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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안동선비순례길 2코스(도산서원길)
여행일 : ‘24. 9. 7(토)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일원
여행코스 : 월천서당→산림문화휴양촌→경북산림과학박물관→분천리마을회관→도산서원→퇴계종택(거리/시간 : 11.3km, 실제는 경북산림과학박물관부터 7.71km를 2시간 4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 문화유적을 함께 즐길 수 있는 91km(9개 코스) 길이의 자연 친화적 탐방로이다. 길 위에 안동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서원이나 고택, 현대판 선비의 흔적인 이육사문학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선성수상길, 울창한 숲길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천천히 걸으며 힐링 관광 할 수 있는 최적의 트레일로 알려진다.
▼ 트레킹 들머리는 월천서당(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중앙고속도로(춘천-금호)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안동방면으로 내려오다, 지곡교차로에서 928번 지방도(녹전방면으로 28km), 녹전삼거리에서 935번 지방도(안동방면으로 8km), 서부교차로에서 35번 국도(태백방면)로 옮겨 1.8km쯤 올라가다 ’경북산림자원개발원‘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3.8km쯤 들어오면 2코스 들머리인 ‘월천서당’에 이르게 된다.
▼ ‘월촌서당’에서 시작되는 ‘2코스(도산서원길)’는 퇴계선생의 생애와 함께했던 길이다. 퇴계의 후손들이 청빈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원촌마을’까지 ‘도산구곡 길’ 어느 구간보다도 퇴계의 숨결이 살아있는 길이다. 스승인 퇴계 이황과 제자인 월천 조목이 서로 오가며 만났다고 해서 ‘사제의 길’로도 불린다.
▼ ‘월천서당(月川書堂)’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라고 한다. 안내판은 중종 34년(1539)에 세웠다고 적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이 15세에 벌써 제자를 키웠다는 얘기인데 그게 사실일까? 아무튼 월천은 어려서부터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수제자로 알려지는 인물이다. 그래선지 현판을 스승인 이황이 직접 써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담장너머 먼발치에서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월천선생 고택(편액은 ‘舊宅’이라 적었다)도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조목(趙穆)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경전 연구에 주력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이황의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단다.
▼ 월천서당에서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중 2곡과 3곡을 만날 수 있다. 서당 앞 도선장(渡船場)으로 나오면 제2곡인 ‘월천곡(月川曲)’과 마주하게 된다. 참고로 도산구곡은 각 구간마다 명촌(名村)들이 세거해왔다는 점이 독특하다. 퇴계 선생의 직계 제자와 후손들이 거의 500년 세월 동안 이 도산구곡에 포진해 있었다. 그중 2곡에는 ‘횡성조씨(橫城趙氏)’들이 살았다. 월천서당의 주인인 ‘조목’이 대표적이다.
▼ 시선을 왼쪽으로 비틀면 제3곡인 ‘오담곡(鰲潭曲)’도 눈에 담을 수 있다. 온전한 모습이 아닌 끄트머리에 불과하지만 입맛이라도 살짝 볼 수 있으니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3곡에는 ‘단양우씨(丹陽禹氏)’들이 세거했다. 퇴계가 존경하던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서원이 있었다.
▼ 월천서당에서 ‘안동호반자연휴양림’까지는 데크 길이 이어진다. 길고 가파른 계단이 끝 간 데 없이 계속된다. 거기다 울창한 숲속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조망도 트이지 않는다. 쉽게 말해 얻는 것 없이 고생만 잔뜩 하는 구간이라는 얘기다. 이게 싫은 나는 도반 몇 명과 함께 이 구간을 생략하고 대신 주변의 다른 명소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한국문화테마파크’. 2,000여개의 산성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형 특성을 공간개념으로 설정해놓은 체류형 복합문화단지로, 산성마을과 연무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렉티브 체험시설, 어드벤처 챌린지시설, 상설 공연장 등도 갖추고 있단다,(사진은 트레킹 ‘道伴’이자 작가이신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왔다. 평소에도 이분의 사진을 자주 빌려 쓴다)
▼ 안에는 다양한 체험장과 놀이마당 등의 저잣거리가 꾸며져 있어 즐길거리·먹거리·볼거리로 넘친다고 했다. 선비체험관에서는 유교정신을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단다. 백발의 나이에도 부모를 위해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는 농암선생의 효(孝), 퇴계선생의 건강법과 자연관 등 자취를 따라가는 경(敬), 노령의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의병지원에 적극 협조한 월천 조목선생의 충(忠)이다.
