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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밀양아리랑길
여행일 : ‘24. 8. 31(토)
소재지 : 경남 밀양시 교동·용평동·가곡동·삼문동·내이동 일원
산행코스 : 밀양역관광안내소→천경사→용두보→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천문대→동문고개→영남루→용두교유원지(소요시간 : 12.59km를 4시간 15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밀양시에서 조성한 둘레길로 행정안전부의 ‘친환경 걷는 녹색 길 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2013년 조성됐다. 밀양 도심과 인근에 산재한 역사문화 유적지가 하나로 연결돼 있어, 밀양의 옛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걸을 수 있는 도심 속 친환경 산책로이다.
▼ 트레킹 들머리는 밀양역(경남 밀양시 가곡동)
중앙고속도로 남밀양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밀양대로)를 타고 밀양시내로 3km쯤 들어오면 ‘예림교’를 건너게 되고, 곧이어 ‘밀양역’에 이르게 된다.
▼ 순환에 가까운 별개의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6.2km : 읍성-삼문송림-영남루), 2코스(4.2km : 향교-시립박물관-추화산성), 3코스(5.6km : 용두목-금시당-월연정)를 따로따로 돌 수도 있고, 아래 지도처럼 ‘용두교’에서 시작해 연결해가며 걸어볼 수도 있다.
▼ 밀양트레일 도보여행을 위해 ‘밀양역’부터 들른다. 밀양역 앞 ‘밀양종합관광안내소’에서 스탬프 북을 받아 7개 포스트에 비치된 도장을 찍어 제출하면 완주 메달과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증이벤트 참여도 가능하단다. 코스 내 스탬프보관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게시 후 네이버 폼을 작성하면, 추첨을 통해 매달 50여 명에게 ‘아라리쌀’ 등 2만원 상당의 상품을 지급한다. 단, 밀양시민은 완주하더라도 선거법 제112조에 따라 메달과 인증서 등 기념품을 받을 수 없고, SNS 인증이벤트에 당첨돼도 상품을 받을 수 없다.
▼ 실제 출발지인 ‘용두교유원지’. 가곡동과 삼문동을 잇는 ‘용두교’ 아래 화장실까지 갖춘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 11 : 40. ‘밀양강’ 둔치를 따라 동진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밀양아리랑길의 3개 코스 중에서 ‘3코스’에서 시작한다고 보면 되겠다.
▼ 참! 길을 나서기 전에 안내도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 11 : 45 : 첫 만남은 ‘징검다리’. 밀양강에 놓인 저 징검다리(상판을 덮었으니 ‘잠수교’로 분류하는 게 옳을 것이다)를 건너면 1코스로 연결된다.
▼ 계속해서 3코스를 따르기로 했다. ‘스탬프 북’에 적힌 7개의 포인트 가운데 두 번째 포스트(첫 번째 도장은 밀양역의 관광안내소에 있다)인 ‘용두보’가 3코스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도장을 찍을 칸도 3코스→2코스→1코스 순으로 배열해 놓았다. 1코스부터 시작할 경우 자칫 길이 헷갈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 11 : 47. 밀양강철교의 교각 아래를 지나간다. 밀양강철교는 ‘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개의 철교(경부선 상하선인 듯)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놓는데, 공사가 끝나면 옛 다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참고로 1904년 일본 강점기 때 만든 저 다리에는 아픈 사연이 서려있다. 교각을 지을 때 사용된 석축이 다름 아닌 조선시대 밀양읍성을 허물어서 나온 돌이었기 때문이다.
▼ 11 : 49. 강기슭이 가파르게 변하는가 싶더니 길이 잔도(棧道)로 변해버린다. 바위벼랑에 선반을 달아매듯 계단을 놓았다. 그것도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며 위로 올라간다. 하나 더. 얼마 뒤에는 위로 오르지 않고도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벼랑을 따라 다리 모양의 길은 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 11 : 53.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천경사’가 반긴다. 대숲 사이로 노란 벽이 인상적인 사찰이다. 탐방로는 이 절간을 오른쪽에 끼고 빙 에둘러간다.
▼ 천경사 일주문. 절벽에 걸터앉은 절간답게 벼랑을 기둥삼아 누각 모양으로 지었다. 절간은 ‘붓다나라 연수원’을 겸하는가 보다. 하지만 1970년대 국제적 무술배우로 활동했던 ‘왕호’씨가 직접 지도한다는 ‘왕호영화예술학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영화 말고도 미술, 음악, 방송 등 각 분야의 전문 교수진들도 초빙한다고 했는데...
