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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묵상글 (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있는 그대로 나를 원하시고 사랑하시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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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24 02:17
- 있는 그대로 나를 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오늘 복음은 너무도 많이 들은 복음이지만
오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씀이 특히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일까 하는 묵상을 저절로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고 난 뒤에 원하시게 되었을까요?
제 생각에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보시고 마음에 들어 원하시게 된 것이 아니라 보시기도 전에 원하셨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태어나기도 전에 손주를 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떤 손주 이전에 손주를 원하듯
주님께서도 어떤 제자 이전에 사도를 원하셨고
그래서 누구든 사도로 뽑으셨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나 중심이고 그래서 사랑이 부족할 때는
내 마음에 드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했고 그런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전보다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원하게 되었으며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나이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러하니 주님께서는 얼마나 더 무조건 사랑하시고 원하셨을까요?
사실 사도들의 면면을 보면 주님 교회의 열두 기둥이 되기에 부족한 분들이지요.
주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저를 있는 그대로 원하시고 사랑하실 겁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준마를 원하지 않으시고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원하셨듯이
저를 사랑하기를 원하셨고 제가 당신 사도 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주시고 당신 사도로 뽑아주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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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현재 인간은 생태계 피라미드 최상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강력한 발톱도, 뭐든 부술 수 있는 턱도 없는데 말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최정상에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학자들은 ‘직립보행’ 때문이라고 합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두 손이 자유로워졌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동물들이 직립보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직립보행을 할 때 발바닥에 가해지는 압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몸의 무게를 두 발로만 버티기가 힘들어서 대부분 사족보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두 발로 몸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움푹 팬 발바닥 때문이었습니다.
건물 입구, 다리, 터널을 보면 곡선 형태의 구조인 아치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치 형태가 별도의 지지대가 없어도 엄청난 하중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치가 우리 발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평발이라서 군대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서 있어야 하고, 행군도 해야 하는 군인에게 평발은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 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너무나도 중요했던 부분이라는 사실, 하느님께서는 세세히 신경 쓰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판단만을 내세우고, 세상의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지금이야 이 열두 사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고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지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나 사제 무리에 속한 사람들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스승을 팔아넘기고, 수난과 죽음에 뿔뿔이 흩어지는 나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당신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당신의 선택을 받아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죄를 범하더라도, 나약함과 부족함이 넘쳐나더라도 상관없이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우리를 세세하게 신경 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면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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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영원히 여기 머물 것처럼 일하고, 내일은 떠날 것처럼 준비하겠다(브뤼기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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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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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고 적혀있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써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 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 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찡그린 얼굴로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집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살아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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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 복사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 복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어른 복사단입니다. 학생 복사단은 주일 12시 미사를 담당하고, 어른 복사단은 주일 10 미사를 담당했습니다. 복사단 중에는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복사인 집이 있습니다. 아버지 중에는 자녀와 함께 미사 복사를 하고 싶어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평일 미사에 가족이 복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평일 미사에 복사가 있어서 좋았고, 가족이 함께 복사를 하니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버지가 딸에게 신앙의 기쁨을 전해주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자리가 늘 따로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얼 배운다는 생각도 잘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은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아빠들은 자녀의 육아에 관심이 많고,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길을 위해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교육도 이렇게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습니다. 3명이 같이 있으면 그중에 반드시 배울 점이 있다고 합니다. 후배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지내면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식탁에 예쁜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벽에는 좋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식탁보와 그림이 있으니 사제관 주방이 밝아졌습니다. 이번에 갔더니 거실에 화초들이 가득 반겨주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신부님이 교우들에게 집에 있는데 시들어가는 화초가 있다면, 바빠서 물을 주기가 어려운 화초가 있다면 사제관으로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교우들이 하나둘 화초를 가져다주었답니다. 신부님은 늘어나는 화초를 보관하기 위해서 선반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거실 안 선반 위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화초를 보니 거실이 정원이 되었습니다. 쌀을 씻은 물을 화초에 주니 화초가 더욱 생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만나니 교우들도 신부님을 아끼고 존경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연극으로 했었습니다. 예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원래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동방박사는 오는 길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가지고 간 선물을 주었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났을 때도 가지고 간 선물을 드렸습니다. 병든 사람을 만났을 때는 여관에 데려다 주었고, 남은 돈을 여관 주인에게 모두 주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서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30년 시간이 흐른 뒤에 네 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 박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가 가난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너는 내가 병들었을 때 나에게 경배하였다.” 네 번째 박사는 예수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13번째 제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네 번째 동방박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초를 가꾸는 정성으로 교우들을 사랑하는 사제가 13번째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위해서 함께 복사서는 형제님이 네 번째 동방박사라고 생각합니다. 2025년이 시작되었고 어느덧 1달이 되어갑니다. 2025년에는 나의 이름이 13번째 제자의 이름으로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나의 이름이 네 번째 박사의 이름으로 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주님께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르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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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릴 적 한지를 이용한 공예품을 만든 기억이 있습니다. 흰색 한지를 사용하는데 공예품을 만들고 그 위에 한지를 입힙니다. 그리고 원하는 색으로 한지를 채색합니다.
