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너는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니!?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 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고,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 뿐이었어.
22 개나 되는 링거 줄에 의지하고 수 많은 기계들 덕분인지
죽었다가 3 일만에 심페 기능 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병원에 입원한지 한 달이 되어 가면서 의식을 되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를 빼고 파편 때문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 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 저기에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고, 뱃 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 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 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를 왔다 갔다 하며 의사들과 간호사들, 그리고 가족들을 애를 태운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 며 네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 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이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 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많이 저리고 아프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
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 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을 맞고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냐?" 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 모금 삼켜도 장 출혈이 심했고,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 눈으로 지새우는 내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너는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는데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 오는 슬픔을 되새길 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 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와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여건 속에서 약간 호전되는가 싶더니 점점 심해져 2002 년 9 월 1 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 주렁 매달린 링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 월 20 일 새벽, 하루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톼원하갈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내 아들은 저 멀리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 동안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이 고마웠다.
대전 현충원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 방울을 맞으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 진다.
6 월 29 일 국군 수도병원으로 갔던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 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대전 현충원에 수 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 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 보니 요새는 정이 들어 친하게 지낸다.
2002 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씁씁할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는데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 버렸다.
새해가 밝아 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 커녕 편지 한 통이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기획 조정실장 내정자라고 한 서동만 교수는 서해 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 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답변이 없다.
2003 년 6 월 11 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 날이다.
금방아라도 대문을 열고 ‘엄마 나 왔어~’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 올 것만 같다.
대문도 열어보고; 혹시나 하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 거린다.
아들이 보고 샆어 안절부절 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 뉘엿 져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북받쳐 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우리 아들 동혁이는 오지 않냐?’ 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과 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었다.
속 한 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매 뇬 6 월은 참르로 견기기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 저기 다녀 보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다. 여러 군인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 뜨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 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 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한단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 해가 저문다.
총 소리 없는, 전쟁이 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거라.
이 글은 엄마가 하늘 나라의 아들에게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 교전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국군 수도병원 모든 분들께, 성금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게 감사 드립니다.
서해 교전 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 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같은 해 2002 년 9 월 20 일 숨진 고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 씀.
2002 월드컵 함성이 뜨거웠던 그 날 (연평해전)
첫댓글 깜짝 놀랐네요.
기억해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