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까맣다.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데.
연일 계속되는 장맛비와 염천더위에 시달리다보니 복날 꼬박꼬박 챙겨먹었던 보양식도 약발이 제대로 듣지 않는다.
나른하고 무기력해지기 시작하는 하오.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꺼풀과 씨름을 하다 꾸벅 잠이 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선율소리.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후배 놈이 책상 위에 두발을 올려놓고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에 맞춰 발을 까딱이고 있지 않은가.
부용산. 순간 놈이 이 노래에 깃든 사연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 계속된 잔소리.
부용산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이다.
벌교여중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다 벌교공원과 갈림길에서 계속 전진하면
차마 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100미터 남짓의 야산이 나타난다. 부용산(芙蓉山)이다.
옛날 사람들에겐 노래로 더 친숙하다. 여기서 부용은 연꽃을 의미한다.
“부용산 오리 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 회오리 바람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 재를 넘는 석양은 / 저만치 홀로 섰네 /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
돌아서지 못한 채 /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 부용산 저 멀리엔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박기동 작사․안성현 작곡)
부용산은 노래도 그렇지만 그에 얽힌 사연도 애틋하다. 창작을 둘러싼 일화도 여럿이다.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 박기동과 음악교사 안성현이 작사․작곡 했다는 것만이 확인된 사실이다.
곡을 붙였던 안성현은 한국전쟁 중에 월북했고 가사를 쓴 박기동은 1993년 호주로 이민을 갔다가
정치난민으로 분류돼 호주에서 살고 있다. 노래만큼이나 노래를 만든 사람들의 삶과 운명도 기구했다고 할 수밖에.
일설에 따르면 부용산은 1947년 목포항도 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정희라는 학생이 폐결핵으로 죽자
이를 추모해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글을 쓴 박기동은 후일 1947년 보다 몇 해 앞서
일찍 죽은 여동생을 추모해 쓴 것이라고 밝혔다.
부용산은 상급생인 배금순이 처음 불러 금방 전남지역 일대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 작곡가인 안성현이 월북하고 빨치산들이 이곡을 애창하면서 금기시 됐고
호남지역 일부에서만 구전돼 왔다고 한다.
사실 부용산은 가사의 내용만 두고 봤을 때 일체의 이념적 내용이나 지향성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치산이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랫동안 금기의 노래로 터부시 돼온 것이 사실이다.
부용산은 원래 1절 밖에 없었다. 1999년 5월 연극인 김성옥이 작사자 박기동을 찾아 호주까지 가서 2절을 받아 돌아와
현재의 꼴을 갖추게 됐다. 부용산 탄생 52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박기동이 참석한 가운데 부용산 자락 앞에서 시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부용산을 작곡한 안성현은 월북 무용가 안막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안막은 우리나라 최고의 춤꾼이었던 최승희의 남편으로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했고
한국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이후 북한에서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작사자 박기동은 여수 돌산 출신으로 일본 간사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 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으며
1947년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가 1948년 목포항도여중에서 안성현을 만난다.
유난히 예뻤던 누이가 열여섯 나이에 폐병을 앓았고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다가 24세 때 죽었다고 한다.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 자락에 묻고 내려오면서 지은 노랫말이 부용산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을 때다.
93년 호주로 이민을 갔던 박기동은 정치난민으로 분류돼 호주당국에서 주는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십여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꿈은 의외로 소박했다.
고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집과 수필집, 단편집을 한권씩 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의 꿈은 미완의 꿈으로만 남을 것 같다. 그래서 아름다운.
첫댓글 빨리 장가가라,,,그럼 외로워질 틈이 없을거당,,,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