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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묵상글 (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 사람이 사람에게 . 등 )
* 김찬선 신부님 : 아직 / 05:30 추가
* 조명언 신부님 : 아직 / 06: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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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사람에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8)
오만한 눈길 애써 피하는
보잘것없는 이들이
눈여겨보는 이에게
빈껍데기 격한 소음에
목소리 묻힌 이들이
들어주는 이에게
거친 손길 틈바구니에서
상처투성인 이들이
부드러운 이에게
게걸들린 탐욕에 빼앗겨
맨몸뚱이 남은 이들이
보듬어주는 이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몸서리치는 이들이
너그러운 이에게
더러운 차별 혐오 배척에
주눅 들린 이들이
다독이는 이에게
끝없는 경쟁의 사슬에 걸려
지쳐 쓰러진 이들이
일으켜주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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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3 05:26
- 나도 사제?
언젠가 한 번 얘기 드린 적이 있는데 무술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실은 이제 그 세계를 청산하고 세례받고 싶다며 찾아오신 분입니다.
얘기 중에 정신이 맑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욕심이 들어오게 되면
점을 칠 수가 없어서 욕심을 끊임없이 비워내는 수양을 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신무 곧 신내림을 받은 무당은 단골을 위해 굿을 할 때
먼저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해야 접신을 할 수 있고
접신(接神)의 표시로 작두까지 탈 수 있다고 합니다.
무당도 보통 때는 한 인간이고 가정이 있으며 그래서 욕망이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비워내지 못하고 그래서 접신을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요.
사실 무당이 작두 타기 전에 강렬한 음악과 격렬한 춤을 추며 굿을 하는 것도
그런 음악과 춤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아무리 무술인이고 무당일지라도 이러해야 마땅한데
그런데 이번에 우리나라를 뒤집어놓은 사람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고,
무술을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았고 그래서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술인뿐 아니라 목사라는 인간도 한몫하고 있는데
다 자기들 욕망을 실현한다는 면에서 한통속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목사라고 할 수도 없는 욕망의 개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우리의 대사제는 욕망의 개들과 당연히 다르십니다.
욕망의 개들은 우리를 자기들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삼음으로써 공멸케 하지만
우리 대사제는 당신을 통해 우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휩쓸리지 않는다는,
또는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런 우리의 대사제를 대신한다고 하는 저를 성찰하고 반성합니다.
나도 욕망의 개는 아닌지.
나는 진정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인도자이고 중개자인지.
사람들을 내 욕망의 도구로 삼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지 않고 내게로 오게 하는 사람은 아닌지.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여러분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주님의 왕직과 예언직과 사제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자신에 대해 자문하고 반성해야겠습니다.
나도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요 인도자라는 인식이 있는지.
거룩하고 순결한 인도자이고 욕망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 중개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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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1.23 06:31
“어휴~ 귀찮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청소, 설거지…. 또 있습니다. 몸이 피곤한데 어디를 가야 하고, 원하지 않는 만남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못할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냥 귀찮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 귀찮음을 그냥 인정하고 하지 않으면 후회도 같이 오기도 합니다.
귀찮다고 청소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됩니다. 귀찮다고 친구의 약속을 뒤로 미룬다면 친구와의 간격이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기도를 귀찮다고 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주님과의 간격이 멀어지면서 후회하게 됩니다. 따라서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의 단어를 포함해 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말이지요.
“어휴~ 귀찮아!!”, “하자!!”
