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이 국가에 건 참정권 소송
1심은 졌지만 2심에서 승리
법원 “후보자 사진 있는 투표보조용구 제공하라”
발달장애인들 “너무 행복하다. 선관위는 판결대로 해라”
한 활동가가 발달장애인 공직선거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 승소를 기뻐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참정권 승리”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참정권 보장 소송 2심에서 드디어 발달장애인이 이겼습니다!
비록 그림투표용지는 도입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음 선거에서는 정당의 로고, 후보자의 사진이 들어간 투표보조용구를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투쟁해서 1심의 결과를 바꿔냈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은 12월 18일 오후 2시 3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며 환호했습니다.
기자회견 현장. 참가자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다. 현수막에는 “모두를 위한 그림투표용지 제공하라. 발달장애인의 공직선거 정보접근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판결 선고 기자회견”이라 적혀 있다. 사진 하민지
- 1심 지고 바로 항소, 발달장애인 70명 그림 탄원서 제출했다
소송은 정말 길었습니다. 작년 8월 16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날은 발달장애인들이 1심에서 진 날이었습니다. 더운 날씨 속에서 발달장애인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1심 판사는 “그림투표용지는 공직선거법에 없는 내용이라서 국가가 제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공직선거법을 바꾸는 건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이지 판사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공직선거법에 없는 지원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지체장애인에게는 입으로 물어서 투표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선관위는 그림투표용지에 대한 내용이 공직선거법에 없더라도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한다면요. 하지만 1심에선 발달장애인이 지고 말았습니다.
발달장애인들은 법원이 장애인을 차별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지난 10월 29일에는 발달장애인 70명이 그림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웃고 있다. 한 참가자는 “선관위 반성하라, 유권자 존중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2심 승소! 이제 투표할 때 정당 로고, 후보자 사진 제공받는다
발달장애인들이 노력한 결과 2심에서는 승소했습니다. ‘승소’는 ‘승리한 소송’이라는 뜻입니다. 2심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1심판결을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피고는 이 사건 판결 확정일부터 1년이 지난 날 이후 시행되는 공직선거(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원 및 지방단체장의 선거를 포함한다)에서 원고들이 요구할 경우 원고들에게 발달장애인 등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위한 투표보조용구(별지의 그림과 같이 정당의 로고나 후보자의 사진 등을 이용해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투표용지에 기재된 정당 이름, 후보자의 기호·이름 등을 알 수 있도록 돕는 기술을 말한다)를 제공하라.”
판사의 말 중 ‘피고’는 ‘대한민국’, ‘원고’는 ‘발달장애인’입니다. 판결 내용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국가는 1년 후 시행되는 선거부터 발달장애인에게 정당 로고나 후보자 사진을 이용한 투표보조용구를 제공하라.’
아쉽게도 그림투표용지는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심 판결은 ‘일부 승소’라고 부릅니다. 그래도 발달장애인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번 소송을 함께한 변호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마도 정당 로고, 후보자 사진은 시각장애인 점자투표용지처럼 제공될 것 같습니다. 시각장애인은 투표용지 위에 점자가 표기된 보조용구를 제공받습니다. 점자 위치에 정당 로고, 후보자 사진이 표기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관련 기사: TBS, 정당·후보 정보 없는 점자 투표용지…시각장애인이 투표하는 법)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미소를 짓고 있다. 김재왕 변호사는 “준엄한 판단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하민지
- 발달장애인들 “투표할 때 쉬운 정보 제공받게 돼 너무 행복”
발달장애인들은 2심 판결을 환영했습니다.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활동하는 소형민 활동가는 판결 직후 “베리 굿, 베리 나이스”라고 말했습니다.
법정에 앉아 계속 기도하던 김대범 활동가도 기쁨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김 활동가는 “대법원까지 안 가고 2심에서 끝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관위가 2심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 활동가는 “우리는 이제 대법원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 탄핵하러 헌법재판소에 가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남태준 활동가는 “나는 투표할 때 어려운 적은 없었지만 발달장애인들이 더 쉽게 투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서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박경인 활동가(오른쪽)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며 기뻐하고 있다. 수어통역사(왼쪽)는 박 활동가의 말을 통역하고 있다.
사진 하민지
박경인 활동가는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다가도 “선관위가 상고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어 “선관위는 (2심) 재판부의 결정을 따라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박 활동가는 또 “그동안 잘못한 사람만 법원에 가는 줄 알았다. 법원은 내 권리를 지키고 싶을 때 투쟁하러 가는 곳일 수도 있다는 걸 이 소송을 통해 알게 됐다”며 “투표는 이 사회에 내가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투표할 때 쉬운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게 돼서 너무 행복하다. 발달장애인들이 투표에 자꾸 참여해서 발달장애인 참정권을 더 잘 보장할 방법을 함께 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노호성 경기피플퍼스트 활동가는 “더 많은 발달장애인과 글자를 읽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마음 놓고 투표할 수 있길 바란다. 정부와 선관위는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고 국회는 조속히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사들도 승소를 기뻐했습니다. 정제형 변호사는 “2심 판결의 가장 큰 성과는 1심 재판부가 공직선거법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한 걸 뒤집고 국가가 발달장애인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인정했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 변호사는 또한 “앞으로 싸워야 할 일이 많다. 후보자에게 쉬운 형태의 선거공보물을 만들라고 꾸준히 요청해야 하고, 투표보조용구가 발달장애인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선관위와 계속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진영 변호사는 “법원은 오늘 헌법 제24조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는 기본 원칙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국민’에 발달장애인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선언했다”며 “앞으로 발달장애인은 직접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시작해 사회 곳곳에 멋진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사는 여기서 끝입니다. 2심 판결의 자세한 내용은 판결문이 나오면 살펴 보고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