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 댄스홀의 피아니스트로 일하는 샤를리에. 그의 진짜 이름은 에두아르드 사로얀이며, 한때 명성 높았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유능한 아내의 뒷받침에 힘입어 유명해졌지만, 아내가 그를 위해 매니저의 정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아내가 자살하면서 추락하고 만다.
그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댄스홀 종업원 레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다. 한편 샤를리에의 여러 형제 가운데 하나인 치코는 모모와 에르네스트라는 이름의 두 갱들을 피해 선술집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제작 노트와 이런저런 이야기
<400번의 구타> 이후 트뤼포의 두번째 영화는 그가 평소 경의를 표하던 필름누아르에 바쳐졌다. 그러나 트뤼포는 기묘한 감성의 감독이다. 그가 존경하는 히치콕의 영화를 아무리 히치콕식으로 만들어도 트뤼포의 영화에는 엉뚱한 낭만과 감상의 고리가 히치콕식의 편집의 힘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마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를 쏴라>도 그렇다. 가수이자 외로운 피아니스트의 사랑과 운명이 필름누아르의 향기를 고스란히 지닌다기보다는 훨씬 더 감성적이고 실존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그래서 여타 필름누아르하고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영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더군다나 <400번의 구타> 이후 만들어진 이 작품은 트뤼포의 경력 중 매우 엉뚱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SF영화 <화씨 451도>처럼 영화광인 트뤼포는 모든 장르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특히 이들 장르영화는 모두 원작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피아니스트를 쏴라>는 데이비드 구디스의 원작 <다운데어>를 기본 줄거리로 삼은 것이며, <화씨 451도>는 저명한 공상과학 소설가 레이 브레드버리의 원작을 옮긴 것이었다. 오히려 국내에는 거의 작품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누벨바그 세대 중 필름누아르에 대한 가장 큰 애정을 보였던 작가는 클로드 샤브롤이었다.
그의 대다수의 작품이 갱스터와 필름누아르 사이에 자리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위치로서는 누벨바그 세대의 은밀한 자산이었던 필름누아르의 흔적을 몇몇 영화로만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파리는 핼리혜성의 접근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무더위가 계속 되고, 애정없는 성관계로 발병하는 바이러스성 불치병 STBO에 시달리는 등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어느날 파리의 지하철역에서 갱단원인 알렉스의 아버지 장이 전동차에 치어 숨진다. 언론은 장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로 보도하지만 장의 동료 마크는 미국인 갱단의 보복이라 단정짓고 자신도 살해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린 끝에 알렉스에게 접근, STBO 왁진연구소를 털어 해외로 반출하기로 결정하고 마크의 집으로 옮겨 계획에 착수한다. 그러나 알렉스는 마크와 동거하고 있는 안나에게 마음을 빼앗기는데, 안나는 자신의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마크만을 사랑하며 알렉스의 사랑을 거절한다.
침묵은 가장 위대한 언어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들이 여전히 위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침묵 속에는 가장 큰 표현의 열정이 담겨 있다. 세기말의 복화술을 펼치는 이 영화는 침묵의 이미지와 광기의 스펙트럼 사이에서 질주한다. 드니 라방이 사랑의 고통에 벅차 라 데이비드 보위의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은 이미지의 분절과 열정의 스펙트럼 사이에 서 절규하는 명장면이다. 이미 우리의 사랑은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이미 지로 끝나는 것일까. 죽어가는 알렉스(드니 라방)가 차를 타고가면서 지 하철에서 보았던 것 같은 여인과 스쳐 지난다. 그럼 안나(비노쉬)를 그 여자로 안 것은 알렉스의 착각이었을까. 이미지는 또한 쉽게 왜곡되는 것이다.
자료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