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스 카락스(1962)는 유럽 주둔의 직업군인인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6살까지 파리의 교외에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19살에 단편영화를 찍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평을 기고한 적이 있는 그는 22살에 신비롭고 독특한 감성의 흑백영화 <소년 소녀를 만나다 Boy Meets Girl>(1984)를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단순한 스토리를 자극적이지 않은 절제된 표현으로 다루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엮어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카락스의 두번째 작품 <나쁜 피 Mauvais Sang>(1987)는 일종의 SF-갱영화로서, 사랑없는 성관계에 의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세기말적인 정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이 두 작품은 각기 파격적인 스타일과 소재라는 측면에서 종종 고다르의 작품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카락스는 고다르의 영화 <리어왕 King Lear>(1987)에 광대 역으로 출연한 바 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거리의 화가 미셸(줄리엣 비노쉬)과 불꽃 곡예를 하는 청년 알렉스(드니 라방)의 사랑을 그린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1991)은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카락스의 작품 중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정작 자국의 관객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국제적으로는 높은 찬사를 얻었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또한 5년여에 걸친 제작기간과 실제 다리를 재건하는 등의 작업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카락스의 세 작품에 모두 드니 라방이 알렉스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출연하고 있는데,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알렉스는 레오스 카락스의 본명이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감독은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퐁네프의 연인들> 이후 긴 침묵을 깨고 카락스가 8년 만에 내놓은 작품 <폴라-X Polar-X>(1999)는 99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랐다. 프랑스영화계의 여신 카트린 드뇌브와 제라르 드 파르디외의 아들 기욤 파르디외가 출연했다.
자료출처: 씨네21 영화감독사진, 1999
<홀리모터스>에 얽힌 이야기
ABOUT MOVIE
연기 - 모든 배우의 숙명을 연기하는 드니 라방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가 지나야만 관객들은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된다. 딸에게 “일 열심히 하고 오라”는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나선 백발의 사업가가 리무진에 탄다. ‘물가 연동 국채’ 운운하며 업무상 전화까지 한 그는 곧 옷을 벗더니 리무진에 딸린 거울의 조명을 켜고 가발을 꺼내 손질한다. 순식간에 그가 탄 리무진은 분장실로 변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오스카. 그의 행동을 의아해하던 관객들은 서서히 그가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감지한다. 오늘 그가 배정받은 역할은 걸인, 모션 캡쳐 전문 배우, 광인, 아버지, 아코디언 연주자, 암살자, 희생자, 죽어가는 남자, 집 안의 남자 등 모두 아홉 개. 리무진이 그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데려다 놓으면, 오스카는 그곳에서 배정받은 역할을 연기한다.
<홀리 모터스>를 보는 가장 큰 재미는 오스카가 펼치는 1인 9역의 놀라운 연기를 감상하는 데 있다. 오스카를 연기하는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의 시점에서 보면 1인 9역이 아니라 1인 11역이다. 이 날 오스카에게 배정된 역할 아홉 개에 더해, 주인공 오스카 자신과, 그가 아침에 저택에서 나오며 연기한 사업가 총 두 개의 역할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오스카는, 아니 드니 라방은 허물을 벗듯 역할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신묘한 연기를 선보인다. 역할에 따라 외모는 물론이고 숨소리와 걸음걸이가 달라지는 기묘한 풍경이 영화 내내 계속되는 것. 관객은 속수무책으로 그 장관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근엄한 사업가에서 무덤에 놓인 꽃을 뜯어먹는 광인까지, 용을 닮은 가상의 크리쳐가 섹스하는 동작을 만들어 내는 모션 캡쳐 전문 배우에서 딸의 거짓말에 화가 난 아버지까지,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걸인에서 칼날을 곧추세우고 중국인 공장에 쳐들어가는 암살자까지. ‘배우 한 명이 한 평생 이토록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폭 넓은 연기를 드니 라방은 <홀리 모터스> 한 편에서 거뜬히 해치운다.