▼ 하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제3차 Super Hiking in Andong(9.7~9.8)’이 열린다며 일반인의 입장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은 차치하더라도 홈페이지에는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야하지 않았을까?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 건너편에는 ‘안동국제컨벤션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최대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홀, 동시 700명 수용 가능한 13개의 중‧소회의실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부대시설인 ‘세계유교문화박물관’은 컨벤션센터의 자랑거리. 라키비움 형식의 박물관으로 유교지식 디지털아카이브를 구축해 전 세계 이용객에게 세계유교지식 정보와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단다.
▼ 하지만 이곳도 역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살펴보지 못한 유교문화의 아쉬움을 ‘군자상’으로 달래며 발길을 돌린다. <군자는 화합하나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동조하나 화합하지 않는다.> 안동시의 미숙한 행정에 큰소리를 내지 않고, 쯧쯧 혀만 차는 선에서 발길을 돌리는 내 행동이 곧 군자가 아니겠는가.
▼ 디지털 스포츠 테마파크인 ‘놀팍’의 현수막. 의병을 소재로 헬스케어시스템까지 갖춘 첨단시설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20종의 콘텐츠로 구성돼 있단다. 콘텐츠에 따라 근력·지구력·유연성·순발력·민첩성 등 다양한 신체적 기능을 필요로 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어 체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나?
▼ 12 : 15.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산림문화의 보존과 산림의 소중함을 체험하도록 설립한 박물관으로, 4개의 전시실에 산림의 역사, 산림 정책, 산림자원의 활용, 산림보호 등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 입구의 조형물. ‘自然으로부터 산, 강, 들’이란 작품인데, 예술에 문외한이라선지 조형물이 품은 속뜻은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 멋진 인공폭포도 만들어놓았다. 이밖에도 영지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이용해 만든 습지산책로, 산촌의 가옥(너와집·귀틀집), 분수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상부의 분수대 옆에는 전국의 황장금표도 전시되어 있었다.
▼ 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양옆에 경상북도를 위시해 예하 시·군의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각 시군의 캐릭터와 꽃·새·나무 등을 일일이 소개해 준다.
▼ 안동시의 꽃은 매화라고 한다. 맞다. 고결함이 군자와 같다는 꽃이니 안동시의 꽃으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 12 : 23. 박물관은 문이 닫혀 있었다. 박물관 휴관일은 ‘월요일’이 아니었나? 왜 문을 닫았는지는 알려주지도 않은 채, 건물 전체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적막강산이다. 아무튼 4600여점이나 된다는 유물을 하나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12 : 25. 박물관 밖으로 나와 35번 국도(퇴계로)를 따른다. 북진하여 ‘송티고개’를 넘는다고 보면 되겠다. 참고로 ‘송티’는 600여 년 전부터 예안시장을 오가던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넘다 쉬던 고개로,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12 : 29. 첫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 ‘송티길’로 들어간다. 초입에 ‘분천리’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확히는 ‘송티(松峙)’ 마을이다. 넘티(‘넙티’나 ‘廣峴’으로도 불린다)과 함께 ‘분천리’를 이룬다.
▼ 이곳에서 ‘안동선비순례길’과 만났다. 이정표는 월천서당에서 이곳까지를 6.0km로 적고 있었다. 내 앱은 0.63km를 찍는다. 5.4km. 즉 11.3km인 2코스의 절반을 생략해버린 셈이다.
