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 온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은 인영이 부를 때에 목소리가 달라져요!"
나의 큰 아들 호영이가 얼마 전에 "아빠는 사랑의 90%는 인영이에게 주고 나머지 10%를 가지고 나머지에게 갈라 준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인영이는 안동에 가서 입양을 한 나의 여섯째 아들이다. 생후 16일 만에 우리집에 왔다. 우리집에 온 지 한 달 되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 입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인영이는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 주었다. 자녀의 아픔이 부모에게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실감케 한 아들이다.
찬영이가 입양되어서 우리집에 왔을 때에 우리 아이들이 예쁘다고 지어 준 별명이 있었다. '아시아의 얼짱'이라고 했다. 인영이를 본 아이들은 '세계의 얼짱'이라고 했다. 세상에 아무도 넘 볼 수 없는 얼짱이라서 천사가 시기를 했는지 인영이는 병으로 신음을 했다. 그렇게 환한 미소로 우리 가족들을 위로하고 웃음을 주었던 인영이가 더 이상 웃지 않고 울기를 시작했다.
응급실에 가기를 수차례, 인영이가 울기를 시작하면 그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보건소(우리가 살던 집 옆에 보건소가 있었음.) 마당에서 유모차로 달래기를 짧게는 두시간 길게는 네시간 이상을 아내와 함께 유모차를 밀면서 보냈다.
매일의 불규칙한 인영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심해지고, 소아과 의사의 말대로 잠복고환과 음낭수종으로 인한 장꼬임으로 오는 자지르지는 고통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한 나는 응급실 레지던트를 지낸 용민이에게 인영이가 울 때의 동영상을 촬영해 보냈다. 용민이가 하는 말 "목사님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될 것 같은데요....." 했다.
그 말에 당장 병원으로 가야 했지만 진짜로 돈이 수중에 하나도 없었다. 돈, 인영이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걱정....걱정.... 또 걱정....걱정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하든 돈을 마련해서 인영이를 데리고 대학병원엘 가야만 했다. 걱정하고 기도하면서 돈이 마련될 때 까지 기다렸다.
사과철이 되어서 큰 아들 호영이와 함께 새벽 일찍부터 사과밭에 가서 일을 했다. 둘이서 번 돈으로 사과일이 끝나면 인영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다. 사과밭 5일째 되던 날, 새벽에 일어나 피곤한 몸으로 1시간을 운전해서 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이틀은 장로님 댁에서 먹고자고 하려고 짐을 챙기던 그날에 인영이의 울음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인영이를 달랬다. 그치지를 않았다. 인영이를 안고 찬양과 복음송을 부르면서 머리로는 기도하면서 내 기억에 1시간 정도는 씨름을 한 것 같다. 인영이는 내 팔을 베게 삼고 곤히 잠들었다. 새벽에 아내가 나를 깨웠다. 인영이와 나는 너무나 힘들었는지 자기 전 그대로 움직인 흔적이 없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인영이의 조그만 머리가 내 팔을 눌러서 쯔려왔다. 차가운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며 자던 인영이가 이날은 미동도 하지 않은체 내 팔에 안겨 잠들었던 것이다. 그런 인영이를 뒤로 하고 호영이와 함께 새벽에 백자 사과밭으로 갔다.
장로님 댁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사과밭에 도착해서 일을 시작한지 1시간이 좀 넘었을 쯤에 전화가 왔다. 아내에게서 왔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가 전화를 했다.
울먹이면서 다급하게 전하는 아내의 말 "여보 인영이가 의식이 없어요!"
아내에게 지금 간다고 전화를 끊고는 장로님께 인영이 때문에 가봐야 겠다고 전하고, 호영이는 장로님 집에서 자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호영이에게는 아빠는 가야 된다고 하고, 목사님께는 기도 부탁을 하고, 용민이에게 부산대학병원에 오늘 중으로 진료를 보게 해 달라고 전화하고는 차를 몰았다.
