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구르가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한 위구르인이 원나라로 귀화했다. 고려의 유행가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바로 위구르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쌍화점>은 당시의 자유로운 性풍속도를 그
린 노래로 2008년 영화로도 나왔다. 조인성과 송지효의 뜨거운 정사 신은 숨이 턱 막히게 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그 위구르인의 증손자는 원나라의 관직에 제수되면서 설씨라는 원나라 성을 하사받았
다. 설손은 훗날 정3품에 해당하는 고위직까지 올랐다.
고려 왕자 왕기(훗날 공민왕)가 볼모로 입조하자 단본당(왕자 교육기관) 정자(正子) 직을 맡고 있던
설손은 비공식적으로 왕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통치술에 대해 자세하게 가르쳐주면서 돈독한 친분
을 맺었다. 왕기가 고려왕에 책봉되어 떠난 몇 년 뒤, 중원 곳곳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등 정국
이 불안정해지자 설손은 식솔을 거느리고 고려로 망명해왔다. 공민왕은 크게 반가워하며 그를 귀화
시켜 고창伯에 봉하고 집과 넉넉한 봉토를 하사했다.
설손이 데려온 다섯 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 설장수는 나이 열일곱으로 위구르어‧중국어‧몽골어 등에
두루 능통했다. 학문도 출중하여 귀화한 지 4년 만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이로 미루어 그새 고려어에
도 능통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에서는 그를 외교 분야에 중용했다. 때마침 원나라가 기울고 신
흥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해가던 시절이었으니, 몽골어와 중국어에 두루 능통한 설장수는 양국을 상
대로 하는 ‘통역이 불필요한 외교관’으로 최적격이었다.
우왕 13년 문하부 지사로 있던 설장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려에서 명나라 관복을 습용
(襲用)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왔다. 독립국으로서 남의 나라 관복을 따라 입는다는 것은 치욕스런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약소국으로서 큰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원나라를 몰아
낸 무력으로 고려마저 정복하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본래 원나라 땅이었던 철령 이북
을 점령하려던 명나라의 속셈을 간파하여 조정에 보고한 것도 설장수였다. 비록 이성계의 위화도 회
군으로 수포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계획은 명나라의 이 흉계에 대적하기 위해
수립된 공즉수(功卽守) 정책이었다.
위화도 회군 직후, 상황 판단이 빠른 설장수는 이내 신흥세력의 우두머리인 이성계와 친분을 맺었다.
역성혁명을 꿈꾸고 있는 이성계로서도 설장수처럼 국제관계에 대한 탁견과 빼어난 외교 능력을 지니
고 있는 인물이 반드시 필요했다. 1389년 이성계는 창왕을 쫓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기 위해 비밀리
에 ‘흥국사 회의’를 개최했는데, 훗날 ‘흥국사 9공신’으로 포상을 받은 공신들의 명단에 정몽주‧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설장수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공양왕은 자신을 옹립한 공로로 설장수를 문하찬성
사(종1품)에 제수했다.
그런데 설장수는 이성계의 개혁에는 동참했지만 정몽주와 함께 역성혁명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오래 전부터 설장수의 재주를 시기하고 있던 정도전은 그를 죽이려 했다. 이때 설장수의 재주를
아끼던 이성계가 나서서 그를 유배형에 처하면서 정도전의 칼날을 피하게 해주었다. 그 직후 조선을
개국하고 유능한 인재가 절실하던 태조는 유배 5개월 만에 설장수를 불러올려 검교 문하시중(정1품)
에 제수했다. 문하시중은 훗날 영의정으로 명칭이 바뀐다. 검교(檢校)란 명예직이어서 아무런 권한도
없었지만, 설장수를 죽이려던 정도전으로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태조 3년(1394) 11월 19일, 설장수는 사역원(오늘날의 동시통역대학원 + 외교안보연구원) 창설 책임
자로 임명되어 사역원의 직제, 운영 방법, 관리 선발 방법, 교육 내용 등에 관한 구체적인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태조의 윤허를 받았다. 또한 중국어 어학교재인 「직해소학」을 지어 직접 가르치기도 했
다. 정도전은 배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요동 정벌계획을 수립한 정도전을 보내라
는 하명이 왔다. 가면 죽을 게 뻔한 일이었다. 태조는 설장수를 대신 보냈고, 설장수는 뛰어난 수완과
유창한 중국어로 명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하고 귀국했다.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도 명나라는 이방원을 호출했다. 역시 가면 못 돌아올 수도
있는 길, 이때도 설장수가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명나라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고 왔다. 정종이
즉위했을 때도 설장수가 명나라 황제의 윤허를 받고 돌아왔다. 설장수는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
마다 총 8차례나 명나라로 찾아가 내정간섭에 이골이 난 황제를 설득하고 돌아왔다. 이처럼 조선 초
기 외교사에서 설장수는 가장 지대한 공을 끼친 인물이었다.
「조선사 진검승부」의 저자 이한우는 ‘설장수의 이름을 지금처럼 망각의 강에 내버려두는 것은 조
선 건국史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교史, 의복史, 통역史의 거인을 지워버리는 일’이라며 몹시 안타까워
했는데, 설장수라는 인물을 혼자만 알고 있는 줄로 착각한 표현이다. 설장수는 사학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 작가들도 다들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설장수는 상당한 역할
을 맡고 있다. 설장수 역을 맡은 배우 이신재 씨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역사적 인물이 그리 쉽게 망각
의 강에 떠내려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옳바르다" 를 습관적으로 사용해 왔는데 우리 바른말 "올바르다" 의 북한식 표기법 이라는 사실을 이제사 알았습니다. 교과서에 국민 대신 인민이라 표기하는 사례가 잦다고 하니 이역시 좌파.운동권의 북한 동조 사용법 입니다. 올바른 국어 사랑이 바로 나라 사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