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의 여자들 2
이화영
간혹 죽은 개 울음이 들려요 식욕을 떨어트리기에는 그만이에요 우리 가족은 정말 그만이에요 다락방 나무계단 일곱 개를 내려가면 아빠가 목침을 베고 누워있어요 아빠는 싱싱한 시간을 아삭아삭 더디고 맛나게 먹어치우죠 매일 식욕이 없다며 엄마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아먹어요 앙상한 엄마의 몸에서 머리카락은 윤기 나게 쑥쑥 자랐어요 온몸의 골수가 머리로 가나 봐요 보름달이 뜨면 아빠의 식욕은 더 했어요 새우 눈을 뜨고 웅크린 엄마 등을 짓밟았어요 늙은 개는 마루에 올라 달보고 짖었어요 소리에 예민해진 것은 아마도 이웃집 암캐 탓일 거예요 어느 날 마당에도 작은 꽃밭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늘을 보면 아빠의 억센 손과 큰 장화가 떠올라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사금파리로 마당에 이파리만 그렸어요 이파리를 수십 장 그리고 나면 보고픔이 뭉개졌어요 꽃 없는 이파리는 짙푸르러서 오래 바라보지 못했어요 가을이 되어도 엄마는 오지 않고 대추나무에 노란 꽃이 피었어요 엄마의 노란 한복 같아서 마루에 앉아 보고 있으면, 아빠는 방문이 부서질 정도로 세게 닫았어요 밤이면 대숲에서 우우 댓잎이 울고 낮에 본 뱀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어요 뒤란에 솥을 걸치고 아빠는 수제비를 끓였어요 물이 끓고 치댄 밀가루가 다 익을 때까지 엄마에 대한 욕도 끓어 넘쳤어요 그해 가을 우물에서 쇳물이 흘러 넘쳤어요 라디오에서 뽕짝이 흐르고 아빠는 목침에 누워 오른쪽 다리를 왼 무릎에 걸치고 흔들었어요 목 때 타서 번들번들한 아빠의 목침을 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렸어요 아직도 나는 다락방에 있어요
나의 모든 마틸드
당신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마틸드,
목걸이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주름 장식 드레스를 입은 수많은 마틸드가 있군요
파티에서
마틸드는 가짜였을까요
목걸이를 빌려준 포레스터 부인은 가짜였을까요
목걸이값을 벌기 위해 허비한 10년의 마틸드는 진짜였을까요
가짜는 마틸드뿐이었을까요
창문으로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데이지꽃은 얼굴을 포기하고
흰 벽은 하루 종일 자신을 씻어냅니다
오래된 앨범 속에서 마틸드를 발견합니다
이제 약발이 떨어져 웃지 않는군요
총 맞은 구술이 허언증처럼 시끄럽습니다
비교의 저녁은 아침을 위해 죽습니다
마법이 풀리기 전
낡은 외투는 버리고
미친 듯이 뛰어나와 다시 목걸이를 잃어버려요
이런 긍정적인 비평사례는 없습니다
어느 장소를 가면 약속이 있습니다
나의 모든 마틸드에게
좋아요, 를 눌렀습니다
우리는 등을 어루만지고
쏟아지는 초록은 불면을 가져왔다
오늘도 새는 04:55분에 안녕 안녕
누군가 두고 간 아침을 입고
밥을 먹자고 약속한 곳을 찾아가는데
노란 보리밭이 안녕 안녕
고흐의 밀밭 속으로
얼굴이 지나가는데 이름이 오지 않았다
허기지면 흙길이 생각났다
어쩌면
밥은 흙일지도 몰라
시계의 작은 바늘과 큰 바늘은 포개질지 모르고
1초 사이 나와 당신에 머물렀다
시계 소리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데 흙길이 다녀갔다
날개도 없이
다시 무겁고 침울해질지라도
가볍고 맑아지는 순간을 위해
눈먼 사랑이 필요했다
자판에 물든 붉은 피
비트를 먹은 손은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지금 걷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감정은 곧은 어깨로 걸었다
무용無用한 것들이 주는 추억의 서정
소낙비 한차례 내리고 입추도 지난 늦여름이었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 창문을 열면 왼쪽에 정원이 보였다. 아름드리 근사한 후박나무가 정면에서 조금 비켜 내 방을 마주하고 있었다. 모기장 사이로 솔솔바람이 들어오면 숙제는 저만큼이고 머릿속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어디로 튈지 몰랐다.
그날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땀에 젖은 등을 살랑살랑 스치며 부드럽게 위무하는 손 잰 여자 같은 바람이다. 삶은 시간과 공간의 연속선상에서 무한한 범위와 확장성을 가지고 있으며, 삶을 인식하는 사고에 따라 수 없이 나뉘고 쪼개어진다. 나의 공간의 추억은 주름에 있다. 주름은 새로운 세계로의 인식과 지평을 열어나가는 실체이다. 주름의 형상으로 본 추억의 서정은 할머니의 낡고 어두운 광과 치마말기에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 생각이 나 큰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는 나무 빗장을 풀고 광에 들어가 마른 시루떡이나 인절미 곶감 등을 가지고 나오셨다. 기름진 음식이 있으면 전날 밤 제사가 있는 날이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쪽진 머리가 어울렸던 할머니는 허리춤이나 속바지에서 사탕 한 개를 꺼내 주셨다. 침이 마른 당신을 위해 자식들이 사다 주신 것을 아껴두었다가 먹을 것 없나 하고 눈 반짝이는 어린것에게 풀어주신 것이다. 여름에는 할머니 체온이 더해져 사탕 비닐이 잘 벗겨지지 않았다.
