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 그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 보는 젊은이에게 더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게 됐다는 뜻이라고 한다. 젊은이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것이 나이 든 사람의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
■ 나이 든다는 것의 의미
인간은 속절없이 나이 먹어… 빛나는 이데아처럼 영원한 현재에 머무를 수 없고 아름다운 순간도 멈출 수 없어
삶이란 개인 안에서 소멸하는 것 아니라…사랑하는 타인의 미래 속에서 새로운 생명 얻는 것
우리는 나이가 든다. 세월이 삶을 실컷 갈아먹은 뒤 긴 숨바꼭질 놀이를 끝내듯 마주친 너는, 어느 처연한 겨울 앞자락에 선 듯 한두 점 하얀 깃털을 머리카락에 얹은 채 축제일의 밤처럼 환했던 지난 시절의 거리들을 쓸쓸하게 만든다. 거기서 우리는 웃고, 즐거웠지. 약속들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무엇인가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지난 세월은 쏟아진 금화들처럼 흩어져 이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삶은 쇠락한다. 그러나 철학은 영원한 진리에만 몰두해서 그런지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즐기지 않는다.
인생은 아슬아슬하게 개울을 건너는 종이비행기처럼 유년에서 청년으로, 장년에서 노년으로 어떤 기적이 보호하듯 이어진다. 나이의 강이 흘러가며 하얗게 그려놓은 이 모든 시기의 모래톱들은 각기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기의 독자성을 철학이 다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키케로 같은 이가 노년의 처세를 명상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철학에는 젊은이의 철학과 나이 든 이의 철학이 따로 없다. 철학은 젊은이가 인식하는 것과 나이 든 이가 인식하는 것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이고, 하나인 진리에 대한 모범적인 인간 의식 역시 하나인 까닭이다. 요컨대 철학이 다루는 인간 의식에는 나이가 없다. 두시(杜詩)는 애절하게, 나이 든다는 것이 인간이 떠맡는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토로하지만 말이다. “온갖 고생에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아짐을 슬퍼하니, 늙고 초췌해져 이젠 흐린 술잔마저 멈추었네.”(‘등고(登高)’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 자신이 ‘현재’와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는 점점 나로부터 빠져나간 것이 돼버린다.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어라고 그리움에 잠기는 것.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됐어라고 후회에 빠져드는 것. 모두 ‘잃어버린 현재’에 대한 느낌들이다. 나이 든 자에게 현재는 ‘지나간 현재’다.
그러나 철학은 ‘지금의 현재’ 속에서 ‘나 자신’과 ‘참된 것’의 ‘일치’를 추구해 왔다. 가령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집 한 채가 있을 때 ‘집 한 채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참된 인식이다. 이 인식에서 한 채의 집은 ‘언제 어디에’ 있는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집 한 채가 있다’라는 말은 과거에 있었던 집, 어딘가 먼 우주에 있을 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집에 대한 진술(陳述)일 때 참이다. 즉 ‘참’이란, 현재 속에서 우리 의식과 대상이 일치할 때 달성된다. 여기서 인간 의식은 지나간 늙은 의식이 아니라, 나이를 모른 채 현재에 생생히 살아 있는 의식인 것이다.
플라톤에게서도 그렇다. 이데아를 인식하는 영혼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데아란 세상 모든 사물의 모범이고 원형이며 원인이다. 또한 이데아의 중요한 성격은 바로 ‘단순성’이 있다. 예컨대 아빠의 이데아가 있다고 해보자. ‘아빠’는 아들이나 딸과의 관계 속에서 아빠이며, 남성이라는 다른 개념과도 관계를 맺는다. 즉 ‘아빠’라는 개념은 홀로 성립할 수 없고 다른 항들과의 복합적 관계들 속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이데아로서 아빠’는 아들이나 딸과의 관계없이 그 자체 혼자서 이데아이다. 남성이나 가족 같은 개념들과 복합적으로 연결돼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빠의 이데아는 가장 ‘단순한 것’이다. 이데아가 늙지도 죽지도 않는 까닭, 영원불변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식으로 단순하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것은 복합물이 분해되는 것이지만, 단순한 것은 분해될 수 없기에 이데아는 변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늘 영원한 젊음을 누린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런 이데아를 인식하는 우리 영혼도 영원불변하다고 믿었다. 영혼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은 영혼이 이데아와 같은 종류의 것, 즉 이데아처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데아와 똑같이 영원불멸한다는 것이다. 영혼이란 지나가지 않는 ‘영원한 현재’ 안에서 이데아를 응시하고 있는 의식이다. 그 의식은 이데아를 닮아서 나이 먹을 줄 모른다.