“어휴~ 귀찮아!!”라는 말 다음에 “하지 말자.”, “그만두자.”라는 말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좋아하는 일만 한다고 과연 행복할까요? 자기 삶 안에 좋아하는 일보다 싫은 일이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에 “하자”라는 말을 붙여서 행동할 때, 자기의 변화와 함께 좋아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 않을 때는 그냥 하기 싫은 일, 귀찮은 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어휴~ 귀찮아!! 하자!!”라는 말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가능성은 훨씬 커집니다. 하느님과의 간격이 좁아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또 더러운 영을 쫓아낸다는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전역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몰려듭니다. 그만큼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보게 되었고,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끝까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또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도 그러했습니다. 병의 치유를 위해, 자기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기 위해 그 자리를 왔던 사람은 믿음이 없기에 진정으로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주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때로는 귀찮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가장 커다란 선물인 구원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또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야 주님과 제대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귀찮고 힘들어도 우리는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자!!”라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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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감사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인생에서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다(에이미 밴더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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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그것은 주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당신의 신원을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알고 바라고 믿고 있는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곧 자신이 온전히 비워지고서야,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내어주신 그분을 보고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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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요즘 광화문이나 국회의사당, 구치소 앞에 모이는 성향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유명세나 인기를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였고 특별히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하루살이 스타가 되지 말고 하느님 사랑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실행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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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31일입니다. 본당에서는 ‘송년 미사’를 준비했습니다. 2024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에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본당의 행사를 정리해서 영상으로 보여드렸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송별 미사와 후임 신부의 환영 미사가 있었습니다. 부활절,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의 캠프와 피정이 있었습니다. 27기 사목회의 임명장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26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장을 드렸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찬양의 밤이 있었습니다. 대건회 어르신들의 야유회가 있었습니다. 꾸르실료 봉사자들의 소풍이 있었습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걷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자선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성탄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2024년을 보내고,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이 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으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열병을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웃들이 지붕을 뚫고서 데려온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 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로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02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위로하면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 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 우리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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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후끈했던 태양이 꺾이며 저녁 어스름에 다다랐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작은 배 한 척에 오르셨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셨는데 점점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람도 그 방향을 바꾸어 호수에서 육지 쪽으로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배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더 선명하게 들리기에 주님께서 배 위에 오르신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봅니다. 열에 시달리는 사람, 들것에 실려 온 사람, 절뚝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 등등. 수많은 사람이 주님의 손길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주님을 보자마자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외치며 온몸을 떠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그들 모두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나는 지금 배 위에 서 계신 주님 앞에서 그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처 많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 주님 앞에 우리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기도와 소원을 봉헌합니다. 누군가는 치유를 위해 누군가는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성체와 성혈로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장면이 매 미사 중에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치유와 위로 또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어떤 사람은 눈물로 주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오늘 복음이 주님 시대에만 있었던 일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심을 기억하세요.
⭐같은 사람, 다른 그림
그림 그리기를 배운 지 이제 2년이 되어갑니다.
처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느끼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요즘 저는 과달루페 성모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그리는 과달루페 성모님은 세 번째 과달루페 성모님입니다.
분명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붓과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그때마다 그림은 다르게 나옵니다.
모든 것이 같아도 그중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 다르고, 숙련도가 다르고, 그날 그날의 컨디션도 달랐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매일 같은 하루를 살아도 그 하루의 모습이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르고 숙련도가 다르고 그날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다르다고 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르면 다른 데로 완성하면 됩니다.
그래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 탄생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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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올바른 삶
“분별의 지혜; 거리두기”
위대한 지도자는 당대보다도 후대에 평가받기 마련입니다. 그분들의 생애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됩니다.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결핍된 보는 눈을 잃은 지식인들이 필히 읽어야 할 책입니다. 정말 그 좋은 두뇌에 많은 지식을 지닌 이들의 눈먼 현실인식을 보면 참으로 답답합니다. 맹신과 광신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시 묻게되는 질문입니다. 상식과 이성, 진실과 양심, 공정과 정의, 배려와 존중, 균형과 지혜, 예의와 평화등은 좌우, 진보와 보수 이전에 기본적으로 공유해야 할 덕목이겠습니다. 다산 현자의 말씀도 공감이 갑니다.
“존경받는 선비들은 공부의 쓸모를 묻는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대답했다.”
“가장 경박한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일을 쓸데 없다 하고, 책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낡아빠진 이야기라고 한다.”
선생은 많아도 어른은 만나기 힘든 시대요, 삶의 스승, 삶의 지혜가 참으로 목마른 시대입니다. 수행이 결여된 시대, 참된 수행의 훈련과 습관화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다 읽었습니다. 근현대사를 공부한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을 거울같이 비춰볼수 있는 참 유익하고 감동적인 내용들 가득한 책입니다. 평생 수시로 읽고 싶은 책입니다. 감히 말하건데 지금은 좌우 모두에게 존경받고 인정받는, 학자군주이자 백성을 참으로 사랑했던 세종, 정조이후 최고의 지도자라 칭하고 싶습니다. 두 사례만 인용합니다.
“문; 후배 정치인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덕목은?”
“답; 첫째, 정치인은 ‘서생적 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함께 지녀야 합니다. 둘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정치하는 데는 원칙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좌표를 잃고 권력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됩니다.