큰 집 대나무 숲 아래 채전 밭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초록이 지천인 싸리나무 울타리 채전 밭에 붉은 앵두가 휘어지게 열리면 참 예뻤다. 내가 밭에 들어가면 고랑을 마구 밟아 작물을 망친다고 할머니가 직접 바가지를 들고 따오셨다. 핑계는 작물 탓이지만 아마도 큰아버지와 장손 입을 생각해서 적당히 남겨두어야 하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몇 남지 않은 치아를 보이며 샐쭉 웃을 때면 할머니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름을 모르는 나이에 주름이 편안하고 좋았다. 주름은 늙고 소멸하는 것이 아닌 다른 쪽의 문을 열어 놓고 계획하며 무한히 구축 중인 실체이다. 한 세계의 완성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향하는 열림으로 뻗어나가는 열려있는 우주이다. 인간과 자연의 이미지 간의 상관관계를 끊임없이 이어주고 상응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작은 파노라마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주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주름은 정태적이며 절대 중심이며 고유성의 특질을 강조하며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생성과 펼쳐짐의 주름의 개념은 우주 만물의 개화와 조락까지도 연결된다. 분해되지 않으며 연속하는 무한한 주름과 작은 주름들은 연대하며 존재한다.
할머니가 쌓여서 내가 되고 내가 쌓여서 아이들이 되고 우리는 같지만 다른 공간에서 계속 변화하고 움직인다. 먼지가 되어 먼지가 그리운 날도 있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형상과 양태는 주름의 구조물로서 아코디언처럼 수축하고 확장하며 결합한다. 우리의 모든 생애가 바쳐질 주름 전체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 할 때 해는 뜨고 우리는 거미줄처럼 사라진다.
할머니가 가고 앵두나무도 없어지고 어둡고 습한 광도 없어졌다. 고향에 가면 무너지고 낮아진 빈집에 댓잎만 무성하고 푸르렀다. 힘이 들거나 외로울 때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햇살 내 나는 무명 앞치마를 떠올리곤 했다.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가 햇살과 바람의 농지거리에 말라가며 스며드는 독특한 향을 햇빛 냄새라 생각했다. 어릴 적 그 향이 좋아 할머니 치마에 얼굴을 묻곤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섬유 유연제를 쓰지 않는다. 아이들의 불만이 있을 때마다 “이 냄새는 햇빛과 바람의 언어야”, “자연이 만들어 낸 순수 향이야.” 하면서 아이들 코 밑으로 바짝 마른 옷을 들이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거부하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모자란 엄마의 성정을 받아들인 건지 포기한 건지, 이제 섬유 유연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끔 친구들 옷에서 나는 향을 부러워하며 향수를 애용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서로의 반사를 통해 다음 세대가 자발적으로 습득한 향의 방향이다.
무용한 것들은 과학적이거나 미학적인 규칙이 있다.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오고 가고 비가 내리고 그치는 본질의 세계는 일생 염두에 두고 상상했던 무용의 실체를 보여준다. 무용의 개체 안에 주름의 지형도가 있고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해독하며 무용과 주름의 관계가 무관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수축적 함의를 갖는 주름의 고독, 내성, 우울, 부재는 끊임없는 관계 맺기와 소통과 조화를 시도해야 한다. 나이테 가득한 주름의 서재가 글쓰기에 대한 탐구와 모색, 좌절의 공간으로 확산할 때 주름 텍스트는 언어 작용을 통해 구현된다.
할머니는 치마말기를 두어 번 말아서 가슴 아래를 동여맸다. 짧은 저고리에 드러난 유행했던 개화기 치마말기가 아니었다. 오랜 지병인 심화병으로 가슴을 치마로 동여매지 못하고, 한겨울에도 얇은 속 옷 밖에서 말기가 돌돌 말려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입매는 늘 웃고 계셨다. 앞 송곳니 하나 보이는 고운 얼굴이 어린 마음에 조금은 슬퍼 보였다. 내 주름의 원천인 할머니가 눈을 감았을 때 검은 눈물을 흘리며 목이 쉬도록 울었다. 엄마가 나중에 목이 아프다고 그만하라고 채근하셨지만 눈 뜨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러운 이유를 모르고 서럽게 울었다. 광과 앵두와 사탕과 치마말기의 울음이었다. 이러한 무형의 것들은 내가 죽는 날까지 주름 골과 골에서 비정형성으로 함께 할 것이다.
공간과 장소에 천착穿鑿하는 시간이 많다. 동이 트면서 요란한 새소리가 몰려온다. 창이 물빛으로 번져오면서 바깥의 움직임이 보인다. 아침 특유의 소란 속에 절대적인 질서와 안정이 존재한다. 일상의 반복적인 것들에서 느끼는 설렘은 큰 축복이다. 개인 고유의 정체성과 삶의 자취가 담긴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 다정의 공간, 이른 아침에 따뜻한 아욱국을 준비하며 가족의 입을 상상하는 곳, 무용한 것들이 오랜 세월 직조한 아름답고 슬픈 장소성의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