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도 봄 맞이 한창이다. 오미크론에 대비하여 등교 상황도 준비하고 있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교직원 확진에 대비하여 업무가 끊기지 않도록 다양한 대안들을 마련 중에 있다. 지난 한 주간에는 사흘간 꼬박 교육과정을 톺아보고 새롭게 맡게 될 학년 담임도 정했다. 모두를 만족시키기가 어렵기에 최대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며 새학년살림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지 그림을 그렸다. 현재까지는 스케치만 한 정도다. 앞으로 색을 입히고 보완하고 그림을 완성하기까지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되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균형있게 작품이 완성해 가도록 지원하고 조율하는 역할이 각 학교의 교감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닌가 싶다.
<봄이다, 살아보자>의 저자 나태주 시인도 한 때는 학교의 교감으로 살았을 것이다. 교장으로 퇴직했으니 말이다. 그가 한 때 전문직으로 교육청 장학사로 복무할 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며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는 이야기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순간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에게 교감이라는 옷이 어울리나?', '나는 교감이라는 역할을 즐기며 신명나게 일할 자신이 있는가?'. 누구든 자신이 하는 일이 즐거워야한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억지로 하거나 스트레스만 받으며 일한다면 얼마나 불행하나! 나태주 시인도 당시 장학사로 일하면서 그토록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짓는 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일이 가장 큰 불만이었을것 같다. 남들이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자리도 시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나보다. 감정을 시로 담아 표현하고 시로 타인을 위로하는 삶을 여든이 되도록 즐겨 하고 있는 시인은 20대에 시작한 시에 대한 애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면에서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무엇에 열정을 쏟고 있는지, 가장 즐겨하는 일은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봄이다, 살아보자>에서 나태주 시인은 모두가 사회적 상황과 이념에 관한 시를 쓸 대 본인만 유일하게 개인적인 시를, 감정을 다루고 표현하는 시를 창작했다고 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주류에서 벗어난 비주류의 시인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퇴직 후부터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시를 알아주는 독자들이 생기면서 뒤늦게 성공한 시인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 나이 즉 시 인생이 50이라고 하니 50년 동안 무명 작가의 삶을 살아온 거다. 우직하게 한 우물만 파며 살아온 삶의 결과가 인생 후기에 펼쳐진 셈이다.
나는 성미가 급한 편이다. 무슨 일이든 빨리 해 치워야 속이 편하다. 눈 앞에 할 일들이 쌓여 있으면 왠지 불안감을 느끼기에 일단 제출 기한 전에 일치감치 작업을 대충 해 놓는 편이다. 결과에 쫓기는 삶을 살다보니 여유가 없다. 사물을 고요하게 바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일 중심의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에서 나태주 시인이 말하는 인생론은 나의 삶의 결과 다르기에 왠지 비교가 된다. 누구에게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풀꽃이다.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풀꽃 하나하나에 고유한 생명이 있고 특징이 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부럽다. 올 한 해 뭔가 성과를 낼라고 조급해하기보다 그냥 1년을 살아 버터내면서 지나온 삶을 복기해 보는 삶도 참 좋을 것 같다. 작년까지 책도 무진장 많이 읽으려고 욕심을 과하게 냈다. 독서량에 치중한 나머지 한 권 한 권을 깊게 음미하며 읽지 못했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좀처럼 그게 잘 안 된다. 왠지 뒤쳐질 것 같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세가 지긋히 든 나태주 시인의 생각을 읽어보노라면 인생을 좀 더 긴 호흡으로 살아가보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지난 주 사흘간 새로 전입해 온 선생님들과 휘몰아치듯 회의하고 연수를 진행했다. 그렇게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그런데 뒤돌아보니 이것조차도 나의 욕심인 듯 싶다. 한 템포 쉬엄 쉬엄 살아가는 인생 이야기를 읽으니 좀 천천히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