둘째, 정치인은 국민의 반보(半步) 앞에서 국민과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비전을 실천함에 있어서 항상 국민과 함께 가야 합니다.-
“문; 수많은 고통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이겨내실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답; 첫째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바르게 인도해주실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둘째, 나를 믿고 따르는 나의 가족과 동지들, 그리고 수많은 국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들고 흔들릴 때마다 이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가졌습니다.
셋째, 역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했는데요. 역사를 보면 정의롭고 바른 일을 한 사람들이 당대에는 희생당하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결국 재평가받아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비단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삶에 좋은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조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하느님 중심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그 결정적 모범이 후대에 위대한 새계약의 대사제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이 참 좋은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새계약의 중재자이신 대사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입니다.”
이래서 감사하게도 날마다 대사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하느님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착한목자로서 최선을 다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로 하느님은 예수님을 새계약의 중재자인 대사제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착한목자로서 참으로 분주했던 전형적인 하루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질시하고 배척했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대다수 가난하고 병들었던 민초들은 갈릴래아는 물론 인근 곳곳에서 치유자이자 구마자이신, 착한목자 예수님을 찾아 구름처럼 모여듭니다.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절망에서 희망을 찾듯이, 치유의 구원을 찾아 착한목자 예수님을 찾습니다. 죄인들과 떨어져 계신 주님으로 묘사하듯 민초들과 함께 하되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심 또한 예수님의 기막힌 분별의 지혜이자 삶의 지혜였습니다.
당신을 밀쳐대는 군중 사이에 불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여 거리를 두십니다. 바로 이 거리가 서로를 지켜 주며 절제와 침묵, 인내에로, 기도에로 이끕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거리, 지혜의 거리, 구원의 거리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리한 감각으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나 주님은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예수님이 극도로 경계했던바 눈먼 열심의 광신이요 맹신입니다. 오늘날 그대로 입증되는 현실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릴 때, 광신, 광증, 광풍, 광분, 광란, 광인 등 미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 경계했던바 중용과 절제를 잃은 바로 이런 열광의 광신자들이요 맹신의 극단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군중들이 착각하는 그런 영광의 메시아, 승리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그분의 기적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 안에서 완전히 계시됩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의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이, 파스카의 예수님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을 때, 비로소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광신이나 맹신이 아닌 온전한 믿음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다시 나누고 싶은 제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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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3,11)
사랑없는 악마의 고백
악마도 신자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 (침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똑같은 고백을 듣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봅니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이제까지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온 것은 모두 한때 순수한 행위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알맞은 행위입니다.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물음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물음입니다. 행복이 지식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행복이 사랑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행복이 지식과 사랑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에 훨씬 가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지식 속에도 사랑 속에도 있지 않습니다. 영혼 안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바로 이것으로부터 지식과 사랑이 비롯된다고 하겠습니다. 영혼의 기능들이 그렇듯이, 이것 자체는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이 무언가를 알게 된 사람이야말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그것은 이전도 이후도 가지지 않으며, 부차적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 속에서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러하시듯이 자신을 누랄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우리 자신을 여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가난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하느님은 존재이자 지적인 존재이며,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느님은 존재도 아니고 지적인 존재도 아니며 이러저러한 것을 알지 못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여의셨기에 전부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이해력을 여의고, 하느님이나 피조물이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라야 할 것입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든 일에 대하여 이해하려 하거나,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을 여윌 수 있을 것입니다.(31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빌라 노바 드 우렘의 병원
그리고 이전에 첫 번째 발현 때 참지 못하고 어머니께 다 말해 버렸을 때처럼 이번에도 루치아의 발 아래 엎디어 용서를 청했다.
명상가가 된 히야친따는 어느 날 루치아에게 말했다.
“나는 카베소의 은둔소에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어. 네가 고바 다 이리아에 가걸랑 날 위해 빌어 줘 . 나는 이제 그곳에 갈 수 없으니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의 양은 점점 많아져서 그녀 스스로가 몸을 굽혀 그릇에 받아 넣게 되었다.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그 고통을 소중하게 감추고 있었다. 히야친따는 하느님만 홀로 아시는 것이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더 효과적인 공로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 상처가 아픈 것이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엄마에게도. 그걸 아시면 엄마는 무척 슬퍼하셔.”
루치아는 히야친따의 고통을 오직 하느님과 성모님께만 말씀드릴 허가를 받았다. 그것도 단지 이 어린 순교자의 감를 사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는 길에 히야친따에게 들렸더니 병자는 기다리고 있었던 양 다음 말을 하였다.