▼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천경사(天鏡寺)’는 용두산 자락의 절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아니 터는 좁지만 크고 작은 전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실속 있는 사찰이다.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단다. 1988년,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작은 암자 터에 수원 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 절간은 밀양강 강변의 비탈진 벼랑에 매달리듯 의지하고 있다. 덕분에 시야가 툭 트이면서 크게 활처럼 휜 밀양강과 그 너머 볕 좋은 들녘 ‘암새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강을 가로막고 있는 ‘용두보’도 눈에 들어온다. 강을 ‘한 일(一)’자로 가로막아 물을 모은 다음 수로를 통해 농경지(상남벌) 쪽으로 흘려보내는 거대한 물막이(수리시설)다.
▼ 천경사의 주요 볼거리인 ‘석굴법당’은 찾아보지 못했다. 대웅전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겐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명심보감(明心寶鑑)용 법어(法語)들을 가슴에 새기며 절간을 나선다. ‘다 잘 될거야. 당신이니까’ 등등...
▼ 12 : 03. ‘용두산’ 갈림길(이정표 : 금시당↑ 1.8km/ 산성산↗ 3km/ 용두연주차장↓ 0.7km). 밀양아리랑길은 ‘강변길(금시당 방향)’을 따른다. 용두산의 능선을 따라가다 ‘금시당’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고 싶다면 ‘강변길’을 따라가야 한다.
▼ 산성산 등산로안내도. ‘용두산(龍頭山, 116m)’은 산성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씨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의 형세가 흡사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설화에 따르면, 이무기가 하늘의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몰래 훔쳐 나오다 용두목의 용에게 들켜 싸움이 났다. 그때 엎어진 바구니가 용두산이 되고, 용이 이무기를 치면서 쏟아 부은 물이 밀양강이 됐다고 한다.
▼ 12 : 05. 길은 밀양강 쪽으로 대밭이 길게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자 ‘용두보’ 갈림길이 반긴다. 두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용두보(龍頭湺)’는 수차 없이 강물을 상남벌의 농업용수로 제공해 주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수리시설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마쓰시타 베이찌로’가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자행된 곡식 수탈의 흔적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니 토착왜구들에게는 좋은 얘깃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 ‘용두목’에서 옛 별서 ‘금시당’까지 가는 강변길은 5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선비길이다. 조선 선비들이 학문을 닦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었다. 근세에 넘어오면서는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주민의 통행로이자 학생들이 등굣길로 이용하던 운치 있는 옛길이기도 했다.
▼ 길 위에서 만난 ‘구단방우(巫岩)’. ‘굿을 하는 바위’라는 뜻의 지명으로 옛날부터 무당들이 이곳에서 굿을 하며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그 굿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모양인지 제단에는 과일과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 길은 수직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지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다. 처마에 매달린 제비집처럼 잔도(棧道)를 놓아 안전을 도모했음은 물론, 오히려 낭만을 더해주고 있다.
▼ 12 : 16. 길은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이때 밀양강에서 가장 길다는 징검다리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호사가들은 저 징검다리를 꼭 건너볼 것을 권한다. 밀양아리랑 노래처럼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종종걸음으로 건너는 기분이 색다르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는 다슬기 잡이 삼매경인 아낙네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스치듯 지나간다.
▼ 길은 작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이어진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힘들지 않고 걷는 즐거움만 더해준다. 거기다 용두산 나무숲이 오뉴월 햇볕까지 막아주니 이 아니 즐거울 손가.
▼ 숲길 왼쪽에는 밀양강이 흐른다. 덕분에 잠깐 잠깐이지만 밀양강의 물길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하나 더. 저 밀양강은 은어로 유명했었다. 청정수에서 자라 수박향이 강하고 감칠맛도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은어를 찾아볼 수가 없단다. 1987년 완공된 낙동강 하굿둑 탓이다. 어릴 때 바다로 나갔다 다시 하천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길목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 강변길은 인간의 손길을 거부했다. 정비랍시고 지나친 포장을 안했다. 그러다보니 걷는 내내 강물소리와 풀냄새가 따라다닌다. 친환경 탐방로인 셈이다. 그렇다고 탐방객을 위한 배려까지 빼먹지는 않았다. 알록달록 예쁜 색상을 입힌 벤치로도 모자라 아예 드러누울 수 있는 의자까지 배치했다.