철학에서 ‘현재’는 늘 이렇게 특권적이었다. 철학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인간들은 이런 이상적인 현재의 영원성, ‘늙지 않음’을 탐내왔다. 진리에 목마른 괴테의 파우스트가 탐내는 것 역시 이상적인 순간의 영원한 지속, 영원한 현재다. 파우스트는 이상적인 순간을 영원한 현재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정서웅 옮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시간을 잃어버린 인간(늙은 파우스트)을 유혹할 때 제안하는 것도 바로 ‘생생하고 충만한 현재’를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한 시간 내에 따분했던 한 해보다 더 많은 관능적 쾌락을 얻게 될 것입니다.” 관능으로 꽉 찬 한 시간의 충만한 현재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속절없이 나이를 먹는다. 저 빛나는 이데아처럼 영원한 현재 안에 머무를 수도 없고, 아름다운 한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멈출 수도 없다. 오디세우스가 여신에게 말하듯 여신은 영원한 현재 속에서 젊지만, 인간은 나이 든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생김새와 키에서 마주 보기에 그대만 못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녀는 필멸하는데 그대는 늙지도 죽지도 않으시니까요.”(천병희 옮김) 나이 드는 자는 결코 영원한 현재 속에서 불멸하는 이데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들면서 우리는, 놀라고 지친 여름이, 사그라든 9월의 정원을 바라보듯 점점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나이 든 자를 위한 위안이라 할 수 있는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의 한 소절에서처럼 말이다.
들뢰즈처럼 말하자면, 나이 드는 자는 소진된 자이다. 무엇이 소진되는가? 바로 그의 ‘가능성들’이 소진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능성이 하나둘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나이가 들면 못하게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당연하며 필연적이다.(가령 결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듯) 그러면 잃어버린 나이의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헤겔은 철학 자체를 지난 시간을 사색을 통해 되새김질해 되찾는 일로 이해한다. ‘법철학’의 한 구절이다. “이제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대해 한마디 덧붙여둔다면, 어쨌거나 철학은 이를 위해서는 항상 너무 늦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세계의 사상으로서의 철학은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종료해 확고한 모습을 갖추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시간 속에 나타난다.”(임석진 옮김) 이렇게 나이 들어서야 날개를 펼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눈으로 지나간 현재의 진상을 뒤늦게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헤겔이 말하듯 나이 든 이 철학적 올빼미의 눈을 통해서는 “생명의 형태는 젊음을 되찾지 못하고 다만 그 진상이 인식되는 데 그칠 뿐”이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지나간 세월의 진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 어디인가?
더 나아가 회상 속에서만 지나간 시절이 지녔던 젊음, 진정한 생명력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작가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가 그런데, 그는 헤겔과 달리 지성이 아니라 감각 속에서 과거를 되찾는다. 우리는 우연히 접하게 되는 향기나 맛 또는 어떤 분위기 속에서 플래시의 빛처럼 갑자기 비춰 드는 과거를 행복 속에 체험한다. 전혀 몰랐던 과거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는 기쁨이 찾아온다. 이런 비자발적인 기억의 체험을 한 후 프루스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됐다.”(김희영 옮김) 그래도 결국 우리는 나이 들고 죽는다면?
헤겔이나 프루스트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배운다는 것, 참답게 인식한다는 것은 회상하는 것이다. 헤겔에서처럼 지성이 파악하든 프루스트에서처럼 감성이 야기하는 비자발적인 기억을 통해서든 말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생을 반추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인간은 어리석은 자라서 늘 뒤늦게 세월의 마지막 옷자락을 가까스로 부여잡듯이 배운다.
그러나 회고가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회고와 깨달음이 삶을 정리해주지 못한다면? 회고 또한 계속된 방황에 불과하다면? 회상의 끝에서 인생의 깨달음보다는, 쇠락과 손에서 빠져나간 모든 것이 불러일으키는 애수만을 기록하고 있는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들에서처럼 말이다. 우리가 과거를 회고하며 참된 것에 대해 깨닫건 그러지 못하건, 인생을 완성하건 완성하지 못하건, 어쨌거나 우리는 나이가 든다. 나이 들며 가능성들을 하나둘 잃어버린다. 그러나 가능성을 지니는 자는 나 자신만이 아니다. 타인들, 단지 젊고 인생을 이제 시작하는 이들뿐 아니라 모든 타인은 저만의 사연만큼이나 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욕구를 지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제 타인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가능성은 타인의 가능성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친지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능성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 보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게 됐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미네르바의 올빼미’와 ‘방드르디’: 황혼에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해 쓰고 있는 헤겔의 ‘법철학’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회고 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되찾는 이야기를 해준다. 시간을 되찾는 또 다른 길도 있다. 투르니에의 ‘방드르디’에서 나이 든 주인공은 어린 고아 소년을 떠맡게 된다. 아이의 미래를 돌보게 됐을 때 놀랍게도 그는 다시 젊음을 체험하고 청춘의 갑옷을 되찾는다. 왜냐하면 삶이란 한 개인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타인의 미래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그가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류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