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척하지 말고
김 상 립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인기척을 내면 깨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부러 자는 척 하는 사람은 웬만한 큰 소리로 불러도 소용없다. 지금의 세상은 꼭 밝혀져야 할 어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위에서 시키는 일이 양심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제게 손해가 돌아 올까 봐 자는 척하고 만다. 조직 내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음모를 밝히려 해도, 주변에서 의리라는 얼토당토않은 무기를 내세워 압력을 가하니, 당사자는 못 이겨 자는 척 하게 된다. 집단이기주의가 정상적인 사람들을 억지로 잠자게 만들고 있는 현장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생길 것 같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면서, 불리할 것이라 여겨지면 일부러 자는 척, 연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이다. 이런 일은 우리 사회가 오직 급속성장만을 목표로 숨가쁘게 달려온 결과 지나치게 성공제일주의에 젖은 탓일 게다. 흔히 우리는 말끝마다 출세를 들먹이며 성공한 사람만이 인간 대접을 받는다는 분위기를 풍기니, 사회초년생들은 더욱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모두가 특정적인 성공 모습만 삶의 목표로 삼도록 독려하는 일은, 이기적인 경쟁관계가 우선시되는 사회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앞장 서서 이런 일을 멈추도록 노력해야 할 인생 선배들도 뒷짐만 지고 섰다. 아마 섣불리 나섰다가는 어떤 구설수에 말려들지 모르니 차라리 모른 척 하는 게 편하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리라.
원래 경쟁관계는 지는 사람이 있어야 이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운동경기를 보아도 당당하게 패한 팀이 억지로 우승한 팀보다 더 호감이 간다. 또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 보다는 정직하게 지는 사람이 더 나은 평가를 받는 게 옳다. 하지만 실제 세상 돌아가는 모양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씁쓸한 심사다. 학교에서도 경쟁에서 깨끗이 지는 법을 상세히 일러주지도 않지만, 막상 경쟁에서 졌을 때도 그것을 의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라 한다. 학교에 대한 외부 영향력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까닭에 학교측에서는 학부형들이나 상부기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판세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제 실력은 뒷전으로 미루어 두고 무조건 이길 방법만을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날이 계속되니 더 크고, 더 많고, 더 힘센 것을 올려다 보며, 개인적 성공만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양산해 내는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젊은 이들 사이에는 카푸어(Car poor)족이란 말도 나돌고, 부동산 시장에서도 하우스(House poor)푸어란 말이 있다. 소위 있는 척 하려 무리수를 쓰니 생활이 가난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을 것이다. 지방세미납으로 강제 징수하러 나가 압수수색을 하게 되면 꼭 현금다발과 명품가방이 줄줄이 발견된다는 뉴스를 여러 번 보았다. 모두가 ‘척’ 탓이리라. 더욱이 지도층까지 척하는 행위가 유행처럼 번져나가니 걱정이다. 힘있는 사람들은 만약 본인이 위법한 일을 했다 해도 시인하기는커녕 끝까지 아닌 척 한다. 또 부정을 저지르고도 절대 그런 일 없다고 마지막 재판이 끝날 때까지 척하며 우긴다. 뒤로는 돈을 밝히면서도 앞으로는 아주 청렴한 척하고, 자신의 이익을 유독 우선 하는 사람이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척 떠들어 댄다. 물론 이런 일들은 가만히 두어도 세월이 가면 모두가 들통이 나야 하는 법인데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니 문제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갖고 싶어 하는 돈과 명예나 권력 중, 어느 한 가지도 변변하게 갖추지 못했지만 가진 자보다 더 가치있게, 행복하게 한 생애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가난하지만 더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으로 베풀고, 자기의 고통도 만만치 않은 데 남의 일을 제 것처럼 도맡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얘기가 깊은 감동을 준다. 심지어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장기(臟器)나 목숨까지도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내놓기도 하니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권력자나 부자가 여러 사람들을 도운 사례가 적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권력이 크거나 돈이 많게 되면, 더 가짐으로써 가짐 자체에 얽매여 도리어 남에게 베풀 마음이 사라지기 십상이라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지금 나는 짙은 황혼 속을 걸어가는 처지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내 영혼 앞에서는 ‘척’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그러나 사방에서 척하며 숨통을 조여오니 힘이 달리는 것은 사실이다. 별수 없어 안 보고, 안 듣는 내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가능하면 뉴스는 물론 휴대폰 보는 일도 대폭 줄이고, 유투버들의 개인방송은 거의 보지 않는다. 대체로 말도 많고, 목 소리 큰 모임에는 오라 해도 가지 않고, 높은 사람이 출판기념회나 발표회를 한다면 일부러 다른 쪽으로 시간을 낸다. 오늘도 나는 정중히 무릎을 꿇고 빈다. 제발 그 놈의 척 같은 짓과는 먼 발치에서라도 얽히지 말고 살게 해달라고.
첫댓글 제가 직원들에게 항상하는 말이 아는 척하지 말고 아는 것만 말하라고 합니다.
자칫 모르면서 아는 척했다가 큰일로 확산되는 일이 제 업종에선 비일비재하답니다.
남평 선생님 글을 읽고 감히 위로를 받습니다. 미미하나마 다른 이의 인생 마무리를 돕는 일을 합니다. 남편은 반찬을 만들어 간접적으로 그분들을 돕고요. 척 할 건덕지도 없는 저희지만 보람있어 신명이 납니다.
늘 교훈이 되는 글들 써 주심에 머리 숙입니다.
가치있는 일을 하고 보람을 느끼면 그게 최고의
인생입니다. 부군과 함께
라니 행복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