▼ 12 : 32. 콧노래 흥얼거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금시당(今是堂)’이다.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이광진이 낙향해 지은 ‘별서(別墅 : 현대의 별채·별장과 같은 개념)’로 주변 자연과 멋지게 조화를 이루는 영남지방 선비 가문의 전형적인 정자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이곳에 세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 금시당(今是堂). 금시당은 이 별서를 지은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의 호다. 조선 성종 때인 1566년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이 1744년에 복원했다. 이후 1867년에 증축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금시당 안에 백곡서원(栢谷書院)도 창건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하나 더. 고택 옆에 새 한옥을 짓고 후손이 살고 있었다.
▼ 백곡재(栢谷齋). 금시당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 1681-1763)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인 백곡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에 지었다. 영조 때 학행으로 이름 높아 교남처사(嶠南處士)로 불렸던 분이다.
▼ 12 : 40. 밀양시 국궁장(國弓場).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 아래서 잠시 쉬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어서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국궁장이 나온다. 주말엔 누구나 국궁을 배울 수 있고, 직접 쏴보는 체험(4천원)까지 가능한 곳이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둑길을 따른다.
▼ 12 : 46. 활성교(活成橋).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자마지 오른쪽으로 간다(왼쪽은 잠수교를 건너 ‘암새들’로 이어진다). 이어서 ‘활성교’를 건넌다. 주민들에게는 ‘살내다리’로 더 익숙하단다.
▼ 활성교 아래 밀양강변에는 ‘금시당 유원지’가 있다. 여름철이면 많은 야영객들이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다.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차박(車泊)을 위해 찾아오는 이들로 항상 붐빈다고 했다.
▼ 난간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이 가히 압권이다. 밀양강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이웃한 들녘 너머로는 가지산·운문산·억산·구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람스레 펼쳐진다.
▼ 12 : 52. 다리를 건넌 다음 ‘벚나무’가로수로 치장된 ‘용평로’를 따라간다. 왼쪽 옆구리에 끼고 왔던 밀양강을 오른쪽 옆구리에 바꿔 끼고 간다고 보면 되겠다.
▼ 12 : 53. ‘용호정(龍湖亭)’. 조선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둔한 ‘격제(格濟) 손조서(孫肇瑞(1412-?)’를 모시기 위해 ‘일직손씨’ 문중의 묘역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 주 건물인 정당과 정문격인 심경루(心鏡樓)로 이루어졌는데, 이중 심경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뜻한단다.
▼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을 뜻한다는 용호정(龍湖亭)은 문이 닫혀있어 담장 너머로 곁눈질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편액을 달고 있는 대청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5칸 겹집이다. 참고로 손조서는 집현전학사를 거쳐 병조정랑과 봉산군수를 지냈다. 김종직과 교우했으며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정여창 등이 스승의 예로 섬겼다고 전해진다.
▼ 도로가 1차선으로 바뀌었다. 옛 모습, 그러니까 1905년 건설된 경부선 철도가 놓여있던 시절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1940년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선로가 다른 곳으로 이설됐고, 철길은 이제 비좁은 일반도로로 변했다.
▼ 안내판은 오른쪽을 ‘활성유원지’라고 했다. 밀양강의 동천수(단장천)와 북천수(밀양강 본류)가 합류하면서 심연을 이루며 넓은 백사장을 만들어놓은 자연발생 유원지라나? 1566년 근재 이경홍이 그린 밀양12경도에도 나타나있는 명소라고 한다.
▼ 13 : 02. 용평터널. 옛 경부선 철도의 또 다른 추억이다. 월연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고도 하는데, 폭 3m에 길이는 130m쯤 된다.
▼ 증기기관차가 내뱉은 석탄 연기로 새까맣게 그을렸을 만도한데, 안은 잡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아니 은은한 조명이 터널을 신비롭게까지 만들어준다. 그래선지 사진을 찍으려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 덕분에 꽤 많은 차량들이 밖에서 기다려야 했지만... 참고로 터널은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때문에 안에 사람이나 차량이 있으면 입구의 전광판에 ‘진입금지’라고 뜨기 때문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 이곳은 정우성 주연의 영화 ‘똥개’가 촬영되기도 했다. 그래선지 생뚱맞게도 ‘똥개터널’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나?