▼ 12 : 33. ‘분천리’ 마을회관. 고려 말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이헌(李軒)이 붙인 지명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영천을 떠나 돌과 물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는데, 마을을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맑게 흐르므로 ‘부내’라 하였다는 것이다. 분천(汾川)은 부내의 한자식 표기다.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했는데, 이현보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 임도를 따라 낙동강 쪽으로 간다.
▼ 12 : 40. 그렇게 잠시 내려가자 삼거리가 나왔다. 이정표(퇴계종택 3.8km/ 월천서당 6.6km)는 왼쪽으로 갈려나가는 오솔길을 따르란다.
▼ 이정표가 ‘퇴계예던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을 새롭게 복원해놓은 안동의 걷기 여행길이다.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이게 ‘안동선비순례길’과 중복되는가 보다.
▼ 우린 낙동강 쪽으로 조금 더 나가보기로 했다. 도산구곡 중 제4곡인 ‘분천곡(汾川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하는 영남 풍류의 창시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를 전후한 ‘영천이씨’들의 600년 세거지다. 하나 더. 예로부터 청량산에서 발원 도산서원을 거쳐 부내 외곽으로 흐르는 물을 ‘낙강’이라 했다. 분강촌 앞에서 강물이 두 줄기로 갈라졌으므로 분수(分水)·분천(分川)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강에 농암이 자신의 호로 삼은 ‘농암(聾巖)’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 12 : 43. 하지만 ‘농암’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동댐 수위가 낮아질 때 모습을 드러낸다니, 조금 더 물이 빠져야 드러날 모양이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벼슬을 버리고 부내에 살던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이황(李滉)을 비롯한 지기들을 불러 배를 띄우고 노닐던 풍경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되돌아 나왔다.
▼ 12 : 47. 삼거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오솔길을 따라간다. 인적이 뜸한 산길이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다.
▼ 저게 ‘사랑나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속물이라서 일까? 아니 함께 걷던 도반께서도 ‘사랑나무’가 분명하다고 했다. 사랑을 나누는 몸짓이 분명하다면서...
▼ 12 : 53. 건너편에는 영지산(443.4m)이 우뚝하니 솟아올랐다. 그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 ‘애일당’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다. 애일당(愛日堂)이란 1533년 농암 이현보가 94세의 아버지 이흠(李欽)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외숙부 김집(金緝)을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소일할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경로당이다. 그러니 어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결론부터 말하면 ‘애일당’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여염집으로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있었을 따름이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애일당’은 애초부터 없었고, 왜 그런 표시가 되어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안동호에 물이 채워지던 무렵 잠시지만 ‘영천이씨(이현보의 본관)’의 제사(祭舍)가 있었을 뿐이란다.
▼ 주민분이 멀리서 온 길손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우리 일행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다시피 한다. 그리고는 넝쿨에 매달려 있는 참외를 실컷 따먹으라 하신다. 아니 손수 따주며 농암선생과 퇴계선생 등 지역에서 배출한 선현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 이 마을에서 태어난 주인장은 부산에서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하지만 7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 땅 3만 평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는 ‘광운사(光運寺)’라는 절을 짓고, 자신의 법명을 ‘아난’이라 했다나? 모든 사람이 마음의 눈을 떠주기를 빌면서...
▼ 13 : 09. 마을을 빠져나와 ‘도산서원길(이정표 : 퇴계공원 3.6km/ 월천서당 7.2km)’로 올라선다. 그리고는 도산서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몇 걸음 더 걸으면 ‘광현고개’이다. 이현보의 ‘농암가비(聾巖歌碑)’가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농암가(聾巖歌)’는 1665년에 간행된 이현보의 ‘농암문집(聾巖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는 기쁨을 노래한 작품으로, 작자가 서울에서 오래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암에 올라 산천을 두루 살피니 옛 자취가 너무나 의연함에 기뻐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 광현고개를 기점으로 길은 내리막으로 변한다. 2차선 도로지만 울창한 숲속을 요리조리 헤집으며 내놓은 덕분에 숲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 길섶에서 노닐던 귀한 손님을 만났다. 독일은 사슴벌레의 머리를 재산을 모아들이는 행운의 장식으로 여기며, 터키인들은 악을 물리치는 호패로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알려진다. 그러니 이 아니 행운이겠는가.
