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색 포대기
김 경 희
손주 복이 터졌다. 요즘같이 결혼도 하지 않을뿐더러, 비록 하더라도 아기 갖기를 꺼리는 시대에 나는 용케도 아이 셋 가운데 둘을 짝지어 주었고, 보너스로 물새알 같은 손자 두 명 손녀 한 명을 얻었다. 세상 시름을 다 잊은 듯 마음이 풍선처럼 부푼다.
그 덕분에 몇 년 사이 생활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근처에 사는 딸이 수시로 나의 도움을 기다린다. 자식이 어미 손길을 필요로 하는데 모른 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하던 일을 접고 손자 돌보는 시간을 만들었다.
먼저 아기를 업기 위해 서둘러 포대기부터 장만했다. 그러고 나니 아뿔싸! 내 아이를 키웠던 친정어머니가 사준 포대기가 뒤미처 생각이 난 것이다. 가난과 속정이 흥건하게 서린 포대기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세월의 고개를 많이도 넘겼다.
허겁지겁 장롱이며 창고를 뒤졌다.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아무리 찾아도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안 되겠다 싶어 포기하려는 순간, 창고 맨 안쪽 빛바랜 옥색 보따리에 꽁꽁 묶여 있는 포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풀어헤치니, 실밥 올이 너덜너덜하게 풀리고 솜이 삐죽삐죽 터져 나온 낡은 기명색 포대기 속에 어머니의 세월이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첫아이를 낳은 날, 어머니는 포대기를 사 들고 단숨에 달려왔다. 이마에는 겨울을 무색게 하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순산해서 다행이다. 설마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냐.”
직장이 없는 사위 눈치를 살폈지만, 오히려 사위를 위로하는 당신의 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손녀를 얻은 기쁨보다 식구가 늘어난 데 대한 걱정이 가득함을 눈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속바지 안에 차고 다니는 주머니를 꺼내 꼬깃꼬깃 접힌 쌈짓돈을 건네며 내 손을 꼭 쥐었다.
“일반미 한 가마니 사서 밥해 먹어라. 그래야 산모가 젖이 잘 나온다. 손녀라 기명색을 샀다.”
당신이 좋아하는 색을 고르셨다고 덧붙였다. 그리곤 방문을 꼭 닫아주며, 노점을 지키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듯 한달음에 떠나셨다. 어머니가 가시고 난 방이 젖빛 모성애로 자욱하여 나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린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서모와 그 수하들은 잔인하게도 우리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곤 수시로 폭력을 쓰고 괴롭혔다. 그 폭력과 괴롭힘을 못 견뎌 오빠 내외는 어머니와 조카 셋과 함께 무작정 고향 집을 나와버렸다.
전답을 두고 떠나온 도시 생활은 예상과 달리 경제적인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빠 내외는 트럭을 몰고 장사를 시작하고, 어머니는 집 앞 아파트 벽에 천막을 치고 과일을 팔았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언제나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집간 딸이나마 걱정 없이 살 줄 알았는데, 결혼과 동시에 사위가 직장을 그만두고 책장만 넘기고 있었으니……. 만삭의 배를 안고 친정을 들락거리는 딸을 보면서 어머니는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두 집 다 합쳐도 밥 한술 제대로 뜨는 자식이 하나 없는 데다 내 배는 중천에 걸린 보름달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으니, 어머니의 당시 심경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직장까지 버리고 비정한 아버지와 맞서는 아들을 보면 미안함에 가슴이 아려왔다. 딸은 어미 팔자를 닮는다는 속설에 눈가가 촉촉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과일을 팔면서 살림까지 도맡았다. 농촌에서는 귀한 것일수록 이웃끼리 서로 나누어 먹었지만, 그런 것들을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 처지니 손이 부끄럽다고 하셨다. 하루하루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나날이었어도 형편은 좀체 나아지질 않았다.
매서운 겨울날 천막 사이로 황소바람이 불어오면 소쿠리에 담긴 사과며 배, 밀감 등이 와르르 무너져 길거리에 나뒹구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잰 몸동작으로 흩어진 과일을 소쿠리에 주워 담았다. 엉거주춤하게 굽힌 허리 사이로 구멍 난 내의가 바람에 아우성을 쳤던 그때의 잔상이 오랜 시간이 흘러간 이 날 이때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모습이 내 어머니가 아닌, 자식 없는 불쌍한 이웃 노인이길 착각하며 고개를 돌리고 울음을 삼켰다.
온종일 장사를 잘해봤자 찬거리며 손주들 주전부리 마련하기도 빠듯한 이문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했던가. 해산 달이 다가오는 딸자식 땟거리 걱정에다 외할머니가 포대기를 사주는 풍습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딴 주머니를 차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허리조차 못 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