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 지귀
여왕을 탐한 자
사랑의 화신
업화의 불꽃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년 2월 17일)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김 씨(摩耶夫人 金氏)의 딸로 신라 27대 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632년 재위하여 14년간 군림했다. 분황사를 짓고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웠다. 신라를 삼국중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드는 기초를 다졌다. 인재등용을 중시했다.
제사장을 겸임한 그녀는 아름답기도 했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역사서에는 여(女) 자가 빠진 '선덕왕'(善德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훗날 제37대 군주이자 남성 국왕인 선덕왕(宣德王) 김양상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여왕으로 부른다.
지귀(志鬼)는 신라 활리(活里)의 역인(驛人)이다.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행차하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첫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고 끝내 미쳐 버렸다. 지귀라는 사람이 선덕여왕을 사모하여 병이 들었다는 소문을 신하들이 그녀에게 아뢰었다.
"지귀라 하는 미친 인간이 여왕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고마운 일이구나!"
그녀는 그의 미친 사랑을 조롱하지 않았다. 이용하지도 않았으며 감사했다. 여왕은 자신이 영묘사를 방문한다는 사실을 지귀에게 알렸다. 그는 사찰의 마당을 쓸고 또 쓸었다. 돌탑 아래서 사흘밤을 새우고 여왕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여왕이 화강암 돌계단을 올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동안 깜빡 잠이 들었다. 잠자는 지귀의 모습을 보고 여왕은 그가 깨기를 기다렸다.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여신처럼 나타난 여왕은 손끝이 가슴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잠자는 그를 애처로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긴 머리가 넘실거리고 목탑의 그림자도 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리고 고달프고 지친 마음을 알아차린 여왕은 자신인 듯 여기라 대신 화려한 금팔찌를 풀어서 잠든 그의 가슴에 놓아준다. 세공사가 절묘하게 담금질해 만든 신라 여왕의 정교한 팔찌였다. 자신인 듯 지니고 사랑의 아픔을 잊으라는 여왕의 배려였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기쁨은 슬픔의 불씨가 되어 가슴속에서 활활 타 올랐다. 잠이든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나 화귀가 되어 스스로 불타올랐다. 사랑에 타들어가 바싹 마른 가슴이 장작이 되어 스스로 불타오른 지귀! 바보 같은 지귀, 그는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귀는 탑을 잡고 일어서려는데 탑에도 불이 붙고 온 거리가 다 타올랐다. 자연발화한 화귀가 되어 돌아다니자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지귀가 지나가는 곳에는 불길이 생겼다.
지귀가 마음에 불이 일어 화귀가 되었네. 왕이 술사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은 주사(呪詞)를 짓게 하였다. 이 주사를 대문에 붙여 화재를 막게 하였다.
志鬼心中火 -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燒身變火神 - 몸을 태워 화신이 되었네.
流移滄海外 -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
不見不相親 -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
사랑은 불이다. 지귀는 사랑하는 마음에 불타 신라의 불귀신이 되었다. 삼국유사 제4권에서는 혜공이 영묘사의 몇몇 곳에 새끼줄을 둘러치고 3일 후에 풀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이 영묘사에 방문했을 때 지귀가 탑을 불태웠으나 혜공이 새끼줄로 맨 곳은 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귀'라는 귀신과 영묘사 탑의 화재 사건이 실제로 언급되어 있다.
사랑은 잃어버린 자만이 안다. 쟁취한자는 절대로 모른다. 내 가슴에 루미놀을 뿌린다면 온통 푸른빛의 형광으로 물들 것이다. 지나간 여름바다의 추억의 조개껍질에 찔려 피 흘린다. 몸서리치게 외로운 동짓날밤, 사무치는 사랑의 노래는 면도날이 되어 내 귀를 자른다. 별이 빛나는 밤이 가슴을 뚫고 가문비나무가 솟아나고 밀밭엔 까마귀 떼가 날아간다. 한때 사랑이라 불렀던 것들은 광기가 되어 타고 또 타오른다. 사랑만 이루어진다면 윙크를 날리며 베드로처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릴 수도 있다.