▼ 도산서원(매표소)에 가까워질 무렵 오른쪽 물가에서 ‘간석대 답청(磵石臺 踏靑)’이란 시비를 만날 수 있었다. 퇴계 이황이 62세이던 1562년 요 아래에 있는 ‘석간대(石澗臺)’에 와서 예전에 농암 이현보선생을 모시고 노닐던 감회를 읊은 시라고 한다. 뒷면에는 제자인 구암(龜岩) 이정(李楨, 1512-1571)과 헤어지면서 써 준 당나라 시인 유상(劉商)의 시를 새겼다. 원래는 석간대에 새겨져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석간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저렇게 모사(模寫)해 옮겨놓은 모양이다.
▼ 13 : 30. 도산서원의 집단시설지구에 도착했다. 도산서원의 입구로, 매표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편의점과 분식점은 물론이고 특산물판매점에 서점까지 눈에 띈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답게 서원은 관람권을 사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그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이니 무턱대고 들어가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자. 먼저 하마비(下馬碑)가 걸어갈 것을 지시한다. 다음은 입구에 설치해 놓은 각종 안내판을 꼼꼼히 살펴보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 서원으로 가는 길은 고왔다. 보드라운 흙길은 걷기에 딱 좋고, 곳곳에 설치해놓은 각종 조형물은 잠깐의 눈요깃거리로 충분했다.
▼ 서원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고 했다. 저곳에서 신청하면 해박한 지식으로 꼼꼼하게 안내해 준단다.
▼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의 후손 공덕성(孔德成)이 쓴 글을 새긴 빗돌이라고 한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을 이르는 사자성어다. 1981년 공자의 77세손인 공덕성 박사가 도산서원을 찾아와 참배한 후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음에 감동하여 적은 글이라나?
▼ 서원 마당에 이르기 직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가 반긴다.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天光雲影共排徊)’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 이곳은 ‘시사단(試士壇)’를 바라보는 전망대이기도 하다. 시사단은 정조 때 별시가 열렸던 곳이다. 1792년 정조가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해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신설하여 안동 지역의 인재를 선발토록 한 데서 비롯된다. 당시 응시자가 너무 많아 강 건너 들판으로 시험장을 옮겼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10m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비각과 비를 옮겨 놓았단다.
▼ 반대편 절벽으로도 산책로가 나있다. 500년 전 퇴계가 사색에 잠겨 걷던 ‘한국판 철학자의 길’이다.
▼ 그 끄트머리에는 ‘천연대(天淵臺)’가 있었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漁躍于淵)’라는 구절에서 ‘하늘 天’과 ‘연못 淵’자를 따서 지었다.
▼ 천연대는 도산구곡의 제5곡인 ‘탁영담곡(濯纓潭曲)’이 가장 잘 조망되는 곳이다. ‘갓끈을 씻는다’는 뜻의 탁영(濯纓)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했다. 강남으로 귀양 온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틀리고 자신만의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며 노래했다는 고사다.
▼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에 있어서 크게 퇴계가 생전에 건축한 서당 구역과 사후에 조성된 서원 구역으로 구분된다. 도산서원은 1561년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강학과 수행을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기반으로 지어졌다. 사후에 그의 문인이었던 권호문(權好文), 금난수(琴蘭秀) 등이 발의하여 서당이 있던 자리 위쪽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했다. 1574년 서원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다음 해인 1575년 사액되어 석봉 한호가 쓴 편액을 하사받는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의 위패를 함께 모신다. 성덕사와 삼문, 전교당, 농운정사, 도산서당 등 4곳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서원 앞 광장, 땅에 닿을 듯이 길게 누워있는 왕버들나무가 오랜 세월 서원과 함께 해왔음을 알려준다. 안동댐에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당을 5m 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나무의 아랫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나무들이 기기묘묘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 열정(冽井). 서당에서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주역(周易)의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冽寒泉食)’에서 이름을 따왔다.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書堂之南 石井甘冽)’는 시를 짓기도 했다.
