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카테고리 이동 kimkwangsooblo 검색 MY메뉴 열기 사진 곡차 한 잔에(990회) 프로필 별명없음 2021. 3. 11. 10:15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곡차 한 잔에(990회)
우리나라에 차 문화는 해방과 더불어 다양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옛 적에 우리의 차 문화는 곡차가 전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간혹 중국으로부터 비싼 차들이 들어오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은 곡차를 즐겨 마셨다. 원래 곡차(穀茶)라는 용어는 법당을 지키는 스님들이 은어(隱語)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잘 아는 바로 곡차는 막걸리를 이르는 술의 일종이다. 곡식으로 제조하였다 하여 곡차라고 하였는데 수도승들이 막걸리를 먹고는 싶은데 금지된 음식이었기에 이를 은어(隱語)로 표현한 것이 곡차로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은어는 수도승(修道僧) 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예를 들면 고기를 먹고는 싶은데 금지된 음식이라서 나온 말이 도끼나물이며 칼 나물이라는 은어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도끼나 칼은 고기를 요리할 때는 사용하는 도구이고 나물은 고기를 의미한 다는 것이다. 이는 수양(修養)이 덜된 돌 중들의 입을 통하여 나왔다고 한다. 막걸리의 예명은 수도승의 은어로서 탄생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예(禮)를 숭상하여왔다. 아이가 태어나면 소학(小學)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어 인간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를 가르치고 배웠다. 그래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여왔다. 그리고 집집마다 곡차는 스스로 제조하여 사용하여왔기에 가문(家門)마다 가전 비법(家傳秘法)으로 내린 곡차로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여왔다. 특히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제사상(祭祀床)에는 대부분 곡차인 막걸리를 제사상에 올렸다.
제사 의례(儀禮)가 끝나고 상(床)을 물린 후에 제사상에 올렸던 곡차를 복주(福酒)라 하여 어른들부터 조금씩 맛을 보면서 조상님의 음덕에 감사하여왔다. 이러한 곡차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나라의 허가(許可)를 받아야 제조가 가능케 되어 가정에서는 제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문화는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맥(命脈)이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나라에서는 밀주(密酒)로 보아 발각이 되면 처벌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것은 해방 후에도 계속 이어져왔다. 막걸리 제조 사업은 나라의 전매사업으로 국고를 채우는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였기에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지역마다 양조장을 허가받아 제조한 막걸리를 사용자는 돈을 지불하고 사서 사용하였다. 농촌 일터에는 언제나 새참과 더불어 막걸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음료수다.
무더운 여름에 열심히 일하다가 허리 한번 펴고 탁 배기(막걸리) 한잔 쭉 들이키는 즐거움에 자식처럼 기르는 농작물도 잘 자랐다. 시골 장터는 언제나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친인척도 만나고 사돈어른도 만나는 장소다. 특히 친한 지우(知友)를 만나면 으레 막걸리는 대화의 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금년 농사의 이야기며 가족들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주모(酒母)의 눈치도 보았지만 무시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언제인지 해는 서산 쪽을 기울여질 무렵에는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 갈지자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문화가 시골장터의 한 모습이다. 이처럼 곡차는 중요한 생활의 일부분이었다고 기억된다. 때로는 세무서는 막걸리 제조의 원료인 누룩 조사를 하고자 마을에 나타나면 사시나무 떨 듯하였다.
집집마다 호별 조사를 하여 발각되면 벌과금으로 처분 받기도 하였다. 농촌의 저승사자처럼 나타나는 사람들은 밀주 조사하는 사람과 산에 나무를 허가받지 않고 무단으로 배는 것을 단속하는 산감(山監)이라고 기억된다. 곡차는 국민의 생활 문화였다.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고자 허가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매출고에 따라서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로 바뀌었다. 누구 말처럼 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주세라는 명목으로 나라의 금고(金庫)를 채웠다. 가장 쉬운 수탈(收奪)에 곡차(穀茶)는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가는 과정에서 막걸리도 고급 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약주가 한 단계 높아졌다. 그리고 고급 주로 청주로 거듭 태어나기도 하였다. 내가 수학(修學) 하였던 안동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안동소주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알코올 도수는 40도에서 45도 정도로 불을 붙이면 세파란 불꽃이 일러나는 아주 독한 술로서 요사이 외국에서 수입된 양주에 능가하였다고 기억된다. 이 밖에도 재비원 소주며, 선어대 소주로도 생산 판매되었다고 기억된다. 지금은 법주라는 기업으로 변신되어 생산 판매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지방차지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지역 간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지역의 부존자원을 통한 문화적 가치를 높이고자 하였다. 내가 태어났던 영양군에서도 초화주(椒花酒)라는 민속주를 생산하여 지역들 알리고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몇 년 전에 고향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어 초등학교 선배이신 임시권 영양 문화원 장님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역 문화에 남다른 식견(識見)과 애정이 있는 분으로써 내 별호(別號)를 법민(法珉)으로 작명(作名) 하여 주신 분이다.