▼ 13 : 08. 터널을 피해 강변길을 따라간다. 그러자 또 다른 문화재인 ‘월연정(月淵亭)’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 등을 지낸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직전 벼슬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와 지은 쌍경당과 월연대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작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 왼쪽은 쌍경당 영역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후손들에 의해 쌍경당은 1757년, 월연대는 1866년 복원됐다. 하나 더. 네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이곳 월연정에 설치되어 있다.
▼ 강물과 달이 맑기가 한 쌍의 거울 같다는 ‘쌍경당(雙鏡堂)’. 이태가 세운 월연정(月淵亭)의 건물 중 하나다. 함경도 도사 재직 중 기묘사화를 예견하고 사직·귀향한 이듬해인 1520년 용평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기초를 닦아 건물을 지었단다.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좋도록 방과 대청을 개방형으로 꾸미고 사철 기거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두었다. 이밖에도 쌍경당 영역에는 제헌(霽軒)이 들어서 있었다.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로 1956년 지었다. 살림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도 살짝 엿볼 수 있다.
▼ 쌍경당 영역을 빠져나오면 실개천. ‘쌍청교’라는 돌다리를 건너자 배롱나무 꽃무리에 둘러싸인 월연대 영역이다.
▼ 연못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는 ‘월연대(月淵臺)’는 정자 기능이 두드러지도록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방을 대청으로 둘렀다. 참고로 밀양의 아름다운 경승지 12곳을 일컫는 ‘밀양십이경(密陽十二景)’ 중 하나인 ‘연대제월(淵臺霽月)’은 월연대의 풍광을 가리킨다. 매월 보름이 되면 밀양강에 비친 둥근 달의 모습이 길게 달빛기둥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광경을 월주경(月柱景)이라고 한다나?
▼ 월연대에서의 조망. 밀양강과 단장천이 합수하는 호수 같은 ‘월연(月淵)’의 물결이 거울 표면처럼 맑다. 하지만 웃자란 배롱나무가 아랫도리를 잘라먹어 버렸다. 하나 더. 월연대의 빼어난 승경 12곳을 일컫는 ‘월연대십이경’은 ‘징담제월(澄潭霽月)’을 제일로 치는데, 이는 거울 같은 저 수면에 맑은 달이 비치는 풍광을 묘사한 것이다.
▼ 월연정(月淵亭)은 ‘정자 정(亭)’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판은 우리나라 전통 정원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2012년에는 월연정 일원 전체를 명승(87호)으로 지정까지 했다. 그렇다면 먼저 ‘뜨락 정(庭)’자로 이름부터 바꿔놓아야 하지 않을까?
▼ 월연정의 또 다른 명물이 ‘백송’을 살펴보기로 했다. 백송은 월연대에서 강가로 내려서서 20m쯤 올라가면 나온다. ‘백송나무 가는길(또는 보는곳)’이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백송의 나무껍질 색깔은 어릴 때는 회녹색이다가 나무가 자라면서 나무껍질이 계속 벗겨지면서 점점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그리하여 나이가 많이 들면, 껍질이 마치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흰색이 된다고 한다.
▼ 최초의 월연정 백송은 약 500년 전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가져와 쌍경대 북쪽 축대의 모서리 끝부분에 심었으나 1925년 대홍수 때 뿌리째 뽑혀 고사되었다. 하지만 최초 심었던 백송에서 솔방울이 언덕으로 날아가 자연 발아로 바위틈에 세 그루의 백송이 자랐다. 그중 한 그루는 2014년 태풍으로 고사되었고 현재 수령이 약 280년 된 마지막 한 그루의 백송 나무만이 살아남아 월연정 절벽에서 자라고 있다.
▼ 13 : 20. ‘2코스’와의 접점인 ‘추화산성’으로 가기 위해 등산을 시작한다. 산행은 월연대의 왼쪽(정문 앞)에서 시작된다. 초입에 이정표(추화산봉수대 1,561m/ 활성교 697m)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길은 또렷한 편이다. 거기다 밀양아리랑길 엠블럼과 리본이 곳곳에 매달려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되기 때문에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철에는 땀 깨나 쏟아야만 한다.
