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없다
봄이 되자 창밖 발코니에서 겨우내 은인자중하던 ‘꽃잔디’가 한차례 절정을 이룬다. 5월이 가까이 오자 햇볕을 따라 나란히 꽃대를 기울이던 ‘향기 카네이션’들이 분홍빛을 발산한다. 연이어 잡초로 여겼던 풀꽃들도 덩달아 슬픈 이름도 잊은 채 하얀 꽃잎을 쏟아낸다.
오래전에 알던 철학 교수가 있었다. 돌연 교수직을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 귀농한 분이다. 농사를 지으며 처음에는 ‘잡초’인 줄 알고 뽑아버렸던 풀들이 나중에 자세히 보니 ‘별꽃 나물’, ‘광대나물’과 같은 소중한 봄철 식재료임을 체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잡초는 없다.》라는 산문집이다. 인간이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쓸모없다고 여겨 ‘잡초’라고 부를 뿐, 자연 속에서 저마다의 역할과 생명력을 가진 소중한 존재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던지는 에세이다.
‘잡초’란, 내가 심고 키우지 않은, 저절로 나서 자라는 식물을 일컫는다. 내가 심은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공간을 차지하는 등 ‘원치 않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을 가지는 말이다.
정원사가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기 위해 자르는 가지들도 거추장스러운 잡초에 해당이 될까. 가지치기란 전적으로 정원사의 미적 감각으로 행해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결정이다. 나무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난가을 베란다에 자라는 무성한 고무나무 가지를 정리했다. 차마 손발과 같은 가지를 자르기가 마음이 쓰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른 가지들을 창밖 발코니 화분 몇 곳에 옮겨심었다. 한파가 닥치자 작은 화분들은 실내로 옮겼으나 무겁고 큰 것은 옮길 수가 없었다. 겨울 동안 잎들이 누렇게 말라갔다. 그래도 열심히 물을 주었다. 봄이 되면 회생할 줄 알았던 나무들은 기대를 저버렸다. 모두 추위를 이겨내지 못해서인지 죽어버렸다. 가을 한 계절 짧게 그들의 생명을 연장해 준 것에 불과했다.
놀라운 것은 어디에서 홀씨가 날아왔는지 발코니 화분에 이름 모를 풀잎이 고개를 내밀었다. 키우려던 고무나무는 없어지고 엉뚱한 방문객이 찾아온 것이다. 흔한 잡초같이 여겨지지 않아 계속 물을 주었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키가 쑥쑥 자랐다. 봄볕에 힘입어 꽃대 위에 작은 꽃망울이 맺혔다. 가장자리에 자주 색깔을 띤 하얀 망초꽃 네 포기가 피었다. 잡초인 줄로만 여겨 뽑아버렸으면, 저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을까. 다행한 선택이었다.
일찍이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이 아닌 사람이 없으되,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다.”라 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모든 것이 잡초가 되거나 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기(禮記)》에는 ‘무불경(毋不敬)’이란 말이 나온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 된다. 아주 작은 미물(微物)이나,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각자의 존재 이유가 있으므로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아름답고 완전한 하나뿐인 꽃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 스스로가 잡초에 불과할 뿐이라는 좌절감에 빠졌을 때가 있었다. 고난에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나, 라는 자조적 웃음을 지은 때가 있었다. 그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했을 때, 스스로 잡초라고 폄하(貶下)하는 것 또한 그분을 욕되게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런 시를 써 보았다.
“어느 봄날 풀숲에 숨은/작은 들꽃이 그분에게 물었다./ ‘우리도 예쁜 꽃인가요’/‘그럼, 예쁘지. 너희도 내가 만든 꽃이니깐’/그분의 대답이다./그렇다. 우리 모두 하나뿐인 꽃이다.”
그렇다. 잡초로 태어난 풀은 없다. 어쩌다 불편한 자리에 놓였을 뿐이다. 잡초는 없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보는 자의 눈길에 따라 머무르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