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현대 농구팀을 응원하던 팬들에게는 한기범 선수의 기아 입단은 공포 그 자체였다. 2미터 5센티의 키를 가진 한기범 선수는 가만히 서서 리바운드 볼을 따냈고, 골 밑에서 공을 잡았다면 여지없이 골로 연결시켰다. 그보다 십여 센티는 작았던 현대 선수들이 아무리 팔짝팔짝 뛰어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 선수를 보면서 관심 있는 의사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혹시 저 선수 마판(마르팡) 증후군이 아닐까? 그 예상은 맞았다. 그는 마판 증후군이었다.
마판 증후군은 이 병을 처음 발견한 소아과 의사 마르팡(Antoine Marfan)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몸의 구조를 만들고 그걸 지지하는 조직을 결합조직(connective tissue)라고 하는데, 마판 증후군은 결합조직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구체적으로 피브릴린 -1(fibrillin-1)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 그 유전자에서 만드는 피브릴린 이라는 당단백에 선천성 결함이 생기는데, 이 당단백은 엘라스틱 섬유(elastic fiber)를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당기면 확 늘어났다 손을 놓으면 원래 크기로 줄어드는 그 엘라스틱 섬유,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몸에는 그런 섬유질이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엘라스틱 섬유가 특히 많은 곳은 인대, 눈의 모양체 부위, 그리고 혈액을 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대동맥이다. 마판 증후군에 걸리면 당연히 이런 구조물들에 이상이 온다.
가장 특징적인 소견은 역시 골격에 나타난다. 마판증후군을 거미손가락증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첫째, 환자는 비정상적으로 크고, 손발이 길며 손가락, 발가락도 길다. 마판 증후군을 진단하는 방법 중 손목 징후(wrist sign)라는 게 있는데, 이건 엄지손가락 끝과 새끼손가락 끝을 맞대면 반대쪽 손목을 감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여자분들 중엔 이렇게 되는 분들이 계시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그건 손목이 가늘어서 가능한 거니까.
둘째, 몸의 아랫부분이 특히나 길어 상부, 즉 머리에서 골반까지의 길이보다 골반에서 발바닥까지의 길이가 훨씬 길다. 이걸 비율로 따지면 상부/하부가 0.85-0.93 정도가 된다는데, 다리가 길다고 꼭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게다가 팔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 팔을 양쪽으로 벌렸을 때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의 길이가 키보다 커서, 이 비율이 1.05 이상인 게 보통이다.
셋째, 마판 증후군 환자들은 손과 발의 관절이 매우 느슨하다. 엄지손가락을 뒤로 젖히면 손목에 닿을 정도다. 머리는 길고 폭이 좁고, 앞머리와 눈썹 부근이 튀어나와 있는 것도 마판 증후군의 특징이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마판 증후군의 여러 특징을 갖고 있어 환자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확실하진 않다. 그밖에 척추가 옆으로 휜다든지, 가슴이 움푹 들어간다든지 하는 것도 다 마판 증후군에서 볼 수 있는 골격 변화다. 미국의 마판 증후군 단체가 환자들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두었으니궁금하면볼 수 있다.
눈 이상마판 증후군의 절반 이상에서 수정체의 위치가 정상에서 이탈되어 있다. 다른 질환에선 이런 증상이 드무니, 수정체가 바깥쪽 위에 가 있다면 마판 증후군을 의심해야 한다.
마판 증후군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 질환이 심혈관계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게 승모판 탈출증으로, 이건 좌심방과 좌심실 사이에 존재하며 혈액 공급을 관리하는 승모판이 좌심실이 수축할 때(좌심실 수축기) 좌심방 쪽으로 탈출하는 거다. 좌심실 수축기란 심장이 몸 전체로 혈액을 보내는 시기. 강한 압력으로 혈액을 짜내려는데 승모판이 굳게 닫혀 있는 대신 좌심방 쪽으로 밀려가면 그 틈으로 혈액이 역류해 좌심방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량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틈이 크다면 몸 전체로 나가야 할 혈액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뇌로 가는 혈액의 양이 줄어들어 의식을 잃는 일도 생긴다. 또 흔한 증상 하나가 대동맥의 시작 부위가 확장되는 거다. 심장은 강한 압력으로 혈액을 내보낸다. 그 압력을 견디면서 혈액을 우리 몸 곳곳에 전달하려면 대동맥 벽은 엘라스틱 섬유가 풍부한, 튼튼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마판 증후군은 이 엘라스틱 섬유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혈액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대동맥은 부풀 수밖에 없다. 그대로 놔두면 대동맥은 점점 더 확장되고, 혈액은 우리 몸으로 가는 대신 다시 심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심한 경우 대동맥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 마판 증후군 환자가 갑자기 사망하는 건 대부분 이런 대동맥 이상에서 기인한다.
마판 증후군은 1만명 당 2-3명에서 발생하는 비교적 흔한 질환으로 농구나 배구 선수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들 종목이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긴 선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우성 유전의 형태를 취하지만 25-30%는 가족력이 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15번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가 이상한 거라 이를 고칠 방법은 아직까지 없지만, 증상을 완화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주요 사인이 대동맥 문제니만큼 심장박동을 느리게 하는 약, 혈압을 낮추는 약을 써서 심장의 부담을 줄여주면 된다. 이런 약제들을 씀으로써 마판 증후군 환자들의 수명이 크게 늘었다는데, 이미 대동맥벽이 확장되었다면 수술을 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 배구계의 별이었던 강두태 선수는 32세이던 1990년, 급성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현대 팀의 센터였던 배구선수 김병선, 2미터에 달하는 키로 철벽 블로킹을 보여줬던 이 선수 역시 32세이던 199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다음 기사를 보자.
“프로배구 최장신(207㎝) 선수인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센터 박재한(26)이 조만간 수술대에 올라 이번 시즌을 접게 됐다. 삼성화재는 8일 4년차인 박재한이 오는 13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에서 심장 대동맥 혈관 확장에 따른 인공 혈관 교체 수술을 받는다고 밝혔다. 이번 시즌 중요한 순간마다 투입돼 높은 블로킹 벽을 쳤던 박재한은 최근 정밀진단에서 대동맥 혈관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마판증후군'으로 판명났다.” ( 이동칠 , 2006)
농구와 배구 이외에 마판증후군에 걸린 유명인들이 누가 있는가 찾아봤더니 의외로 음악가가 많다. 그룹 디어헌터의 리더 브래드포드 콕스나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스도 그렇고,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도 마판증후군으로 의심되는 경우란다. 뒤의 두 명은 유달리 손가락이 길고 유연해서 보통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테크닉을 구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마판증후군이 음악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글 머리에서 언급했던 한기범 선수는 아버지와 동생을 마판 증후군으로 잃은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자신도 2000년 갑자기 쓰러져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10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가까스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의 말이다. “키 크고 팔다리가 긴데도 운동을 잘하면 (마판 증후군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다들 검사를 한 번씩 받아보셨으면 해요.” 그의 말대로 키가 큰 운동선수들은 대동맥과 심장에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강두태 선수처럼 젊은 나이에 갑자기 목숨을 잃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건 손가락이 유난히 긴 음악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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