▼ 13 : 42. 첫 이정표(추화산봉수대 761m/ 월연정 800m). 갈림길도 여럿 만난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중요한 포스트에는 이정표를 세웠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엠블럼이나 리본이 길을 안내해 준다.
▼ 13 : 53. 추화산성 남문 터(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280m/ 월연정 1.28km). 5분쯤 더 걸어 사거리(이정표 : 추화산봉수대 500m/ 섬벌마을 1.5km/ 월연정 1.07km)를 만났다싶으면 곧이어 추화산성(남문 터)에 올라선다.
▼ 밀양아리랑길 안내도가 ‘2코스’와 만났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성황사 유지(밀양손씨 문중 사당)’와 추화산 정상(243m)으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체력에 한계를 느낀 우리 부부는 이를 생략하고 곧장 추화산성으로 가기로 했다.
▼ 성벽에서의 조망. 밀양시가지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서는 이만한 곳도 없겠다.
▼ 13 : 58 – 14 : 21. 임도처럼 잘 닦인 길을 따라 5분쯤 더 걸으면 ‘추화산성’이다. 하지만 성벽은커녕 성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분지처럼 널찍한 잔디밭과 건너편 언덕에 걸터앉은 ‘봉수대’가 다라고나 할까? 아니 식탁형의 의자까지 갖춘 멋진 쉼터를 겸하고 있었다. 덕분에 막걸리를 반주삼아 간식을 먹으며 푹 쉬다 갈 수 있었다.
▼ 봉화대 맞은편은 ‘추화산(推火山, 243m)’이다. 산 이름은 밀양의 옛 이름인 ‘추화군(推火郡)’에서 유래했다.
▼ 이곳에는 다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박물관 1.1km/ 월연정 1.5km)와 추화산성 안내판도 눈에 띈다. 추화산 정상 부분을 빙 둘러싼 산성인데,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보아 신라와 가야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조선시대 전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단다. 특이한 것은 축성 초기에는 ‘읍성(邑城)’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 아래 들녘에서 농사짓던 백성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왕래하며 살아갔을까?
▼ 시야가 툭 터지는 민둥봉우리는 ‘봉수대’가 올라앉았다. 봉수제도가 국법으로 확립된 고려시대(1149년)에 설치되어 갑오개혁(1894년)으로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봉수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 봉수대의 특징대로 정상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높고 낮은 주변의 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좌도연제 제2거서노선의 간봉선에 해당하는 주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봉기, 분산·자암산·밀양백산남산을 거쳐 온 봉수를 경북 청도남산으로 전달했단다.
▼ 14 : 27.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하지만 나선형으로 만들어놓은 침목계단의 아름다운 곡선이 힘들다는 느낌까지 싹 날려버린다.
▼ 산길은 한마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쓰레기는 물론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잡초 대신 지자체에서 이식해놓은 맥문동 등의 꽃들이 곳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 탐방객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벤치마다 부채를 비치해두는 친절까지 베풀고 있다.
▼ 14 : 45.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사거리(이정표 : 천문대 130m/ 추화산성 760m/ 좌우는 아리랑고갯길)가 나온다.
▼ 이곳에는 출향인들을 위한 ‘쓰리랑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고향을 떠나있는 출향인들에게 고향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 숲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 산수유, 산사나무, 매화나무 등 심어놓은 나무들마다 기증한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이 일일이 표시되어 있었다.
▼ 건너편에는 ‘밀양아리랑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월남전참전비(사진)과 충혼탑도 세워져 있단다. 하지만 정규탐방로에 벗어나있어 들러보지는 않았다.
▼ 14 : 52. 여섯 번째 스탬프보관함이 설치된 ‘밀양아리랑 우주천문대’. 국내 최초로 ‘외계 행성·생명’이라는 특화된 주제의 과학 체험공간으로 조성되었으며, 관측실·천체투영관·전시체험실 등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4층 주관측실에서는 세계 최초 음성인식 제어시스템이 설치된 70cm 구경의 고성능 망원경 ‘별이’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 14 : 56. 천문대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간다. 이때 밀양성당을 스치듯 지나간다.
