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89
9월23일[피에트첼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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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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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kLrcTTtQwk
[서울대교구 이희천 프란치스코(중계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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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 그거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열심한 교우들 가운데, 기적이나 환시,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 뵐 때마다 꼭 말씀드립니다.
“그거 결코 좋은 것 아닙니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주 예외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런 현상을 허락하십니다만, 그로 인한 기쁨과 황홀함은 한순간 뿐입니다.
그 뒤로 남게 되는 것은 혹독한 고초와 오해, 편견과 십자가 길입니다. 그걸 묵묵히 감수해야만 하는 긴 여정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딱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사제가 된 지 1년이 지난 1911년 9월 7일부터 몸에 예수님의 오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구름처럼 비오 신부님에게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비오 신부님은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새벽 1시부터 몰려와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에게 발생한 특별한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은 관구는 1919년부터 의사의 진단을 받게 했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일 한 가지는, 안 그래도 오상으로 아프고 쓰려 죽겠는데, 의사들은 상처 위아래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상처 내부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비오 신부님은 천상의 비밀이 모독당하는 심한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1923년부터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편지에 대해서도 답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비오 신부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3천여 명의 신자들이 격렬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오 신부님은 다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고백성사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당국이 비오 신부님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미사와 고백성사뿐이었습니다. 비오 신부님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미사와 고백성사를 온갖 정성을 다해 집전했습니다.
1시간 넘게 지속되는 미사는 늘 감동으로 가득했습니다. 보통 사제들은 1분도 채 안 걸리는 거룩한 변화의 기도는 5분 이상 걸릴 때도 있었습니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진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기도를 드리는 그의 모습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집전하신 미사에 참석했던 한 사제는 ‘머리털 나고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간 그 사제는 자신이 봉헌했던 성의 없던 미사에 대해 크게 반성하면서, 지극정성을 다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답니다.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서 비오 신부님께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오상을 똑같이 받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그의 생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카푸친 수도자로서 보여준 무조건적인 순종과 한없는 겸손의 삶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으로 인해 숱한 오해와 중상모략을 받으면서 깊은 수도원 안에 유폐되곤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교회에 대한 신뢰, 장상에 대한 순명의 강도는 점점 더 커져만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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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_Xel_8t7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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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을 더 깊게 이해하고 깨닫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고 하시며, 반드시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인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며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만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서는 성경의 앞뒤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앞에는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뒤의 내용은 진정한 당신의 참 가족은 당신의 핏줄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내용 안에서 이 부분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은총을 받으려면 열매를 맺으려 해야 합니다. 그 열매는 길과 같지도 않고 돌밭과 같지도 않고 가시밭과 같지도 않아야 맺힐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세속-육신-마귀, 곧 탐욕과 성욕, 교만을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어야만 그 깨달음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는 5세기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약 17년 동안 깊은 죄악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12세부터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매춘부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회심은 여전히 죄 많은 삶을 살면서 군중을 따르려는 호기심과 열망으로 예루살렘 순례에 합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성 십자가를 공경하기 위해 무덤 성당에 들어가려 했으나 초자연적인 힘이 그녀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실패 끝에 마리아는 자신의 죄악된 삶이 자신을 거룩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깊은 통회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성당 밖에 서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이콘을 바라보며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를 존경하게 된다면 회개하고 자기 삶을 바꾸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기도 후에 그녀는 저항 없이 교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심오한 회심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례 중에 루카 복음에서 이 말씀을 듣고 그녀는 깊은 회개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그녀는 앞서 자신이 기도했던 이콘 앞에 돌아가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요르단을 가로질러 세례자 요한이 살았던 광야, 즉 예수가 세례 받은 곳으로 가서 영원한 안식을 찾아라.”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광야로 들어가 이후 47년을 세례자 요한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속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기간에 그녀는 극심한 유혹과 육체적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전생에 대한 기억과 음식과 위안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기도와 말씀 묵상, 금욕으로 이러한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생애 말년에 요르단 근처 수도원에 살고 있던 성 조시마(Zosimas)라는 수사를 만났을 때 알려졌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막에서 거룩한 은수자를 찾던 조시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그녀의 무식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성함과 성경 지식에 놀랐습니다. 그녀는 성경에 대한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성경의 많은 부분을 암기했습니다. 마리아는 조시마에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성체를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1년 후 조시마가 성체를 모시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시신은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고, 조시마가 그녀를 묻어 그녀의 거룩함을 확인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세.육.마.에서 자신을 이기려는 이들에게 깨달음과 빛을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정원에 앉아 있을 때 근처 집에서 라틴어로 "Tolle, Lege", 곧 "집어서 읽어라."