“성당에 가서 성체의 예수님께 히야친따가 예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 많이많이 인사한다고 전해 줘.”(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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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외로운 이의 다정한 벗이 되길 /
박윤식 [big-llight] 250122. 19:52 ㅣNo.179497
미국의 유명연예인 지미 듀란테에게는 평생 못 잊을 추억이 있다나. 그는 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 요청을 받았다. 그는 너무 바빠 단 몇 분밖에 출연할 수 없었단다. 따라서 간단한 원맨쇼를 한 뒤에 바로 내려와도 좋다는 조건에 응했다. 물론 쇼 기획자는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무대에 세운다면 대성공이었다나. 공연이 있는 그날 무대에서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났다. 짤막한 원맨쇼를 끝내고도 그는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지미는 계속 쇼를 진행했다. 이를 무대 뒤에서 바라보던 기획자는 매우 흡족하였지만, 한 편으로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을 무척 궁금히 여겼다.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내려왔다. 기획자가 여쭈었다. “지미씨, 난 당신이 단 몇 분만 무대에 설 줄 알았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오?” 그가 대답했다. "나도 애초 그럴 계획이었소. 하지만 계속 진행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소. 저 맨 앞줄 두 사람 좀 보시오." 기획자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기에는 두 명의 참전 용사가 같이 앉아 있었는데, 둘 다 팔 한 쪽씩을 잃은 이었다. 한 사람은 오른쪽을, 또 한 사람은 왼쪽이었다. 나란히 앉은 그들은 남은 한쪽 팔을 서로 열심히 부딪쳐가면서 힘찬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인도의 데레사 수녀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세상에는 여러 고통이 있다. 거의 다 물리적이다. 그러나 가장 큰 고통은 외롭고, 사랑받지 못하고, 옆에 아무도 없는 소외감이다.” 그렇다. 아무도 다가가길 원치 않는 가장 소외된 이를 찾는 것은 분명 신앙인의 몫일 게다. 예수님께서는 유독 그런 이를 체험이나 하듯, 그들을 반기셨다. 그래서 큰 무리가 언제나 그분 곁을 맴돌았다. 갈릴래아만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사는 온 지방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사람들이 유다 지방 전역과 예루살렘에서만 모여들었지만.
그렇게 여러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몰려왔다. 그것은 그분께서 평소에 많은 이의 병을 고쳐 주셨기에. 그리고 모인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 당시는 이동 수단도 그리 없었는데 예수님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럴수록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셨다. 왜 그러신 걸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이 하늘의 목소리를 통해 계시되고, 또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등 그리스도교적 신앙으로 고백되지만 아직은 이 비밀이 누설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예수님과 마귀의 대결이 공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로써 예수님의 특별한 권능이 밝혀지지만, 그 뜻이 밝혀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이르다는 것이다. 당장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께 몰려든 이 많은 군중의 믿음은 마치 모래 위의 집과도 같다. 그렇다. 그들은 우선 눈앞의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을 찾는다. 단지 이는 지금의 그 어려움이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기에.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럴수록 손수 그들을 고치시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에게서 악령을 몰아내셨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러대었는데도. 그렇게 그분께서는 기꺼이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시며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다. 지금 우리 곁에도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이 모여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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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그동안의 예수님의 구마와 치유 기적, 용서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십니다.
그러자 가까이 갈릴래아 지역을 비롯하여 사방에서 큰 무리가 몰려옵니다.
남쪽으로는 유다와 이두매아 지역에서, 동쪽으로는 요르단 건너편에서, 그리고 북쪽으로는 티로와 시돈 근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무리를 지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열광적으로 구하는 것은 치유이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앎)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하고 소리 질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하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특징인 ‘메시아 비밀’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다만 인지(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과 추종의 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열광하는 군중이 아닌, 당신을 뒤따를 제자들을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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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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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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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 12)
사람들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말을 앞세워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중들 위에
군림하길
결코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건강성은
떠벌리는
수많은 말들이
아니라
내적으로
깨어나는
건강성의
회복입니다.
공허한
구호나 말들은
사라지지만
깨어나는
우리의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공허한 말들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할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자극적인
기적에만
우리가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참 뜻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용기있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실천할 수
있는 기도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본래의 뜻을
가리는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절대절명의
보편적 사명을
우리의 혀(舌)가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혀도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함께 머물러야
삶이 보이고
겸손해집니다.