▼ 서원 구역으로 올라가는 긴 돌계단. 서원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대가 조금씩 높아지고 남북으로 길게 축을 형성하면서 좌우에 건물을 들어앉혔다.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왼쪽에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고,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서당, 왼쪽에는 농운정사가 있다.
▼ 계단의 끄트머리,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서자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이 반긴다. 서원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이란 사액 현판은 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하고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내삼문(內三門) 너머에는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가 있다. 퇴계선생과 월천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데, 일반인에게 개방을 않는지 문이 닫혀 있었다.
▼ 도산서당(陶山書堂, 보물 제2015호).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기거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 완상하여 즐긴다),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이란 현판을 달았다. 둘 모두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서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면서 건물도 고치고 문도 새로 냈지만 퇴계 선생이 거처하던 도산서당만큼은 손끝 하나 안 대고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가 61세에 완공을 본 도산서당은 선생의 공부방인 서당과 학생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보물 제2016호)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기숙사가 포화상태가 되었고, 이에 어린 나이에 입학한 제자 정사성(鄭士誠)의 부친이 기숙사를 따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당호는 ‘벗이 있어 스스로 먼 길을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
▼ 옥진각(玉振閣). 1970년 보수를 할 때 지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이다. ‘집대성 금성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단다.
▼ 안에는 퇴계선생에 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고 있었다. 덕분에 선생의 철학을 주마간산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 선생의 각종 유품도 전시해 놓았다. 자리·베개 등의 실내 비품과 매화연(梅花硯)·옥서진(玉書鎭) 같은 문방구, 그밖에 청려장(靑藜杖)·투호(投壺)·혼천의(渾天儀) 등도 눈에 띈다.
▼ 서원 마당에서는 ‘목판인출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퇴계 이황의 좌우명을 목판으로 직접 인출해보는 프로그램이다. 선생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다는 ‘매화’를 읊은 시도 인출해 볼 수 있다니 한번쯤 도전해 볼 일이다.
▼ 퇴계선생은 사무사(思無邪, 간사한 생각을 품지 마라), 무불경(毋不敬,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라), 무자기(無自欺,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신기독(愼其獨, 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바로 하라) 등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 글귀들을 나무판에 새겨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보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단다.
▼ 14 : 34. 매표소 광장으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도산서원길’을 따라 고개를 넘는다.
▼ 고개를 올라가다 ‘도산십이곡’ 시비를 만났다. 도산십이곡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4년이 지난 1565년, 나이 65세 때 지은 시조이다. 오른쪽에 전 6곡(마음이 사물과 자연에 접하여 일어나는 감흥)을, 그리고 왼쪽에 후 6곡(학문과 덕행을 실천하는 내용)을 새겨 넣었다.
▼ 14 : 40. 고갯마루에 닿기 전 오른쪽으로 갈려나가는 임도(이정표 : 퇴계종택 1.2km/ 도산서원 0.9km)로 내려선다.
▼ 이정표는 이 구간을 ‘퇴계명상길’로 적고 있다. 계상서당 앞 퇴계종택에서 도산고개를 넘어 도산서원에 이르는 구간으로 퇴계선생이 생전에 걸었던 길이란다.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선생은 자신의 학문을 정진시키는 한편, 가르침을 받으려고 찾아오는 선비들을 위해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지었다. 그리고는 추운 겨울에는 계상서당에서, 반면에 무더운 여름에는 도산서당에서 강론을 했단다. 이때 도산고개를 넘어 왕래한 길이 ‘퇴계명상길’이다.
▼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버겁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생전에 이 길을 걸었을 퇴계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며 선비걸음으로 걸어볼 일이다.
▼ 14 : 52. ‘도산고개’에 올라선다. 걷기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인지 고갯마루에 평상을 놓아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 고갯마루에서 길이 둘로 나뉘고 있었다. 계속해서 임도(선비문화수련원길)를 따를 수도 있고, 비탈을 따라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퇴계명상길’을 따라가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 고민하지는 말자.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되니 말이다.