라는 문구를 부르는 어린이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근처에 있는 성경으로 달려가서 무작위로 펼쳤고, 그의 눈은 로마서 13,13-14의 한 구절에 머물렀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 13,13-14) 이 말은 번개처럼 아우구스티노의 마음을 강타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이 순간을 즉각적인 명확성과 확신의 순간으로 묘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이전의 삶을 버리고 자신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성경에 해박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 안토니오 아빠스도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라는 말로 완전히 바뀌었고, 성 프란치스코도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로 완전히 변화되었으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미지근한 삶에서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0)라는 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말씀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게 만드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로 자기를 변화시키려 할 때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고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 자신을 더 겸손하게 하고 더 사랑이 많은 존재로 만들기 위한 지향으로 읽어야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수준에 따라 항상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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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여행에서 ‘몰로카이’ 섬을 다녀왔습니다. 신부님 중 한명의 세례명이 ‘다미안’이었습니다. 몰로카이 신부님은 2002년 ‘성인품’에 오른 다미안 신부님이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사목하던 곳이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자신의 주보성인이 사목하던 몰로카이 섬을 가고 싶어 했고, 우리는 기꺼이 함께 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1840년 벨기에에서 태어났고, 1863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889년 몰로카이 섬에서 선종할 때까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사목했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신부님도 나병환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신부님은 원하던 대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던 것처럼 신부님도 나병환자들과 더욱 가까이 있고 싶어서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부님께서 세웠던 성 요셉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성지순례와 함께 했던 여행이 되었습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처럼 함께 한 신부님들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이번 여행을 기획했던 신부님은 여행사처럼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항공권을 예약해 주었습니다. 숙소도 예약해 주었습니다. 공유차량 렌터카를 이용해서 저렴하게 자동차를 빌렸습니다. 여행 중에 운전도 해 주었습니다. 가야할 곳도 모두 미리 예약해 놓았습니다. 여행지의 맛있는 식당도 미리 찾아 놓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이 계획한 여행 순서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신부님은 ‘스키, 스킨 스쿠버, 철인 삼종경기’를 하였고, 인명구조 자격증도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신부님은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고, 찾아보면서 알게 되고, 알게 되니 기꺼이 남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은 빛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는 세상이라는 강물에 떠밀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노아가 홍수의 때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듯이 우리는 변화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꾸준히 기도하고, 영적인 독서를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기쁨을 넘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의 등불을, 도움의 등불을, 봉사의 등불을, 사랑의 등불을 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지혜의 등불, 이성의 등불, 영성의 등불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나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고, 다른 이들에게도 위로와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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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6-18: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거기에서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 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데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비추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운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그러나 이 삶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며,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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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잠언에서는 오늘 독서와 같이 인과응보에 관하여 되풀이하여 말합니다.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고 강조하며,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갚음을 힘주어 말합니다. 잠언의 저자라도 현세에서 늘 정확하게 인과응보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결과는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잠언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닙니다.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은 의문에 부쳐지고 이후에 욥기와 코헬렛 같은 책들에서 다른 측면들이 지적되지만, 그렇다고 잠언이 쓸모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고, 선과 악의 갚음이 현세에서 완성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이 행하는 선과 악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온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삶 안에서, 특히 현세의 삶 안에서 때로 의심스럽게 보이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할까요? 정말로 현세에서 곧바로 선과 악에 대한 갚음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에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할 때는 대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합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합니다.
명백하여 보이지 않는 가르침,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너무 단순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잠언의 가르침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어쩌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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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의 증언은 ‘말’보다 ‘삶’으로 먼저 해야 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1)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등불’과 ‘빛’은 예수님의 복음을, 또는 그 복음 말씀대로 사는 ‘신앙인의 삶’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는 “너희는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지도 말고, 침상 밑에 놓지도 마라.”이고, “복음을 감추지 마라.”, 또는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마라.”라는 명령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는 “너희는 등불을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여라.”이고,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라.”라는 명령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는 “신앙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복음을 감추지 말고 알려라.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명령을 잘 새겨듣고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라는 말씀은, 복음을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점점 더 신앙이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그 길을 더 잘 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선교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금방 체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 숨기면, 결국에는 신앙을 잃게 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복음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기도하지도 않고, 선교활동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냉담’ 상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17절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를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가 올 텐데, 그때가 되면 ‘복음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받을 몫’이 없다.”로 해석됩니다.>
2) 선교는 교회의 설립 목적이고, 모든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신앙인의 임무는 복음을 전해 주는 것까지입니다. 그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은 신앙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뜻하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이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을 뿐이고, 사도들과 선교사들의 책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3) 복음을 전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 자신이 믿는 대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답게 살지 않는 사람은 신앙을 증언할 수도 없고, 남에게 믿으라는 권고를 할 수도 없습니다.
