지 않았다. 재무제표 대리작성이 근절된 것일까. 아니다. 외부감사인과 기업 간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에 회계사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공인회계사는 "재무 관련 인력을 충원해 자체적으로 재무제표를 작성을 하거나 외부에 용역을 맡기는 기업들이 늘어나 재무제표 대리작성 관행이 줄기는 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기업들의 요구가 거센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외감법이 개정되면서 재무제표 대리작성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당국의 안일한 태도 때문에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회계법인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기업의 재무제표 대리작성 요구를 적발하려면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사가 내부고발을 해야 가능한데 기업과 감사인 사이의 먹이사슬 속에서는 일감을 잃을 수도 있어 고발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만 만들어놓고 관리·감독의지가 없는 당국이 문제"라면서 "강도 높은 제재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재무제표 대리작성 관행이 근절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 안착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실제 감사를 벌이는 회계사들은 당국이 나서 실태를 확인하고 제재를 강화한다면 대리작성 관행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제 값 받지 못하는 회계감사…회계불투명성 심화
회계업계에선 케케묵은 논란이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기업의 '갑질'이 있다. 기업들이 값싼 감사보수를 제시하는 회계법인들을 '줄 세우기'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업무를 수임해야 하는 외부감사인들로서는 기업의 입맛을 맞출 수밖에 없다. 갑을관계에 놓은 회계법인들은 기업의 감사보수 인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감사인 선정의 척도가 감사보수이기 때문에 감사품질이 높더라도 비싼 감사보수를 제시한 회계법인은 입찰에서 탈락하게 된다. 간신히 선정되더라도 경쟁 회계법인이 제시한 가장 싼 감사보수에 맞춰 깎인 감사보수를 제시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감사보수는 수년째 같거나 오히려 줄었다. 국내 10대 그룹의 주력 계열사 가운데 삼성전자를 제외한 다른 기업들은 시간당 감사보수가 정체됐거나 감소했다.
현대자동차의 시간당 감사보수는 2003년 12만 3000원에서 2013년 9만 4000원으로 줄었다. SK텔레콤과 포스코, GS칼텍스도 10년 사이 감사보수가 떨어졌다. 롯데쇼핑과 한화케미칼은 2000년대 초반 10만원이 넘었던 시간당 감사보수가 2013년에는 5만원대로 떨어지는 등 반토막이 났다.
2009년 시간당 감사보수가 9만원에 달했던 대한항공은 몇 번의 감사인 교체를 거친 결과 2013년에는 5만원대로 하락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회계감사 입찰에서 감사품질은 뒷전이 된 지 오래"라며 "기업들은 감사보수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일부러 회계법인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우리 기업들의 회계투명성은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과 세계경제포럼(WEF)는 지난해 우리니라 회계투명성을 각각 60개 국가 중 59위, 144개 국 중 84위로 평가했다. 거의 꼴찌 수준이다. 2013년에도 IMD와 WEF는 우리나라를 각각 58위와 91위로 평가했다.
□ 기업의 '갑질' 차단 위해선 지정제 전면 도입해야
기업과 회계법인 간의 비정상적인 관계와 기업의 갑질로 인해 후퇴하고 있는 회계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회계법인의 갑을관계를 원천적으로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바로 감사를 받아야 하는 기업이 감사인을 선임하는 모순된 구조를 제거해야 한다는 것. 즉 지정감사제를 전면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감사인 지정제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공정한 감사가 필요한 회사, 즉 상장예정 법인과 감사인 미선임 법인, 감사인 부당교체 법인, 회계기준 위반으로 감사인 지정조치를 받은 법인,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상장법인 등을 대상으로 감사인을 지정해주는 제도이다.
송재현 중소회계법인협의회 회장은 지난해 9월 조세일보가 주관한 '회계감사품질 대토론회'에서 "회계감사는 공공재에 해당함에도 이를 전적으로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결정되도록 운영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지정제를 확대하고 회계감사인의 선정권을 공적인 기관이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 회장은 이어 "감사업무 수주를 위한 시간 낭비와 담합을 제거하면 감사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과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시간과 재원을 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년회계사회 이총회 회계사는 "기업의 갑질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지정제의 전면 도입"이라며 "회계법인이 일감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재무제표 대리작성 관행 등도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올해부터 분식회계 위험이 있거나 동종업계 평균보다 부채비율이 높은 기업으로 지정 대상이 확대됐다. 하지만 회계업계는 이를 전면 지정제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감사인지정제 확대를 감사보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문제"라며 "올해부터 감사인 지정 대상이 확대됐기 때문에 이를 통한 개선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