▼ 14 : 58. 오른쪽에는 밀양시립박물관이 있었다. 밀양시립박물관은 1974년 ‘밀양군립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고고학 전문박물관으로 되었고, 2008년에는 이곳 교동으로 이전·개관했다. 상설전시실(역사실·민속실·유학실·서화실)과 화석전시관, 독립기념관 등을 거느리고 있다.
▼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된 광장을 지나자 ‘박물관’이 반긴다. 삼한시대(변한) 미리미동국으로 불린 이래 오늘날 밀양시에 이르기까지 밀양지역의 풍성한 역사·문화 사료를 담고 있는 곳이다. 밀양아리랑 같은 민속놀이뿐 아니라 밀양의 유학자, 선비의 사랑방, 조선시대의 서화와 같은 특색 있는 전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 밀양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영남지역 최초로 일어난 3·13 밀양 만세의거,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창단, 23회에 걸친 의열투쟁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쟁이 이곳 밀양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선지 박물관 안에 ‘독립운동기념관’을 별도로 두었는가 하면, 밀양시 출신 독립운동가 36인의 흉상이 둘러싸고 있는 조형물(선열의 불꽃 : 변건호 작품), 독립의열사숭모비, 파리장서비 등을 광장에 설치해 놓았다.
▼ 15 : 07.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밀양대공원로’. 밀양읍성을 향해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에 밀양향교와 손씨고가(孫氏古家)라는 문화재가 있으나, 약속된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참! 선답자의 GPX트랙도 두 문화재를 건너 뛴 채로 진행하고 있었다.
▼ 15 : 21. 15분쯤 걷다가 만난 로터리에서는 오른쪽 3시 방향이다. 이어서 ‘용평로’를 따라 ‘동문고개’로 올라간다.
▼ 15 : 26. ‘동문고개’. 고갯마루에는 밀양읍성(密陽邑城)의 동문이 들어섰다. 최근 복원된 동문은 크고도 견고한 것이 중국에서나 볼 법한 풍경이었다. 가히 난공불각의 요새라고나 할까?
▼ ‘2020 공공미술프로젝트’ 혜택을 본 밀양읍성은 갖가지 조형물들로 치장됐다. 참고로 ‘밀양읍성’은 성종 10년(1479년)에 축조됐다. 대부분의 읍성이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밀양읍성은 100년 이상 일찍 만들어졌다. 높이 4.2m에 둘레가 2.2km인 성곽은 옹성(甕城)·치성(雉城)·해자(垓子)까지 갖췄었다고 한다. 하지만 1902년 성문과 성벽이 헐려 경부선 철도부설 공사에 사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 15 : 29. 성곽으로 올라가는 진입로. 길섶의 ‘붉노랑상사화’가 꽃망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상사화는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빗대어 표현된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됐다. 꽃은 잎을 생각하고, 잎도 꽃을 생각하지만 서로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 성곽을 따를 경우 만나게 되는 무봉대(舞鳳臺). 길을 달리 들었기 때문에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 첨부된 지도(부산일보의 안내도도 같다)는 읍성의 성곽을 따라 ‘영남루’로 간다. 하지만 아리랑길 표식은 반대편(해발 88.1m의 ‘아동산’을 가운데 두고)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른 탓에 우리는 명소 몇 곳을 둘러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 15 : 35. 밀양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영남루’에 이른다. 누각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언덕에는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의 생가가 있었다.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유행가 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비단장사 왕서방’,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등 하나하나가 당대를 풍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그의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같은 노래를 지어 친일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 ‘영남루(嶺南樓 : ‘國寶’로 지정되어 있다)’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누각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꼽히는데, 신라 경덕왕(742년-765년) 때 신라 5대 명사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으로 세워졌다. 화재·전쟁으로 몇 차례 소실됐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하나 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넓고, 땅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마루를 만들어 누각 자체가 시원하고 웅장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누각의 다양한 현판들도 주요 볼거리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우러져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은 아름다운 누각)’, ‘고남명루(문경새재 이남의 이름 높은 누각)’ 등 하나같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명성을 찬양하는 것들이다.
▼ 누각 끝으로 발길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만큼이나 가슴도 확 트인다. 육지 속의 섬 ‘삼문동’과 이를 에돌아나가는 물줄기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그려낸다.
▼ 널따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에는 ‘천진궁(天眞宮)’이 들어서 있었다. 천진궁은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 시조들이 배향된 사당이다. 조선 효종 때 건립됐으며, 원래는 객사(공진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을 비롯한 역대 왕조를 세운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역할을 하고 있다.