차를 운전해 가는 도중에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형편없는 아버지,
아무 능력도 없는 아버지,
이 지경까지 아무것도 못한 아버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조차 없는 초라하고 무능한.....
자학하고, 자책하고, 자신을 향해서 꾸짖는 눈물만이 내 볼을 타고 흘려 내렸다.
집에 와서 아내가 준비하는 동안 곤히 잠들어 있는 인영이를 안으니 또 눈물만이 흘렀다. 햇볕이 쬐는 처마 밑에 의자에 앉아서 인영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려고 했는데 기도가 되지 않았다. "인영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하면서 축복송만을 불렀다. 그것도 눈물에 잠겨 북바쳐 오는 울음으로 제대로 된 축복송이 나오지를 않았다. 성소병원에 가서 소견서를 떼고 곧장 양산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아내는 인영이를 안고 울고, 나도 울고 그렇게 말없이 양산에 도착을 했다.
그날 응급실에서 MRI를 촬영하고 척수를 뽑아서 검사를 했다. 척수를 뽑고는 아이가 3-4시간 정도는 움지이면 안된다고 해서 아내와 내가 아이의 손과 발을 잡고 밤을 보냈다.
인영이의 병명은 '영아연축'이라고 한다.
11월 12일에 뇌파검사를 하고 21일에 외래진료를 갔다. 담당교수가 하는 말 "부모들이 영아연축이라고 하면 다들 눈물만 흘립니다." 라고 했다. 내 아이가 평생 장애로 살 것을 생각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영이는 영아연축이 담당교수의 말에 의하면 특별한 경우라고 했는데, 인영이는 발달상태도 정상이고, 처방한 약도 소량이고, 뇌파검사에서도 이때까지 한 번도 이상한 파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특별한 경우라면 치료가 쉽지 않은 것으로 들리는데 인영이는 모든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영아연축으로 치료를 하면서 이것이 눈물 흘려야 되는 줄도 모르고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수가 인영이는 약을 끊고서 치료를 해 봅시다고 합니다. 약을 끊고 3년 정도 이상이 없어면 치유가 된 것으로 생각을 하면 됩니다고 합니다. 그날도 어린이 병동 7병동-우리 인영이가 입원했던 그 병동-에 17살 된 뇌병변장애아를 만나서 예배를 드리고 축도를 해 주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인영이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정말로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사과일이 끝나고 호영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면서 우리 호영이가 하는 말이 "아빠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인영이가 병을 고치고 웃음을 찾아서 좋아요." 했다. 내가 호영이에게 고맙다고 말을 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 놈이 철이 일찍 들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때 호영이는 18살 고2의 나이였습니다. 호영이와 내가 사과밭에서 번 돈은 1백육십만원, 인영이의 병원비가 총 4백6십만원이 나왔는데 의료보호1종의 혜택을 받았서 우리가 지불해야될 금액이 1백5십만원, 나머지 십만원은 호흡기 치료기 사고 그렇게 사과밭에서 번 돈은 사라졌다.
후에 명곡에 와서 호영이가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때 일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저에게 호영이의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하는 말 " 여보! 호영이가 사과밭에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인영이 병원비를 해결해서 좋았지만, 엄마! 나는 솔직히 이제 겨울을 어떻게 나나.... 이제 사과밭 같은 일도 없고 이 돈으로 겨울을 나야 하는데..... 하면서 호영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울면서 그때의 일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지금 호영이가 주왕교회 수련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하는 말이 엄마!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지 많은 열매를 맺듯이..... 엄마! 우리가정이 썩어져야지 많은 아이들이 우리 가정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 가정이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야지...."
인영이는 우리 가정에 나의 큰 아들 호영이에게 한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한 소중한 아이입니다.
90%의 사랑을 쏟을 수 밖에 없는 나의 아들 인영이랍니다.
인영이에게 이런 스토리를 가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인영이가 약을 끊고도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고.....
인영이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가정의 푯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참으로 오랜만에 쓰는 글입니다. 인영이를 데리고 올라오는 길에 새부샬롬에 글을 적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이렇게 적어 봅니다.
모두에게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