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 대한 포괄적 사랑으로 착각하기 쉬운 기독교가 오늘날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나타남으로써, 반사회적 경향을 띠고 있다.
기독교의 반사회적 문제성은 각 교회의 옹졸한 공동체의식에 원인이 있다.
사업화된 한국교회는 독단과 독선적인 이분법이 가히 매출경쟁에 필수항목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그 어떤 비난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에 있어 제외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공동체의식으로 나타난다. 각 개 교회는 신도수에 비례하여 수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교회의 공동체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목회자는 타 교회에게 이단이란 손가락질을 하도록 은연중에 신도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의 공동체의식은 곧, 확보 고객에 대한 이탈을 방지하는 유지적 측면과 새로운 고객확보를 이유로 타 교회에 대한 이단성 세뇌의 측면(경쟁적 측면)을 띠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기업화현상은 도덕불감증이나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헤이를 가져왔다.
교회 재정의 투명성 확보와 십일조 폐지를 통한 교회개혁을 이루지 않는 한, 교회의 반사회적 이기주의 섭리는 고쳐지기 어려워 보인다.
이는 기업시스템에 대하여 지극히 맹목적 경쟁의 측면만을 고려한 자본주의적 현실론으로써, 기존의 신도들을 설득하는 훌륭한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사회도덕에 반하여 거부감을 갖는 신도들에게 현실적 경쟁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교회로부터 사회적 지위 획득(사회적 경쟁)에 유리함을 강조하여 교묘하게 속여 온 것이다.
목회자들이 이러한 치졸성은 상당히 치밀하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자본력에 대하여 규모가 비대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작 2 ~ 3%의 사회환원이라도 있을라 치면, 그것을 위안삼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또, 대부분의 신도들은 교회 간부들이 관리하는 재정에 대하여 그 쓰임새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교회에 나와야 삶이 풍요롭고, 야웨의 은혜를 받아 하는 일이 잘 될 수 있다고 버젓이 자랑하는 점에서 목회자들의 세뇌공작에 바이블이 참으로 이용하기 쉬운 교리인가 보다.
기독교인들의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행태를 보면, 목회자들이 신도들의 의문을 꺾을 정도로 교묘하고도 의도된 화술을 구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의 말이라면 메주라는 명사도 진짜 메주인지, 콩인지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으며, 일반인들은 교회행태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이라크 전쟁 이후로 미국의 부시행정부를 지원하는 '네오콘(neocon)'이 시사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네오콘은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을 뜻한다. 냉전이데올로기의 대결구도가 깨지자,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대비하여 새로운 보수주의로 본연의 보수주의로 회귀하자는 목적을 가지는 미국 내 신보수진영이다. 그들은 미국 중남부의 전통적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의 우경화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대외정책을 좌지우지 하고 있는 실체다. 네오콘은 공격적 이데올로기 집단이다. 미국이 먼저 공격 받기 전에 위험요소를 제거하자는데 그 틀이 형성되어 있다. 잠재적 위험요소에는 냉전시대에 필요했던 우방국도 미국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위험한 국가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하고도 악랄하며 잔인한 미국식 세계주의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우방국이 미국의 이익에 해를 끼칠 경우에는 적국으로 간주하는데, 상대국의 공평한 이익에는 관심이 없다는데, 네오콘이 지니는 위험성의 핵심이 있다.
대 북한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북한을 적대하고,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데 남한의 민족정서를 문제삼고 있을 정도다. 남한이 북한을 같은 동포로 인식하여 유화적인 측면이 저들에겐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북한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북한을 중국에 정치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친중국적인 사대정권을 수립하여 결국에는 북한을 미국의 세계화에 편입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비민주적인 중국과 맞서는 지역으로 유용하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의 민족정서에 상당히 반하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에 종속되기를 바라지도 않을 뿐더러, 통일된 한반도가 미국의 대 중국정책으로 유용되길 바라지도 않는다. 미국의 뜻대로 중국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반도를 이용하려는 기만술책이다.
또, 기독교 특유의 이분법을 논리로 누가 미국에 적대국인가를 가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즉, 그들의 눈에는 우방국과 적대국만 존재할 뿐이며, 미국의 정책에 불공정한 섭리를 따르는 것이 우방국이다. 우방국과 공정한 이익에 대한 고려는 없고, 단지 미국에 반하는가, 반하지 않는가의 문제만 있을 뿐이어서, 가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힘으로 지배하겠다는 뜻이다.
미국 내부에 네오콘에 대한 비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랬듯이,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더라도, 저들의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미국사회다.
미국의 이런 염려스런 우경화는 지속될 것이 분명하고, 우리의 안전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특이한 세력이 있다. 기독교를 등에 업고 미국에 미쳐서 날뛰며 동포를 전쟁의 불구덩이에 집어 넣으려는 매국노들이 그들이다.
조선일보 2004.02.14일자 30면, 조선데스크란에 '한국의 네오콘을 기다리며'란 칼럼이 있다.
언뜻 보면, 우리식 보수주의를 미국의 네오콘에 맞게 대응하자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의도의 주장이 아니다.
위험한 미국의 네오콘을 본받아 보수주의가 정책결정에 주인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오콘과 유사한 우리식 보수주의도 위험한 생각이지만, 미국 네오콘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미국의 네오콘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수구세력을 구축하려 드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가 메주를 메주라 하여도 살펴보아야 하는 것처럼 수구들의 책동을 위험스럽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칼럼에서는 네오콘이 미국의 인권, 인종문제 등에 대한 진보적 정책들에 대하여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포장하고 있다.
위험하고 공격적이며, 이분법적 미국의 정책을 현실적 대안이란 말로 포장하는 것이 교회에서 목회자들의 현실론과 어쩜 그리 꼭 닮았을까?
현실론은 분명, 도덕성과 사회적 공의에 불감증을 가져올 우려가 있다. 네오콘과 한국교회의 수구적 현실론은 현실에서 최선의 대안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무마시키려는 공통적 의도가 있다.
미국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들고, 시위에 열을 올렸던 기독교인들은 보수화가 아니라, 미국을 위해 동포를 잔인하게 희생시키려는 가증스런 술책에 놀아나고 있음을 지금 즉시 자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