업화의 불꽃이로다.
맹렬히 그리워하는 마음이 불꽃이 되었다. 사랑은 멀리서 봐야 한다. 멀리서 보면 "당신 없인 못살아." 이지만 가까이선 "당신 때문에 못살아."이다. 아마도 신라시대엔 화재가 많았나 보다. 선덕여왕은 자나 깨나 불조심, 너도나도 불조심이라는 오래전 사라져 버린 포스터처럼 단호한 주문을 썼다. 끈적이는 그의 불의 혀를 단호하게 잘라버렸다. 그녀는 여왕답게 넉넉했다. 팔찌를 놓아주며 사랑의 상처를 위로했다. 그러나 선을 넘어서는 사랑은 가차 없이 잘랐다. 단호했다. 다시는 너를 돌보지 않겠노라! 너 꺼져!라는 말이다.
선덕여왕의 주술의 힘이 신라를 지켜주고 있다는 설화이다
그녀는 자신이 죽는 날을 정확하게 알려주고 모날 모시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도리천이란 불교교리에 "하늘에 있는 산"이었다.
전설로 남은 여왕, 영험하고도 아름다웠던 여인, 타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숭고히 여겼으나 그 사랑으로 화가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물리쳤던 여인, 그녀의 주술을 주문처럼 외운다. 사랑이여! 불타는 사랑이여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은 사랑이여 꺼져라! 영원히! 뜨거운 눈물을 삼키는 밤들이여 제발 안녕!
올해가 가기 전에 태워야 할 일이 많았다. 나는 나 자신을 태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정말 태워야 할 것들은 못 태웠다. 밤바다는 런웨이(runway), 아무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간 세월들은 망망한 바다 위 블랙 카펫을 깔아주니 천천히 워킹연습을 해야겠다. 제발 몸속에 잠식해 간헐적으로 나를 갉아먹는 외로움과 지독한 그리움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리움의 불꽃들은 내 뇌에서 도려내 버리고 싶은 종양이다. 할까 말까 피 말리는 결정장애의 밤들이 줄줄이 딸려온다. 주술로 쫓아버려야 할 추억만 남았다. 떼쓰고 매달릴수록 점점 더 도망가는 사랑, 얻었음이여! 사랑의 고통을! 잃었음이여 사랑의 고통을! 덕만은 사랑의 고통을 아는 여자였다.
사생결단으로 싸워야 하는 밤들이 날마다 생긴다. 뽑아도 뽑아도 나오는 상어의 이빨처럼 돋아난다. 안개 낀 창문밖에서 어른 어른대다 어느새 어른이 되었다. 막차를 타는 시간이 오더라도 여유 있게 가지! 황혼을 황홀하게 받아들이지! 살아온 아픔들을 몸은 다 기억하고 있지. 시리고 쓰라린 삶의 비애들을 맥을 짚듯 잡아본다. 궁색한 삶의 변명들을 날이 춥고 밤이 길어 호랑이가 교미하는 동짓날 밤, 묵직한 소리로 내 고통을 부르리라!
이럴 거면 왜 그렇게 힘든 새벽길을 걸어야 했으며, 결국 이럴 거면 왜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침을 받은 건지? 삶에서 사기당하고 난 또 통곡한다. 이곳이 저승이고 저승이 이승인지! 망막 속에만 존재하는 저릿저릿한 슬픔의 알갱이들! 오늘도 나는 나에게 피의 고백서를 시간의 수레바퀴에 깔린 체 써 내려간다. 세상 모든 것들을 블랙홀로 쓰레기처럼 던져버리고픈 밤이다. 내 마음의 얼룩을 지울 수 있는 표백제를 사러 가야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