그분으로부터 초화주(椒花酒)를 선물 받았다. 이웃한 안동시에서도 안동소주의 명맥을 이어가는 뜻에서 전통적 방법으로 소주를 내리는 동영상을 보았다. 지역의 문화적 자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모습에 문화는 역시나 시공간(視空間)을 뛰어넘는 생명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수년 전에 내가 존경하는 목민관이신 김휘동 시장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으로부터 옛날 전통적으로 제조된 안동소주 한 병을 선물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직을 그만둔 이후에는 송암(松巖 : 바위에서 자란 소나무)을 카메라에 담아 대구 서울 안동 광주 비엘라) 등지에서 전시회도 열었고 산(山)이라는 저널지에 기고(寄稿) 하기도 하신 유명하신 분이다. 특히 국내 유일의 개인 송암(松巖) 전시관을 개장하였고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시는데 여생을 맡기신 분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충주시는 이름만큼이나 산자수명(山紫水明) 하고 인심(人心) 또한 후덕(厚德) 한 지역으로 사람의 안택지(安宅地)로서 전국 제일이로 알려지고 있으며 역사적 문화자산이 풍부한 도시다. 중앙탑 면에 소재한 중원당에서 생산되는 청명주(淸明酒)는 한국 전통 민속주로서 알코올 17도의 약주와 청주를 생산하여 곡차의 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다. 한마디로 민속주로서 진가를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전국 골골마다 있어왔던 우리의 막걸리 문화의 전통을 살리고자 지역의 이름을 걸고 각종 민속주들이 생산되기도 하고 변신하여 고급 주로 알려지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 생산되었던 곡차의 변화는 술도가에서 양조장으로 기업으로 수출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막걸리에 유익한 성분이 많아 요사이는 젊은 층에서 폭발적으로 인기를 높이고 있다는 뉴스도 보았다.
카페에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젊은 남녀들이 모여 막걸리 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모습에서 문화의 위대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주점에서는 곡차는 약방에 감초처럼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빛내기도 하였는데 귀중한 손님이 오면 주점으로 모시고 종이 깔고 하늘의 선녀들이 하강한 것처럼 아가씨들의 수발을 받으면서 비즈니스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고대하 기도하였다. 또한 만남의 기억이 오래도록 기억되게 하는 곡차 문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막걸리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 위력의 힘을 빌리기도 하였다. 또 생시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야기하지 못한 일도 곡차의 힘을 빌려서 하였다. 흔히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들 한다. 평시에는 생각지 못하였지만 취중(醉中)이면 내심도 활짝 열어 보이게 하는 능력도 있는 막걸리다. 막걸리 문화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막걸리는 구중궁궐에서부터 말단의 민초들까지 사랑을 흠뻑 받고 성장한 우리의 문화 자산이다. 문화는 도도하게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한다. 총과 칼은 잠깐의 위력을 발휘한다면 문화자산은 종점을 예측하기 어렵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해방과 더불어 외국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종류를 헤아리기 어렵게 수입되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다. 한때는 타격도 받았지만 그 진면목이 밝혀지고 나서 다시 옛 영화를 생각나게 하고 있다는 데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내 것이 최고야 하는 어느 광고를 보았는데 딱 맞는 말이기도 하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식 평가가 아니라 당당하게 경쟁에서 세계화에 이바지하기를 기원하는 바다. 첨예하게 갈등의 국면을 막걸리로 봉합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하여 보았다. 끝
2021년 3월 11일 목요일 오전에
夢室에서 法珉 김광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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