▼ 단군(檀君)으로 여겨지는 신상(神像). 곁을 지키고 있는 빗돌은 ‘태상노군(太上老君). 칠원성군(七元星君), 삼신제왕(三神帝王)’이라 적었다. 우리네 시조가 이들의 직위를 겸한다는 얘기일까?
▼ 마당에서는 ‘밀양향토예술단’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밀양백중놀이, 무안용호놀이, 감내게줄당기기, 밀양법흥상원놀이, 작약산예수제 등 밀양의 무형유산을 매월 첫째·셋째 주 토요일에 번갈아가며 보여준단다.
▼ 영남루 근처에는 다른 문화재들도 여럿 있다. 천년고찰 무봉사(舞鳳寺)도 그중 하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다. 발품만 조금 더 팔면 아랑각(조선 명종때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전설의 주인공 아랑을 모신 사당)이나 밀양이 낳은 역사적 인물인 사명대사 유정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 15 : 52. 수변공원길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그런데 이 계단이 특이한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계단으로도 이용할 수 있고 지그재그로 걸으면 경사로로 이용할 수 있다. 휠체어나 자전거, 캐리어 등도 다닐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라고나 할까? 그래선지 위에서 내려다보면 심오함을 담은 조형작품을 연상시킨다.
▼ 15 : 54. ‘밀양교’를 건너 ‘삼문동(三門洞)’으로 간다. 서울로 치면 ‘여의도’이다. 오래 전 이곳 ‘삼문동’은 강 건너 ‘가곡동’과 붙어 반도모양 지형을 이루고 있었단다. 그러다 1920년대의 대홍수가 반도의 허리를 끊어버렸고, 저곳 삼문동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렸다.
▼ 영남루 앞, 밀양강의 둔치는 숫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그 앞으로 흘러가는 강물이 영남루를 두고 떠나는 것이 아쉬운지 흐르지 않고 멈추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라며 아리랑 소리를 자아내는 듯하다.
▼ 15 : 56. 다리 건너에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긴 이처럼 온전하게 영남루를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선지 글자조형물을 세워 포토죤까지 겸하도록 했다.
▼ 아까도 얘기했듯이 밀양강의 본류가 바뀌면서. 물길을 잃은 영남루의 풍치는 내세울 게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게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징검다리가 놓인 ‘보(湺)’다. 보를 막아 밀양강의 물을 가둠으로써 예전처럼 영남루 앞이 물로 넘실거리게 만든 것이다. 아무튼 물길 너머 영남루는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맞다. 저런 풍광이 있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명사가 찾아왔을 것이고, 그럴듯한 시들을 남겼을 것이다. 영남루에 걸린 수많은 시판(詩板)이 그 증거다. 당대 최고의 인플루언서들이 핫플레이스를 찾았다가 일종의 ‘리뷰’를 남긴 셈이다.
▼ 전망대 앞에서는 ‘밀양아리랑 아트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밀양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젊은 작가들이 임시 공방을 열고 있다. 일단은 체험을 해보고 마음에 들 경우 구입하면 된다는 얘기다.
▼ 15 : 58. 공방 몇 곳을 기웃거리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후부터는 밀양강 제방을 따라간다. 둑 위에 차도가 부럽지 않을 만큼 널찍하니 산책로가 나있다.
▼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던 밀양강 둔치가 언제부턴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바뀌었다.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 ‘삼문송림’으로 약 2ha에 이르는 면적에 수령이 100년도 넘는 곰솔 20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소나무 아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여름이면 맥문동, 가을이면 구절초가 만발한단다. 참고로 이곳 송림공원은 조선시대 말엽 고종 때 밀양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방수림으로 조성됐다.
▼ 16 : 10. 송림공원의 끄트머리에서 둔치로 내려서니 ‘이재금 시비’가 반긴다. 밀양 출신 이재금(1941-1997) 시인의 시 ‘도래재’가 적혀있다.
▼ 16 : 15. 보(湺) 위에 놓은 징검다리(뚜껑을 덮었으니 엄밀한 의미의 징검다리는 아니다)를 건너면 용두교유원지 주차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은 4시간 15분을 걸었다. 앱이 12.59km를 찍고 있으니 ‘추화산’을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라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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