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불어넣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상징되는 숨쉬기는 나 홀로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이뤄진다.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 속에서 ‘봄의 전령’이자 ‘씨앗을 자라게 하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니콜라 푸생이 그린 ‘아테네의 역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이어진 전염병의 역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정적 요인이 된 아테네의 역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바람과 허파의 철학
인간은 숨을 들이켜고 내보내는 ‘허파의 주체’… ‘생각’ 없는 호흡은 가능해도 ‘호흡’없는 생명은 불가
타인에게 상처가 생겼을 때 ‘호~’하며 불어주는 건 ‘관계’ 속에서 숨쉬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
전염병의 전쟁터에서 마스크는 무엇을 보호하는가? 호흡기를 보호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무엇을 공격해 생명을 위협하는가? 호흡기, 폐를 공격한다. 바이러스는 무엇에 실려 세상으로 퍼지는가? 비말(飛沫)이다. 비말의 뜻은 ‘튀거나 날아올라 흩어지는 물거품’이다. 갑작스러운 강풍같이, 허파의 공기를 통해 밖으로 나오는 인간의 물기가 비말인 것이다. 인간은 우물처럼 몸 안에 고요한 물을 숨기고 있지 않다. 인간은 태풍을 간직한 바다처럼 ‘에취’ 하며 파도친다. 비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처럼, 인간은 물을 공기에 섞어 사방으로 뿜는 ‘스프레이’다.
이런 단순한 사실에 우리의 모든 삶이 얽매여 있다. 인간이 바로 ‘허파 주체’라는 것을 알려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의식을 통해 존재를 확보하는 주체도 아니고, 모든 경험을 종합하는 초월적 통각(統覺)의 주체도 아니다. 우리는 그냥 숨을 쉬는 자, 숨 쉬는 일에 모든 것이 달린 자, 바람을 들이켜고 내뿜으며 비말을 공기에 실어 날려 보내는 ‘허파 주체’다.
우리가 바람의 존재라는 것, 즉 허파 주체라는 것은 역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최초의 철학 작품 가운데 하나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부터 알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굴복시킨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바로 아테네를 덮친 역병이었다. 루크레티우스는 바로 아테네의 역병을 묘사하며 말한다. “죽음과 질병에 속한 많은 것이 떠돌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들이 어쩌다 우연히 모여서 하늘을 혼란시키면, 공기가 질병을 품게 된다.”(강대진 역) 이 말은 전염병에 대해 우리 시대 의학이 이야기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질병을 품고 있는 것이 바로 ‘공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폐에서 나오는 공기, 기침이 비말을 싣고 가듯 말이다. 전염병이 인간을 쓰러뜨리고, 미세먼지가 인간을 갉아먹는다. 우리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폐를 통해 공기를 순환시키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 조건에서 온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란 바람의 존재, 즉 숨을 쉬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옛사람들은 공기를 만물을 다스리는 원리로 이해했다. 기원전 6세기, 최초의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출현했는데, 그 가운데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결속해 주는 것처럼, 공기(pneuma)는 세계(kosmos) 전체를 감싸고 있다.” 아낙시메네스와 더불어 철학의 역사에 처음으로 ‘프네우마’라는 말이 나타나 만물의 원리 자리를 차지한다.
프네우마는 바람, 공기, 대기 등의 뜻을 지닌다. 그러나 이 말은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의미인 물리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생명체와 관련해, 존재함의 원리 자체인 호흡·숨결을 의미한다. 공기가 생명의 원리라는 생각은 이미 기원전 800년경 호메로스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 ‘일리아스’의 한 부분은 전쟁터에서 다리에 창을 맞은 채 죽어가는 사르페돈을 노래하고 있다. 전우 펠라곤이 사르페돈의 몸에서 창을 뽑자 그는 이렇게 소생한다. “그는 다시 숨을 쉬었고 주위에서 불어오는 북풍의 입김이 꺼져가는 그의 목숨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었다.”(천병희 역) 여기서 북풍의 ‘입김’을 가리키는 말이 ‘프노이에’다. 이것은 한편으론 사르페돈의 목숨을 살리는 숨결이며 다른 한편으론 대기다. 공기를 물질의 일종으로 축소하는 근대 과학의 관점과 달리, 대기 자체와 생명 자체인 숨결 사이엔 차이가 없다. 근대 과학의 관점으로 만물의 원천을 ‘공기’라고 말한 아낙시메네스를 유치하고 조야한 자연과학자처럼 비웃는 이들도 있지만, 고대인들이 원했던 것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었으며, 그 답을 프네우마라는 단어 속에서 사유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존재의 원천으로서의 바람, 프네우마는 물질로서의 공기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는 것’, 바로 영혼에 가깝다. 그러니 공기를 가리키는 프네우마라는 말이 후에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프시케(psyche)라는 말은 영혼을 뜻하는데, 이 말은 ‘숨 쉬다’라는 뜻의 프시코(psycho)에서 나왔다. 바람을 불어넣는 일, 숨 쉬는 일이 영혼의 근본적 의미다. 또한, 정신이나 영혼이라는 의미로 알려진 라틴어 ‘스피리투스’나 ‘아니마’ 역시 ‘바람’을 의미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표현 ‘뤼아’ 또한 바람을 뜻하는 단어다.