마음의 무게가
믿음이며
믿음의 무게가
우리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말이 마음을
앞질러
가지 않는 것이
신앙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말들을
경계하는
기도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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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교회는 힘겹게 살아가는 양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지?
피정 오신 자매님들 통해서 요즘 대세인 몇몇 트로트 가수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가수들께서 이런저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한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교회가 주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을 그분들이 대신 주고 계시니...
막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해보니, 요즘 대세 트로트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셨습니다.
요즘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동체의 신명나는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세사의 주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군중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위로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 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치유 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 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 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 없이 마시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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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7-12: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같은 고백이지만, 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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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다와 같은 주님: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은총을 주시면서도 군중과 거리를 두십니다.
군중들이 당신을 밀치는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은총을 받는 이가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은총이 독이 됩니다.
질서를 알게 하는 차원에서 은총을 받는 이에게 휘둘리면 안 됩니다.
한서진은 ‘SKY 캐슬’에서 사회적 압박과 개인적인 불안에 압도된 부모의 전형을 보여주며,
강예서에게 특히나 약한 어머니로 묘사됩니다. 그녀는 도축장 옆에서 부산물을 팔며 등록금 내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딸 둘만 낳아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부잣집 가문 며느립니다.
그녀에게 공부 잘하는 예서는 그녀 자신이 그 가문에서 인정받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과도한 성공 욕구와 건강한 경계를 세우지 못하는 태도는 예서가 특권 의식과 공감 부족을 키우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서진은 예서의 인격 형성보다 외형과 사회적 인정을 우선시합니다.
서진은 예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모든 걸 다 했다.
넌 꼭 성공해야 해.”
이는 성공이 행복과 가치의 기준이라고 믿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며, 그녀 자신의 해결되지 않은 불안감을 예서에게 투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서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는 서진의 태도는 결과가 도덕성보다
중요하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서는 이를 내면화하고 어머니의 죄책감과 욕망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며,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서진이 예서의 이기적인 행동에 도전하거나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 것은 예서가 윤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정당화하고, 성공이 모든 잘못을 용서받게 한다고 믿게 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서진이 예서의 왜곡된 가치관 형성에 자신의 책임을 마주하는 장면에서
나타납니다.
강예서는 엄마의 유전자가 자신의 몸속에 있다는 것을 한탄합니다.
그러자 한서진은 고백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널 행복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들어버렸구나.” 이 고백은 어머니로서의 그녀의 약점—방임과 잘못된 우선순위—이 예서의 특권 의식과 도덕적 실명을 부채질했음을 강조합니다.
이 사례는 부모와 교육자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경계를 설정하고, 자녀의 성취보다 인격을 우선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도라 하더라도 관계가 깨지고 자녀의 성격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겸손을 가르쳤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녀의 꿈에 이용당한 엄마는 그 많은 고생에도 자신을 원망하는 딸만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자녀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부모란 자녀가 부모를 존중할 수 없게 키운 부모입니다.
자녀가 나빠지는 이유는 불안과 교만 때문입니다. 불안은 다정함으로, 교만은 단호함으로 꺾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정하며 동시에 단호할 수 있을까요?
유튜브에 ‘전 세계 화제가 된 리트리버의 새끼 훈육법’이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8주 된 강아지들이 한 방에 모여있습니다.
잠시 후, 어미견 로잘리가 들어옵니다.
강아지들은 어미를 향해 달려듭니다.
하지만 어미는 오늘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것’을 가르쳐줄 참입니다.
젖을 떼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어미는 으르렁대며 단호하게 아이들을 떼어냅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겁을 먹습니다.
이제 어미는 새끼들을 다시 핥아줍니다.
그리고 훈육은 끝났습니다.
이것을 보면 느껴지는 것은 ‘다정하지만, 단호하다.’입니다.
자연 안에서 이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바다’일 것입니다. 바다는 다정합니다.
해변에서 놀도록 얕은 파도를 보내주고, 배가 고프면 맛보라고 맛있는 물고기도 줍니다.
그러나 물고기를 새끼까지 깡그리 잡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바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지구 온도 조절이 안 돼서 인간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는 단호할 때도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와 해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만듭니다.
무한한 보물을 가지고 언제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에 의해 휘둘리지 않기 위해 단호할 땐 단호해집니다.
인간은 바다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그래서 바닷사람들은 바다에 나가기 전 각자가 믿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말하는듯합니다.