‘첫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4-47)
여기서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라는 말은, 당시의 신자들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감화시켰음을 나타냅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의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박해 때문에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꾸준히 신자 수가 늘어났던 것은, ‘신앙인들의 삶’이 조선 백성들을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난과 시련을 참고 견디면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었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인답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말’만 잘하는 사람보다 선교활동을 더 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하는데 ‘삶’은 신앙인답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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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 찬가’(1,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1,9)으로 고백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참빛이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면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그분을 회피하거나 해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이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빛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8 참조)에 이어 들려주십니다. 마음속에 심긴 하느님 말씀을 싹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와 더불어, 그러한 삶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둔 등불마냥 감추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착한 표양과 모범까지도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선을 행하기를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행을 베풀기를 지체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떤 악행도 늘 경계하는 삶을 이어 가야겠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주위에 빛이 되어 주는 삶을 더 실천하면 할수록 더 깊은 확신과 기쁨을 얻어, 언제나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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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8,16)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라는 책의 한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신영복은 주역의 기초 개념을 강의하는 과정에서 ‘위位와 응應’에 대한 설명을 한 부분이 있는데, 그 내용이 예수님, 등불의 비유 말씀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기에 그의 주장에 기반으로 오늘 복음을 생각해 봅니다. 신용복에 의하면 ‘위位’는 자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불이 등경 위에 있으면 득위得位, 곧 제자리를 차지하여 방 안을 환히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 있으면 실위失位, 곧 제자리를 잃게 되어 아무리 밝게 빛난다 해도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은 고유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불의 자리가 등경 위인 것처럼, 사람도 그 사람에 맞는 자리가 있습니다. 흔히 교구장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일컬어 주교좌성당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좌座는 곧 주교가 앉는 의자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앉아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앉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득위得位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는 것을 응應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결국 그 자리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 꺼져 있다면 방안을 밝힐 수 없습니다.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전제하면서, 오늘 복음에서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8,16)라는 말씀에서 등불은 자명하게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이 세상에 왔다.” (요1,4.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예수님은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여 있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두운 세상에 당신 존재와 당신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로써 등불이 예수님이라면 등불을 올려놓는 등경은 십자가 위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등불인 주님을 환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려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을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8,17)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비밀은 드러나고야 만다, 는 격언이 생겨났고 우리 일상에서 정치인들이나 재벌 그리고 공무원의 은폐 공작과 정보 조작 등의 사례에서 자주 들어왔습니다. 물론 교회의 비리와 잘못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나요. 언젠가는 그 진실은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숨은 행적도 장차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반드시 드러나고야 말 것입니다. 물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다 알려지기에는 시기상조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드러나고야 만다는 뜻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때, 조급하지 말고 오히려 꿋꿋이 복음을 힘차게 선포하도록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6-27;루 12,2-3)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예수님과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은 감추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있어야 할 가장 적합한 자리에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때 세상의 등불인 주님의 빛은 훤히 더 발광發光하리라 봅니다. 결국 세상의 등불인 주님은 바로 우리 자신이 가장 적합한 삶의 자리에 앉아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진리는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아울러 예전 ‘이어령’ 교수는 당신의 에세이에서 영어 단어 niche(=적합한 지위, 장소. 꼭 맞은 자리나 역할)를 예를 들면서, 바다의 물고기들도 하물며 자신에 가장 적합한 수심, 자리에서 생활한다고 말하면서 무릇 참된 인간이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가장 적합한 niche를 알고 찾을 때 인생의 충만한 삶을 꽃피울 수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저는 등불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제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적합한 자리, 곧 得位하고, niche한 자리인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니다. “주님, 지금 제가 지금 여기 머물러 있는 이 자리가 저의 꽃자리임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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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 세계를 아이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면서 수만 명의 어린이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안전띠와 유아용 의자를 의무화했습니다. 담배로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담배를 어린아이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성년자의 흡연이 늘어나면서 가게 점원에게 나이를 확인받으면서 직접 담배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보호하는 방법을 계속 만듭니다. 그러나 그 보호를 잘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스마트폰입니다. 그 중독성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전자기기는 사탕이 아니라 마약이다’라고 IT 전문 매체 편집장인 크리스 앤더슨은 말합니다. 생각을 멈추게 하고, 많은 자극으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다가 습관성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통, 수면장애, 기억력 상실 등의 증상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기에 우울증까지 심해진다고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그 편리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부작용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문제는 남들도 다 쓰고 있다는 생각, 편리하다는 점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름 캠프 전에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캠프 안 갈꺼에요.”