영혼으로서 프네우마는 역사적인 문헌 속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에 따라 사는 것과 영(靈)에 따라 사는 삶을 대립시키는데, 여기서 ‘영’을 가리키는 원래의 말이 바로 ‘프네우마’다. 바울이 말하는 ‘프네우마티코스(pneumatikos)’는, 프네우마가 불어 넣어진 자, 즉 신의 숨결이라 할 수 있는 ‘성령’을 받아들인 인간을 일컫는다. 후에 근대에 와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프네우마티스무스(Pneumatismus)’란 표현을 쓴다. 유물론과 반대되는 뜻에서 ‘유심론’을 일컫기 위해 도입된 표현이다.
프네우마라는 말의 뜻이 점점 풍부해져 가는 이 사상의 여정은 무엇을 뜻하는가? 문자 그대로 프네우마의 뜻은 공기였으나, 그것은 마침내 ‘영혼’이라는 이름이 됐다. 존재하는 것들을 살아 있게끔 하는 것, 즉 영혼의 기능을 하는 것, 그것은 바로 공기, 호흡인 까닭이다. 인간은 육신의 삶보다도 앞서, 그리고 육신의 삶에 대해 독립해 의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자인가? 그러나 뇌사자를 보라.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는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숨 쉬는 자로서의 인간이다. 생각 없는 호흡은 가능하나, 호흡 없는 코기토로서의 생명은 생각할 수 없다. 굳이 유대인의 신화를 떠올리자면 신은 자신의 형상으로 된 진흙에 숨을 불어넣었지 자기의식인 코기토를 불어넣지는 않았다. 코기토 이전에 숨쉬기, 프네우마가 있으며 주체는 생각하는 실체이기 이전에 바람과 허파의 주체다.
그런데 허파로 바람을 마시고 뱉는 행위에는 더욱 중요한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숨을 쉰다는 사실은, 주체가 타자(他者)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이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근본적으로 사회성을 지닌다는 것의 징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말(言)이다. 말은 늘 타인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말에 관한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그렇게 달콤한 숨결에서 빚어낸 말들” “말들은 숨결로 이루어지고, 숨결은 생명으로 이루어진다면…….” 숨결이 생명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앞서 보았다. 그런데 인간의 말이란 바로 숨결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숨을 쉬는 자만이 호흡의 흐름을 사용해 말도 할 수 있다. 시의 운율은 호흡이 지닌 리듬에 말이 의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표이리라. 슈테판 츠바이크는 시인 횔덜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호흡이 바로 시작(詩作)이었다.” 인간이 말하는 것의 뿌리에는 인간의 호흡법이 있으며 횔덜린의 말하기, 즉 시가 그 호흡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향해서 우리가 열리는 방식, 즉 말하기의 바탕에는 호흡이 있다.
숨 쉰다는 것이 주체 혼자 고독 속에서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징적 형식을 지니는 인간의 어떤 이타적 행위’ 속에서도 목격된다. 어린아이 시절부터 우리가 해오던 것인데, 타자에게 생채기가 생겼을 때 무엇을 하는가? 상처에 입김을 부는 행위를 한다. 상처를 향한 이 입김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글이 박완서의 ‘사랑의 입김’이다. “다치거나 물것에게 물린 자리에 약을 발라줄 때마다 ‘호오, 호오’ 하면서 상처에 입김을 불어 넣어줬는데 그것이라도 해달라는 것 같았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얼굴을 끌어당겨 이마에 정성껏 ‘호오’를 해주었다. 녀석은 눈까지 스르르 감으면서 그렇게 마음이 놓이고 느긋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따뜻한 입김에 상처를 내맡겼을 때 어린 마음을 푸근히 감싸주던 평화로움은 이 나이가 되도록 잊히지 않는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숨 쉬는 인간은 그 숨 쉰다는 사실로부터 타인을 치유하는 힘 또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힘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상처에 입김을 불어넣는 것은 정말 인간의 존재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놀라운 상징적 행위다.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는 가장 근원적인 일, 즉 숨 쉬는 일을 타인의 치유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상처에 불어넣는 입김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무인도에 갇힌 이처럼 혼자 숨 쉬는 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숨 쉬는 자, 또 타인을 위해 숨을 사용할 수 있는 자임을 알린다.
또한 숨 쉬는 일은 우리가 저 혼자의 발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질성으로부터 영감을 얻고서 존재하는 자임을 알려준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의한 나의 영감(inspiration·들숨)”이라고 쓰고 있다. 흔히 ‘영감(靈感)’으로 번역되는 ‘inspiration’의 원래 뜻은 외부의 이질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들숨’이다. 프네우마라는 말과 더불어 인간의 몸과 정신 모두를 표현하고 있는 이 낱말은 우리가 라이프니츠가 말한 ‘창(窓) 없는 실체’가 아니라, 숙명적으로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면서 존재하는 자임을 알려준다. 프네우마를 지닌 자, 숨 쉬는 자는 홀로 있는 자일 수 없고 타자와 더불어 있는 자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아낙시메네스 (BC 585년경 ~ BC 525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다. 만물의 근원을 밝히려 했던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의 뒤를 이어 공기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공기가 차고 농도가 짙어지면 바람·눈·물·흙으로 변하고, 뜨겁고 농도가 희박해지면 불과 천체가 된다고 봤다. 번개나 지진도 공기의 변화에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만물의 다양성을 일원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그는 인간의 혼(영혼)도 ‘호흡’ 활동의 원리에 귀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