“어, 와서 놀아! 얼마든지 내어줄게. 근데 까불면 죽는다~!”
하느님도 우리 안에서 이와 같으십니다.
무한한 바다와 같은 사랑을 지니셨지만, 동시에 인간과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이는 인간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이 바다에 빠지면 살 수 없는 것처럼, 바다를 무시하지 않게 해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은총을 주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런 교만이 생기면 손해는 인간이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과 거리를 두시는 것입니다.
‘이빨 보이던 댕댕이가 한순간 얌전해진 까닭’이라는 유튜브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발 닦는 것을 싫어하는 댕댕이는 주인이 발을 닦아줄 때 으르렁거립니다.
주인은 몇 번을 참아주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립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용해지고 심지어 웃는 표정까지 짓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개에게 계속 은혜만 주면 그 은혜가 개를 망칠 뿐입니다.
다정함과 함께 단호함은 꼭 필요합니다.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이것이 은총을 주는 이의 자세입니다.
사제가 그래야 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그래야 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자기 안에 바다를 품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며 다정하지 않을 수 없고 단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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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거리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7-12).”
1) 뒤의 5장을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는 생각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는 말이 있고(마르 5,25-29), 또 6장에는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에(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옷’이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증언입니다.
만일에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의 자비나 예수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옷’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예수님은 믿지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만일에 주님은 안 믿고, 바오로 사도의 수건이나 앞치마만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군중에 대해서 ‘거리두기’를 실행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 주셨고, 병을 고쳐 달라는 그들의 간청을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들었고, 너무 질서가 없었습니다.
그 상황은 무척이나 소란스럽고 무질서했고,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고 서로 밀쳐 대는 상황이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서로 밀쳐 대는 것도 문제인데, 그게 지나쳐서 예수님을 밀쳐 대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나타내고, 또 ‘몸의 치유만’ 원하면서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그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또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거리두기’를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청하려고 주님을 찾을 때,
우리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은 버려야 하고,
눈앞의 급한 사정만 생각하면서 영혼의 구원은 외면하는 기복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기심과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것, 또 기복신앙과 미신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우리 스스로 실행해야 할 ‘거리두기’입니다.
그 ‘거리두기’는 잘못된 신심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는 척 하지 말라고 마귀들에게 엄하게 명령하셨다.”입니다.
마귀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소리 지른 것은, 결코 신앙고백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는 나쁜 의도로 한 일입니다.
<마귀들의 말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들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든 방해하기만 하는 것들이고, 그것들이 하는 말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의 입을 아예 막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사도 16,16-18).”
이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은 ‘마귀’이고, 그것은 사도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려는 나쁜 의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의도가 악하면, 그 말은 ‘선한 증언’이 아니라
‘악한 말’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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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3,7-12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다들 기억하실 것입니다.그 중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액받이 무녀였던 월은 왕인 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도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슬퍼져서 조용히 궁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훤은 충격을 받아 월을 불러들이고는 큰 소리로 호통을 칩니다.
"누가 너에게 마음대로 떠나라 허했느냐? 누구의 허락을 받고 떠나는거냐?"
"소임을 다했기에 물러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가 소임을 다했다 하느냐? 내 심중에 자리한 고통과 고단함을 덜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전하께 필요한 사람은 소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인은 그분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명한 것은 전하십니다."
“멀어지라 명한 적도 없다! 네 말이 옳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가 그 아이인지 그저 너인지 나는 혼란스럽다. 허니 내가 이 혼란을 잠재울 때까지, 이 감정이 뭔지 알게 될 때까지 감히 내 옆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
처음에 이 장면을 봤을 때에는 훤의 심리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지도 말고, 애매한 거리에서 모호한 상태로 있으라니...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썸만 타고 있으라"는 것인데 그것은 감정적으로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훤이 너무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수많은 군중들을 멀리하시는 모습을 보입니다. 목자 없는 고통에 신음하는 군중들,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 더러운 영에 시달리던 사람들... 당신이 그토록 측은하게 여기고 사랑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손 잡아 주시고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랬던 분이 왜 갑자기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들이 귀찮아져서 그들과 함께 엮이는 것이 너무 피곤해져서 일부러 피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무리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도 쉽게 변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당신이 하시는 일 자체에 회의를 느끼셨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병에서 낫고자 하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막무가내로 그분께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보지도 않았지요. 마치 아들 낳기를 원하는 여인이 자기 마음대로 돌하르방의 코를 떼어가는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군중들이 그런 상태였기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은 또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더러운 영'들처럼 예수님을 멀리 밀어낸 채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살면 하느님의 뜻에서 완전히 멀어진 채 절망과 어둠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당신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당신을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과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바라는 것을 무조건 주님께 강요하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을 믿고 바라며 희망하되, 무작정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그분께 달려들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며 그분과 멀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걱정하시며 아껴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내가 그분께 바라는 것이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과 일치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주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다면 한 걸음 다가가고, 그분께 너무 밀착되어 있다면 한 발 물러나서 조금은 과했던 나의 마음을 진정시켰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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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구약의 대사제와 그리스도와 비교를 합니다.
