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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레키리시탄
'숨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탄압을 받은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신부가 1명도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인 길을 250년 동안 걸은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탄압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들어선 1873년(메이지 6년)에 가서야 사이고 다카모리가 금교령을 폐지하면서 풀렸다.
한국인 일문학자들은 잠복 키리시탄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1873년 이후에도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전의 신앙을 유지하는 신자는 카타가나를 써서 카쿠레키리시탄(カクレ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한다.
2. 발생: 일본의 천주교 박해
일본의 가톨릭은 센코쿠 시대 무렵 일본과 무역을 하던 스페인,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전래되었다. 센코쿠 시대의 다이묘들은 서양 세력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톨릭 전래를 허가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몇몇 다이묘는 스스로 가톨릭 신자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에도 시대 초기까지는 카쿠레키리시탄도 비교적 평범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이 세워지자, 히데요시는 각지의 다이묘들이 서양과의 무역으로 이득을 얻어 세력을 키워 자신에게 대항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그 첨병인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에 제약을 걸었다.
그리고 일부 광신도들이 불교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절을 습격해서 불상을 파괴하는 등의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한 뒤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치세에 금교령을 내리고, 가톨릭 신부들을 추방하거나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외국과 번이 독자적으로 무역하는 것을 막고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일본에서 가톨릭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계기는,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막부의 지배에 저항하여 대봉기를 일으켰던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은 지배자인 에도 막부에게 "가톨릭 신자는 곧 정권을 엎으려는 반란 분자"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후미에 같은 일을 벌여 가톨릭 신자를 걸러내서 죽이려 하는 등 철저한 박해를 가했다.
이렇게 박해를 받았음에도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 생명이 위험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장장 250년 동안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에도 막부는 그 존재를 몰랐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다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이들을 묵인했다. 법대로 하자면 다 처형해야 하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 수천 명 단위의 단체가 발각되면, 이들을 처형하면 제2의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그냥 사상범이라는 빠져나갈 수 있는 이름으로 부르며, 알면서도 모른 체했다. 당장 당대 유명 하이쿠 시인인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가운데 君が代や茂りの下の耶蘇仏. (천황 치세여. 우거진 수풀 아래. 기독교 불상) 라는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잇사가 큐슈를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성상을 보고 읊었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개항 이후 외국인에 한해 그리스도교 신앙 활동이 허가되었고, 나가사키에서 새로 세워진 오우라 천주당의 주임신부 프티 장 신부(Bernard-Thadée Petitjean.1829~1884)는 일부러 성가를 부르며 다니는 등 선교를 시도했으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절에 구경왔던 사람들 가운데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성당에서 성모상을 보게 되면서 그들이 모여살던 마을에 "프랑스 절에 성모님이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쿠레 키리시탄들은 당시로부터 250여년 전 순교한 바스챤이 예언한 '7대가 지나면 흑선을 타고 파파(교황)가 보낸 콘페소르(고해신부)가 온다. 매주라도 콘삐산(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 어디서라도 큰소리로 기리시탄의 노래를 부르며 걷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 길에서 젠쵸(외교인)를 만나면 그가 길을 양보한다'라는 예언의 전승을 갖고 있었고, 이에 예언이 실현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1865년 3월 17일 금요일, 산파인 이사벨라 유리의 가족과 동네 사람 13~15명(물론 전원 카쿠레키리시탄)이 구경을 핑계삼아 오더니, 기도하고 있던 프티 장 신부에게 "성모님을 공경하십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 "전례력을 지키십니까?"를 질문하였다. 이에 프티 장 신부는 "성모님을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키리시탄들은 그제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습니다"라고 속삭인 후 "サンタマリアの御像はどこ?(성모상은 어디에?)"라고 물었다. 이에 프티 장 신부가 안내해 주자, 그냥 구경 온 척하던 마을 사람 전원이 갑자기 몰려들어 기도를 했다고.
프랑스에서 온 이들이 가톨릭 사제란 것을 확신하면서 감추어 온 신앙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1865년 3월 17일의 이 사건은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로, '신자 발견'이라고 한다. 일본 외부에서는 이런 신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기에, 이들을 발견한 서양 신부들은 이를 기적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들이 처음 행적을 나타난 때가 아직 메이지 정부가 공식적으로 천주교 박해를 철폐하지 않았던 때라, 이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좁은 방 안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공식적인 고문은 하지 않았으나, 미어터지는 방 안에서 더위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거나 추운 곳에 유배보내 눈오는 바깥에 방치하는 식의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과정에서 여러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으며, 이 일로 당시 일본과 통상 중이던 서구 열강들이 일본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 때 일본은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는다. 그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서 박해받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그들이 종교를 버린다면 풀어줄 것이다."라고 말해 실질적으로 천주교 박해였음을 우회적으로 시인했다.