▼ 15 : 02. 도산서원의 부설기관인 ‘선비문화수련원’은 2001년 퇴계 선생의 16대 종손인 이근필(2024년 작고) 옹의 제안으로 설립됐다. 이후 수련생이 급증하자 2014년 2원사를 착공 2016년 완공했다. 선비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윤리경영을 내세우는 기업의 경영전략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공직자·기업·임직원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찾아오고 있단다.
▼ 수련원의 아침은 5시 반에 ‘퇴계명상길’ 산책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새벽 산책코스는 퇴계가 머물던 한서암에서부터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도산서원까지 가는 왕복 1.5km 남짓한 산길이란다. 새벽공기 감도는 초록빛 세상을 걸으며, 퇴계선생이 지은 ‘도산십이곡’을 읊조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나?
▼ 수련원 앞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퇴계의 육우(六友 : 梅·菊·竹·松·蓮·自身)로 꾸며진 동산, 군자못(君子塘)이라는 연못, 산책로 등의 조경은 물론이고, 퇴계의 시를 새긴 빗돌 십여 기를 세워놓았다. 한자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글로 번역된 시를 석판에 새겨 빗돌 앞에 놓아두었다.
▼ 자명(自銘). 퇴계의 마지막 작품으로 자신의 평생을 성찰하면서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선생이 지은 2,300여 수의 시들 가운데 자신을 주제로 읊은 유일한 시라고 했다.
▼ 15 : 11 – 15: 17. 퇴계종택(退溪宗宅)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아니 3코스 중 일부를 앞당겨 진행하겠다는 산악회의 결정에 따라 이육사문학관까지 더 걸어야 한단다. 아무튼 2코스는 2시간 40분을 걸었다. 앱은 7.71km를 찍는다. 코스 대부분이 평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척 더디게 걸은 셈이다. 그만큼 볼거리가 많았다고 보면 되겠다.
▼ 조선시대 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살던 집이다. 원래의 종택은 동암(東巖) 이안도(李安道)가 한서암 남쪽에 세웠고, 1715년 정자인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을 별도로 지었다. 이후 10세손 고계(古溪) 이휘녕(李彙寧)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모두 불타 버렸고, 지금의 퇴계종택은 1926-1929년 13세손 하정(霞汀) 이충호(李忠鎬)가 새로 지은 것이다.
▼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正寢 :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이 있는 영역(아래 사진)과, 같은 규모와 양식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추월한수정 영역 뒤쪽에 접한 솟을삼문과 사당이 있는 영역으로 이루어졌는데, 세 영역은 각각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은 1715년 조선 중기의 문신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1654-1725)이 퇴계의 정신을 기리며 세운 정자다. 이름은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가 지은 시 ‘재거감흥(齋居感興)’ 중 ‘공손히 생각건대, 성인의 심법은 천년의 시공을 넘어(恭惟千載心) 차가운 물에 비치는 가을 달빛이라(秋月照寒水)’에서 유래했다. 옛 성인의 마음이 가을 달빛이 비치는 차고 맑은 물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다.
▼ 하지만 1896년 일제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었다. 그러다 1926년 이충호에 의해 종택 본채와 함께 복원되었다. 정면 5.5칸(측면 2.5칸)의 ‘一’자형 평면을 이루는 기거(起居)형 정자로 보면 되겠다. 지금도 수련생들의 강의나 문중 모임의 장소로 이용하고 있단다. 그래선지 관리인으로 보이는 분이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며 소매를 이끌기도 했다.
▼ 오늘도 집사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부부의 계명(誡命)을 잘 따라주었다고나 할까? 부부(夫婦)란 결혼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지아비와 지어미라는 뜻으로, 여기서 ‘지’는 ‘짓다’를 의미하는데, 이는 한집에 사는 두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니 부부는 하나의 짝이라는 생각으로 누구 한 사람이 앞서나가지 않고 늘 함께 나란히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채워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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