아이뿐이 아닙니다. 현대인 모두가 중독된 것이 참 많습니다. 술, 마약, 쇼핑, 드라마, 게임….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러한 중독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풍요와 편리보다 더 높은 가치를 쫓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 많이 바라보고, 주님을 높이 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밝게 살 수 있습니다.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추어질 수 없고, 밝게 빛나는 빛처럼 멀리 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계속 감추어집니다. 자기를 중독에 빠지게 하는 풍요함과 편리함만이 오히려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주님 말씀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처럼 취급하며 감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갖지도 않고 오히려 피하면서 세상의 것만 가지려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은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지만, 세상의 것은 죽음 이후 완전히 내게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갖고, 무엇을 세상에 드러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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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우리는 등경 위에 놓은 등불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등불은“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합니다. 촛불이 자신을 녹이지 않으면 빛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희생과 헌신이 없는 이웃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면 빛이 들어갈 틈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길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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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그대여>
루카 8,16-18 (등불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그대여>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대
주님의 불빛이여
비추고 비춰
어두운 세상을 밝혀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사그라지리니
그대
주님의 샘물이여
흐르고 흘러
메마른 세상을 적셔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마르리니
그대
주님의 횃불이여
타오르고 타올라
차가운 세상을 녹여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식으리니
그대
주님의 바람이여
불고 불어
막힌 세상을 뚫어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멈추리니
그대
주님의 손길이여
내밀고 내밀어
숨죽인 세상을 어르라
그러지 아니하면
그대마저 움츠러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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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1)아무도 등불을 켜서 ~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그렇습니다.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렇습니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듣는지’가 중요합니다.
율법학자가 “스승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무엇을 들었는가?’ 못지않게 ‘그것을 어떻게 들었는가?’, ‘무엇을 보았는지’ 못지않게 본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가?’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곧 ‘믿음과 사랑으로 희망하여 들었는지’가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영성적 의미’에 따라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들은 바를 믿고, 믿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실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루카 8,18)이라는 말씀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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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 기도>
“아무도 등불을 켜서 ~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루카 8,16)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아무 것도 당신 말씀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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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그렇습니다.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사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지닌 우리를 '세상의 빛'(마태 5,14)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고 세상의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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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아무 것도 당신 말씀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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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지혜>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다-
정작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지식이 많아서 스승이 아니라 삶의 지혜가 뛰어나 스승입니다. 지식의 선생은 많아도 지혜의 어른이나 스승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이 추세라 웬만한 답은 스마트폰이 다 해주기에 이젠 지식의 선생도 쓸모없어졌습니다. 이럴수록 삶의 스승이, 지혜의 스승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전 사막의 수도자들은 “참으로, 진짜로 살기”를 원했고, 많은 구도자들은 이들의 지혜를 찾아 사막에 갔습니다. 사실 우리 옛 어머니들은 지식은 짧았어도 겸손했고 삶의 지혜는 탁월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감동하고 감탄하는 바 제 어머니입니다. 살아갈수록 자주 생각나는 어머니요 어머니의 지혜입니다. 예전에 이런 어머니를 그리며 쓴 자작 고백시 일부를 나눕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조선 여자 같은 분이셨다
애교나 아양은 거의 없었지만
강인한 의지에 아주 지혜로운 분이셨다
심한 밭일에 몸 많이 피곤하여
밤에 끙끙 앓으셔도
아프다는 내색 하나 않으셨다
아버지 원망하는 말 하나 들은 적 없고
큰 소리 내셔서 다투거나
화내신 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돼지 키워 자식들 학비도 대셨고
장마다 계란 모아 팔아 꼭 찐빵도 사다 주셨다
사실 오십 년대 육십 년대는 모두가 가난했지
그러나 마음은 참 부자였고 행복했다
그 흔한 종교나 신앙없이도
한결같이 사셨던 어머니
삶자체가 기도였고 종교였다
이리저리 감정에 연약하게 흔들렸던 분이셨다면
그 험한 세월에
다섯 남매 어떻게 키웠을 것인가
“외롭다’거니 ‘그립다’ 거니
감정 표현 없이도