구약의 대사제는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매번 제사를 바치는 것이 대사제의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단 한 차례 바치는 것이지만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사제로 하느님께로 사람들을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하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 저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히브 7, 27)
주님께서는 호숫가에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큰 무리가 몰려들어 서로 밀쳐대며 예수님께 다가왔는데 그들은 병고에 시달리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로 주님께 다가가 손을 대려했습니다. 그래서 거룻배를 마련하여
땅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군중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들은 주님을 보기만 하면 엎드려 예수님의 신원을 폭로하며 소리를
질러 댑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침묵을 지카라고 하십니다.
이 더러운 영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악의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악의 세력을 쫒아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악의 세력을 아예 없애시면 좋으시련만...
주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악령은 광야에서 주님을
유혹하고 악의 세력은 주님께 대한 반대와 배타적인 태도로 주님을 죽음까지
몰고 가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무력으로나 강제성을 갖고 대항하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것은 더러운 악령은 주님을 알아보지만 결국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훈을 얻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알고 있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더러운 악의 세력은 우리가 숭상하는 재물과 권력일 수
있고, 오늘날 오도되고 있는 성문화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극단으로 흐르는 이기주의
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은 악의 세력에 위협받고 유혹을 받더라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신 대사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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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 ♣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치유하며, 마귀를 쫓아내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십니다. 이에 대해 다양한 반응과 태도가 나타납니다. 이를 통하여 나 자신과 가족, 우리 사회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숙고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할 뿐 아니라 헤로데 사람들과 결탁하여 처치할 모의를 합니다(3,6). 이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 이권을 지키려 했고 그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악의와 살의를 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가르치기까지 했지만 실제는 하느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죽이려들었던 것입니다.
한편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구원과 해방의 선물을 받고 매우 놀라워하며 그 소식을 널리 퍼뜨립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을 피해 호숫가로 물러가셨는데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듭니다(3,7-8).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오는 군중을 피하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척을 준비하라고 명하십니다(3,9). 그분은 이 특별한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제자들과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인격과 일치되어 실제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삶을 통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한편 더러운 영은 탁월한 영적 감각으로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1,24)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3,11)을 알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더러운 영은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1,24) 하며 예수님과의 관계에 선을 긋습니다.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나 자신이나 가족, 우리 사회,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다양한 삶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활발히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교만형’, 현세적 이익을 찾으려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기복(祈福)형, 영적 직관력과 식별력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고 입으로 고백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몽사가형’ 등.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까? 말이 풍성하고 말씀마저도 넘치고 또 넘치는 ‘말씀의 홍수’ 시대에 하느님을 드러내고 그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증거가 더욱 절실합니다. 우리는 말보다는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머리로 깨닫고, 몸으로 체험하며, 입으로 고백하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 제자일 것입니다.
오늘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온 몸과 마음과 머리와 혼을 다해 하느님의 사랑을 삶으로 노래하는 찬미의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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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 8,4)
율법은 레위 가문에 사제 직무를 맡깁니다. 하느님이 그들의 유산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거룩함에 봉직하는 아론의 후예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따로 상속 재산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다 가문,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러나 인간 대사제들이 바치는 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대사제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십니다.
인간 대사제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히브 8,5). 반면 예수님은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히브 8,2)이십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6)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 군중이 몰려드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 들었다. ... 그분을 보기만 하면 ...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역동적인 광경이 펼져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변방으로 이동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중심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여전히 사제들이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며 예식을 거행합니다. 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관리하지요.