서양과의 교류를 희망하고 있었던 메이지 정부에게 있어 종교의 자유를 허하라는 서구 열강의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결국 메이지 헌법이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면서 대부분의 카쿠레키리시탄은 가톨릭으로 원복하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조상님의 종교는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들은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거부하고 카쿠레키리시탄으로 존재한다. 이런 자들을 하나레키리시탄(離れ切支丹, 떨어져 나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현재는 모든 카쿠레키리시탄(의 자손)은 가톨릭으로 복귀했고, 하나레키리시탄은 1980년대까지 존재하다가 신자가 모두 죽자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1991년에 인류학 학자 크리스탈 웰란이 연구한 끝에 나가사키 현 고토 시에 아직 존재하는 것을 확인했다. 고토시가 워낙 외진 섬이라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신앙을 유지해오고 있었던 만큼, 다른 오지에서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에 복귀할 뜻이 없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나, 젊은 층의 이탈로 미래는 밝지 않다.
당초 전교를 했던 외국인 성직자들은 박해를 받아 전멸해 버렸고, 일본 가톨릭교회는 스스로 성직자를 양성해낼 정도로 성숙한 단계는 아니었다. 시마바라의 난의 지도자인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도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평신도였다. 게다가 포르투갈과의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고,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와는 선교불허를 조건으로 제한된 무역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줄 성직자를 모셔오기는커녕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과도 전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숨어서 살아남은 신자들은 전례를 집전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이끌어줄 성직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구전 전승만으로 종교를 유지해야 했다. 사소한 성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경 내용도 온전히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 남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구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25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상당히 다른 종교가 되어버렸다. 초기 일본 가톨릭의 지도자들은 박해 때문에 완전히 성직자가 사라지고 평신도들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몇 가지 교육자료를 남기고 신자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자료들은 향후 카쿠레키리시단이 250년간 버티는 마지막 신앙적 근거가 되었다.
큰 특징으로는 쵸우가타(翁方)라는 원로격 우두머리의 아래로 비밀 조직을 유지하며 주문 등을 전파하는 밀교적인 특성을 지녔으며,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각종 상징물에 몰래 종교적인 뜻을 담았다. 특히 불교로 많이 위장하였으며, 불상에 불경으로 위장하여 그리스도교적인 문구를 집어넣거나 마경과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이것은 성모 마리아상이다. 자세히 보면 가슴에 십자가 무늬가 있다. 성모상을 불상으로 위장한 것으로, 흔히 마리아 관음이라고 한다. 심지어 '삼존불' 형식인 성상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일본에서 원래 모양의 성모상을 모셨다가는 "나는 키리시탄이요." 하고 자백하는 셈이라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
일본 26위 성인 기념관에는 아래와 같은 마리아 관음도 있다.
사실 이것은 가톨릭의 시각으로 보아도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모상이 현지화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광화문에 설치된 제대 옆에도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 모셨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이 탄생하기 거의 천 년 전에 아시아에 와서 기독교를 전래한 경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서는 '마리아 관음상'뿐만 아니라 '마리아 관음도'나 '예수 미륵도' 등 불화를 기반으로 한 '성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들이 외우던 기도문을 오라쇼(라틴어: oratio)라고 하는데, 당시까지 전래되었던 라틴어 기도문을 음차하여 염불처럼 음률을 붙인 형태를 띠고 있다. 당연히 뜻은 제대로 모르고 그냥 소리나는 대로 외웠는데, 예를 들어 성체를 의미하는 "Eucharistia"(에우카리스치아)는 구전되면서 "요우카시치"로 바뀌고, 다시 "요우가노시치"로 바뀌었다가, 또 "요우가시치야"로 바뀌더니 이두식 한자를 써서 "八日の七夜"(요우카노시치야, 요우카=八日, 시치야=七夜)가 되어 본래의 의미가 전혀 없어져 버렸다.
이들 오라쇼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며, 현재는 일본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카쿠레키리시탄들을 두고 한 가지 고민을 했다.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세례를 줄 때 사용하는 라틴어 기도문도 역시 입에서 입으로 전수하여 공동체의 장로가 세례를 베푸는 식으로 전승하였다. 그런데 구전하는 동안 라틴어 기도문의 발음이 바뀌었으니, 도대체 어디까지를 천주교 기준으로 유효한 세례라고 인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인 성직자들은 세례 기도문을 확인하여 라틴어 발음이 정말 심각하게 변형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카쿠레키리시탄들이 받은 세례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성경의 내용은 두루뭉술하게 옛날 이야기처럼 구전되었다. 전승도 달라졌는데, 서양의 선악 대결 중심 세계관과 달리 동양의 융합과 용서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낙원을 내쫓긴 사건이 사라졌고,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원죄도 사라져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참조)
카쿠레키리시탄들은 자신들의 신앙대상을 데우스 사마(님)라고 불렀다.
가장 굳건해보이는 종교 문화조차도 철저한 탄압 아래에서는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뒤틀릴 수 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을 유지하려는 경탄스러운 인간 의지를 볼 수 있다.
4.1. 교리
소토메, 고토, 나가사키의 천지시지사(天地始之事)에는 기본적인 성서의 내용도 있지만, 아담의 자녀인 치코로우(ちころう)와 탄호우(たんほう)는 남매인데 결혼하여 자녀를 보았다고 하는 등, 일본 전통의 이자나기, 이자나미 설화가 혼합된 모습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