따사로운 남편 사랑 없이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가정을 지켜오신 내 어머니”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여전히 그리운 어머니는 제 삶의 교사, 지혜의 교사가 되고 계십니다. 지혜 역시 보고 배웁니다. 지식들은 다 잊혀져도 보고 배운 사랑과 지혜는 영원히 살아 있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부터 이번 주간 제1독서는 지혜서에 해당되는 잠언과 코헬렛을 맛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비의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이나 공동체가 합리적으로, 책임감있게 살도록 부추기는 상식입니다. 새삼 영성생활도 비상하기 보다는 이런 평범한 상식의 지혜가 기초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런 지혜는 책에서보다는 삶의 체험에서 깨달음을 통해 배웁니다. ‘삶의 책’이 지혜의 보고(寶庫)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성인들에게 배우는 바 역시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 때 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부르는 초대송 후렴도 생각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하느님 주시는 참 좋은 선물이 지혜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흔히 오상의 비오 신부님으로 유명한 성인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1968년 9월23일 81세로 선종하기 까지 카푸친회 수도사제로 반세기 동안 어떤 의학적 치료나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한 오상을 지니고 사셨고 오상에서는 피가 배어나왔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십만명이 비오 신부님을 찾은 것도 대부분 고백성사를 보고 영적지도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살아계심을 놀랍게 증언하였습니다.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인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고, 교황 비오 12세는 “비오 신부님은 돌아가시기 전부터 성인이셨음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라 하셨고,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우리 주님의 오상을 뚜렷이 잘 나타내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세기 동안 비오 신부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 안에서 보냈고, 선종하기 직전이 1967년에는 만오천명의 여자와 만명의 남자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합니다. 성인의 삶이 응축된 지혜로운 말씀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이란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이외의 것이 아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평생 영적전쟁중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오늘 제1독서 잠언의 지혜는 이웃사랑에 관한 지극히 상식적인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
“이웃에게 해가 되는 악을 지어내지 마라.”
“공연히 이웃과 다투지 마라.”
“포악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새삼 이웃사랑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사랑은 ‘지혜의 샘’입니다. 이와 더불어 잠언의 현자는 주님께서는 비뚤어진 자를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복을 내리시고 호의를 베풀어 준다 하시며 우리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올곧은 삶을 살며 ‘하느님의 벗’이 된다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라 일컬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의 지혜가 빛납니다.
“등불은 켜서 등경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지혜로운 신자들은 등경위에 등불처럼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니 하늘 두려운 줄 알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촉구이며, 이래서 즉각적인, 끊임없는 회개와 고백성사가 중요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하는 경청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진리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수행자로서 한결같이 깨어 수행에 전념하는 영적부자로 사는 이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언자(豫言者)와 더불어 현자(賢者)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평생교육을 이뤄주는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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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본질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8,16-18)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이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을 비추시는 등불이시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숨기셨지만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등불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도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할 본질'과 '살아야 할 본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땀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죄(罪)'는 '본질이 되지 못한 죄'입니다. 곧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되지 못한 죄'입니다. '예수님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님이 되지 않은 죄를 지었음에도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지 않은 죄'입니다.
오늘은 '21세기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로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 소속이며,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성인이십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부이신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의 거룩한 다섯 상처'인 오상(五傷)을 받으셨는데, 무려 50년 동안(1918년-1968) 받으셨습니다. 1910년에 사제서품 받으시고 1968년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거의 한 생을 오상 속에서, 곧 그리스도가 겪으셨던 수난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런 비오 신부님을 2002년에 시성하셨습니다.
'한 생을 본질 속에서 사셨던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본받아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본질이 되려고, 본질이신 예수님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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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된다."(루카 8, 16)
빛속에서
꽃들이
피어납니다.
빛은 뜨겁고
아름다운 삶을
가르쳐줍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빛이
있습니다.
빛은 빛을
알아봅니다.
빛과 함께
존재하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풀어주는 이빛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삶을 비추는
등불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듯 가까이에
있습니다.
빛은 우리들에게
걸어가야 할 길을
일깨워줍니다.
빛은 우리를
끌어올려 줍니다.
사랑의 등불이
있어야 할 곳은
우리 마음
한 가운데입니다.
우리또한
비오 사제처럼
십자가를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의 이유는
사랑입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사랑으로
비추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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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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