드니 라방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부터 <홀리 모터스>까지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 다섯 편의 영화를 함께한 사이.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불리며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영화에서 주로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을 연기해 왔다. 그러나 <홀리 모터스>를 보면 그가 광기 어린 인물부터 쓸쓸하고 소시민적인 모습까지 얼마나 폭넓은 연기를 해내는 배우인지 새롭게 실감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하루에 아홉 개의 삶을 사는 오스카는 배우, 곧 드니 라방 그 자신이다. 희생자가 된 오스카가 킬러의 손에 죽어도 오스카는 다시 살아나 다음 배역을 연기하지만, 그 배역을 연기하는 동안 오스카는 진실로 고통 받고 흥분하고 미치고 슬퍼하고 죽는다. 그것이 바로 연기의 본질이다. 드니 라방은 이 영화에서 어떤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 모든 배우의 숙명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ABOUT MOVIE
영화 - 진짜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
잠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일제히 눈을 감고 있는 관객들은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그저 객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 모두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 앞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가 킹 비더 감독의 <군중>(1928)이라는 사실은 오직 소리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 그 광경 위에 영화 제목 <홀리 모터스>가 나타나는 건 꽤나 의미심장한 ‘선언’이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침대에서 자고 있던 남자는 잠에서 깨어 열쇠로 변한 손가락으로 벽에 붙은 문을 열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 남자는 바로 이 영화를 연출한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다. 그의 등장은 영화관 안에 생명을 깨우는 신호다. 그의 뒤를 따라 객석 복도에 차례로 갓난아기와 검은 개가 걸어 들어온다. 아장아장 걷는 갓난아기와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검은 개의 발걸음 위로 마치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이렇게 뇌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영화는 죽었어. 이제부터 내가 진짜 살아 있는 영화를 보여줄게.” 그제야 비로소 영화는 하루에 아홉 개의 삶을 사는 주인공 오스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홀리 모터스>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폴라X> 이후 13년 만에 만든 장편 영화다. <홀리 모터스>에서 오스카가 연기하는 아홉 개의 삶, 돌발적으로 일어난 노상 살인극, 옛 연인 진(카일리 미노그)과의 우연한 만남을 보고 있노라면 각기 다른 스타일의 영화 십 수 편이 한데 묶여 있는 것 같다. 모션 캡쳐 전문 배우의 에피소드로 CG를 적극 활용한 영화의 제작 과정을 훔쳐보는 것은 물론(이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황홀하면서도 관능적인 시각적 충격을 선사한다). 광인의 에피소드에서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2008년에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도쿄!> 중 <광인>의 주인공 광인(드니 라방)을 이번엔 도쿄가 아닌, 프랑스 묘지 지하도에 풀어놓는다. 아코디언 연주자의 막간극에서는 심장을 쿵쾅거리는 행진곡을 연주하고, 암살자와 희생자의 에피소드는 간담 서늘한 느와르로 변한다. 오스카가 옛 연인 진과 재회하는 순간 영화는 애수 어린 뮤지컬이 된다.
동시에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수많은 고전 영화들을 인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에서 운전사 셀린(에디뜨 스꼽)이 하늘색 마스크를 쓰는 건, 에디뜨 스꼽이 스물세 살 때 열연한 조르주 프랑주 감독의 <얼굴 없는 눈>(1960)을 인용한 것이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홀리 모터스>에서 영화적 형식과 장르의 다양성을 마음껏 탐구한다. 그리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자신이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의 조각들을 끼워 넣었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홀리 모터스>에서 영화의 우주를 탐험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ABOUT MOVIE
인생 - 쓸쓸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
오스카가 연기하는 아홉 개의 역할은 그대로 삶의 아홉 가지 단면이 된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 죽어가는 남자의 에피소드와 옛 연인 진을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고독과 슬픔을 포착한다. 아버지의 에피소드. 난생 처음 갔던 파티에서 화장실에 숨어 있기만 했던 딸 안젤(잔 디슨)이 “난 매력이 없잖아”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눈물을 비추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받을 벌은 너 자신이야. 평생 그렇게 사는 거.” 그리고 오스카는 단단히 화가 나서 리무진으로 돌아온다. 죽어가는 남자의 에피소드에서 오스카는 죽음을 경험한다. 자신의 곁을 지키는 조카 레아(엘리스 루모)에게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것이다. “네가 미움 받았던 건 네가 사랑 받았기 때문이야. 넌 사랑을 독차지했어.” 그 말이 꼭 안젤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처럼 들린다. 죽어가는 남자의 연기를 마치고 묘지를 지나쳐 가던 오스카는 철거 직전의 백화점 앞에서 우연히 옛 연인 진을 만난다. 서로의 다음 일정을 위해 딱 20분만 같이 있기로 한 두 사람은 추억의 장소인 백화점 안을 거닌다. 진은 오스카가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오스카는 “사라진 적 없다”고 말한다. 오스카는 진이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지만 야속한 시간은 두 사람의 이별을 재촉한다.
인생의 고독에 대해서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직접 드러내는 대목도 있다. 암살자와 희생자 연기를 마친 오스카가 리무진에서 분장을 지우고 있을 때 오스카의 맞은편,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세요? (중략) 이제 못 믿겠다며 불평이 들어와요. 난 당신 작업을 좋아하지만 몇몇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 대목에서, 장편 영화를 발표하지 않았던 지난 13년 동안 자신이 느꼈던 불안과 고독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홀리 모터스>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연인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의 죽음을 딛고 만든 영화다. 예카테리나 골루베바는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폴라X>에 출연했던 배우로 사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1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홀리 모터스>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그녀의 사진을 보여줌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의 죽음을 마주할 때, 영화 속에서 진이 부르는 “죽은 사람은 가고 산 사람은 살지”란 노랫말이 더욱 가슴에 사무친다.
명성과 환호의 심술궂은 변덕, 연인의 죽음과 혼자 남겨진 자의 고독을 모두 담담히 이겨내고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다. <홀리 모터스>는 인생의 거센 파도를 거쳐 온 모든 사람들을 향해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보내는 담담한 위로이자 신성한 찬가다. 눈길을 빼앗는 황홀한 이미지가 그 자체로 휘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을 담백하게 위로한다는 점에서 <홀리 모터스>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영화다.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