예수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 치유와 구마가 절실한 이들, 중심 기득권층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들이 모입니다. 주로 온도와 핏기 없이 형식과 제도로 이어가는 예식 안에서는 도무지 위로와 안식을 얻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배운 것도 적고 가진 것도 없는 투박하고 단순한 이들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 깊숙이까지 생생하게 침투하는 실질적인 구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곧 예식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이 곧 제사인 구원자 사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고 체험한 것이지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의 모상이고 그림자"라면, 예수님께서 계신 이곳이 곧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요 참성막"입니다. 진정한 희생제사와 예배, 찬미와 찬양이 이루어지는 영의 도가니가 기쁨과 희망과 찬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3,9)
군중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몰려드는 통에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군중과 예수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질서를 찾고 또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만, "배"는 곧 교회의 표상입니다.
교회는 심연을 헤치고 파도를 넘어 지상 순례길을 항해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한 희망"은 이 배를 단단히 고정해 항구인 "저 휘장 안"(히브 6,19)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영혼의 닻이지요.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성전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봅니다. 신앙의 주인은 저 멀리 하늘에서 온갖 권리를 행사하며 섬김만 받으시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곁으로 내려와 보살피고 회복시키는, 종래에는 그 고통을, 죽음까지도 떠안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신약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를 살면서도 두려우신 하느님은 그저 멀리 계셔야 편하다며 적당선에서 신자 신분만 유지하고 구약 율법에 안주하며 살지는 않은지요? 오늘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분을 만지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일어나며 가슴이 뛰는지요? 그분 곁에 머물고 싶어 간절히 종종걸음을 치는지요?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은 어디에서나 드러나고 발휘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 신자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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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3. 연중 제 2주간 목요일.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2025.1.23>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5:1~19절)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는 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 은혜로 합당한 자로 주어진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는 삶입니다(1~12절).
요단 강 서편 가나안 땅에 대하여 유다 지파가 가장 먼저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유다 지파의 기업의 경계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남쪽 경계는 에돔과 신 광야 그리고 사해의 남쪽 끝 하구에서부터 애굽 시내로 나아가는 강을 따라가다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1~4절)입니다. 동쪽 경계는 요단 강 하구, 사해 북단부터 남단까지(5a절)이고, 북쪽 경계는 요단 강의 하구와 사해 바다가 만나는 곳 해만에서 시작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와 예루살렘의 남쪽 어깨등을 포함해서 얍느엘을 지나 바다까지이며(5b~11절), 서쪽 경계는 지중해와 그 연안(12절)이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열두 지파 중에서 가나안 남쪽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유다지파는 열두 지파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고, 이동을 하거나 전쟁에 나아갈 때 가장 선두에 섰던 지파입니다. 또한 유다 지파는 다윗으로 시작된 남유다 왕조의 지파가 되었고, 궁극적으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파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자손이 되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영적으로 많은 복을 받은 지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도 남달라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답고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만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처럼 정복하기 힘든 요새도 있었고,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던 지중해 해변 평야 지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아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만큼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날마다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사역을 맡기십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당할 만한 복과 은혜를 지금 누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은혜의 합당한 자답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은혜를 바라는 자로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13~17절).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습니다. 갈렙은 팔십 오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전투를 벌여 아낙의 후손인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그 땅에서 쫓아냈습니다(13~14절). 그는 헤브론 인근 지역인 드빌로 올라가 그 지역을 정복했습니다(15절). 갈렙은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고,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 그 땅을 점령하여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습니다. 후에 옷니엘은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원하는 사사(삿 3:9~11)로 등장하게 됩니다.
갈렙은 더 넓고, 좋은 평야 지대를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강한 대적이 살고 있는 산지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갈렙의 정복 전쟁의 모습을 보면서 ‘거룩한 욕심’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에게 할당된 분량뿐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교만에서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거룩한 욕심’을 갖고 오늘도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은혜를 경험한 자로 축복을 나누는 퉁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18~19절).
갈렙의 딸 악사가 출가할 때, 아버지에게 복을 달라고 말하면서 네겝 땅으로 이주하는 자신에게 샘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네겝은 건조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물 공급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딸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약속을 쟁취했던 갈렙에게 그리고 복을 구하는 악사에게 풍성함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갈렙 역시 자신이 받아 누린 풍성함의 복을 맘껏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그리고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고, 누리는 일에만 관심을 쏟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와 복을 나누는 일에도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안내하고 전하는 구원의 통로 그리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큰 은혜를 받은 자답게 그 은혜에 합당한 자로 살기 위해 거룩한 모습으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적극적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고, 받은 은혜를 나누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기를(15: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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