붉은색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이내 흰색의 한지는 붉은색으로 물들어 갑니다. 파란색을 떨어뜨리면 흰색의 한지를 파란색으로 물들입니다. 물들어 가는 그 과정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사람은 끼리끼리 노는 거야!’ 혹은 ‘그 나물에 그 밥이야.’. 또 다른 비슷한 말로는 ‘ 같은 물에서 놀아야 그렇게 되는 거야!’
이 모든 말들의 중심 의미는 서로서로 물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주님 곁에서 머물게 하십니다. 복음은 ‘그들을 당신 곁에서 지내게 하시고’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맑은 영혼에 그리스도의 빛을 물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자비로움을 물들이고 사랑을 물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물들어 버린 제자들은 세상에 나아가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이런 물듦의 방식은 지금도 우리 교회에 남아있습니다. 사제가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신학교에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에 들어오려는 예비 신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도 이런 모습은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구운 가래떡
추운 어느날 친구와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습니다.
저희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식당 입구에는 기다릴 수 있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난로도 켜져 있었습니다.
난로 옆에 다다르니 그 난로는 어릴 적 보던 곤로였습니다.
잠시 자리가 날 동안 기다리며 곤로를 바라봤습니다.
예전….
어릴 적 할머니가 곤로를 이용해 구워주신 가래떡이 생각났습니다.
방 안에서 잘 구워지기를 바라며 기다렸던 그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갑자기 몸이 따뜻해졌습니다.
곤로의 열기로 따뜻해진 것인지 따뜻한 추억 때문에 따뜻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따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가 따뜻하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추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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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는 이들의 신원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이들의 신원이 잘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우선 배경은 산입니다. 상징적으로 산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을 제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입니다. 복음 첫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신원 및 성소, 믿는 이들의 공동체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성소의 주도권은 순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당신 중심의 공동체를 설립합니다. 안으로는 당신과 함께 지내는 주님의 제자들이요, 밖으로는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 예나 이제나 주님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둘이자 하나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사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뽑힌 열둘의 면면도 참 다양합니다. 역시 공동체의 다양성의 일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했을 때만이 가능함을 봅니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어 뽑으신 제자들이자 사도들이니 우리가 왈가불가 할 수 없음은 오늘날 주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 성 요셉 수도공동체만 봐도 자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셨는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존재도 참 불가사의입니다. 새삼 성소의 은총도 본인이 끝까지 가꾸고 돌봐야 하는 노력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성소자들에게 끊임없이 경각심을 주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이들은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속하여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평생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도하고 공부하는 제자요,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사도로서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두 사도들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이 마침내 새계약의 중개자 대사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계약이 실현됨을 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주님과의 새계약의 실현을 날마다 실감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은 우리의 생각속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우리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어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니 더욱 주님의 제자다운, 주님의 사도다운 삶이겠습니다. 저절로 시편을 고백하게 되니 열두제자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 성구(40,9)입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O my God! my delight is to do your will,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칼빈파가 득세했던 제네바의 주교가 되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책임을 다했던 성인입니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인문학 및 신학지식이 풍부했으며,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을 지녀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예의를 갖춤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 그리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훗날 “신사성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영적지도와 형성에 관한 대표적 저술에는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 있습니다. 성인은 제네바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외교사절로 로마와 파리를 오가며 교황 클레멘스 8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간의 동맹을 맺도록 주선할 때 앙리 4세의 성인에 대한 평입니다.
“제네바에서 오신 이분은 독실하고 학식을 갖춘 분입니다. 독실할뿐 아니라 신사 그 자체입니다. 매우 드문 조합입니다.”
또 하나 그가 겪은 결정적 체험입니다. 그가 에비앙에 있을 때 살레시오 눈 앞에 갑자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가 한때 순교를 갈망했던 것처럼, 그대도 순교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허나 나처럼 그대도 순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 자신만의 순교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겪은후 더욱 독실한 삶을 실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한 친구, 강한 인내심과 온화한 성품, 해박한 지식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탁월한 강론 능력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성인은 영적동반자인 성녀 ‘요안나 프라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1610년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를 안시에 설립하기도 합니다. 1622년 12월28일 뇌졸중으로 쓰러진후 마지막으로 “저는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었고, 주님께선 제 염원을 들어주어 저를 고통의 구렁텅이와 죄악의 늪으로부터 꺼내 주실 것입니다.”고백후 갑자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임종을 맞이합니다.
이어 살레시오는 1661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고 3년후 시성되며, 1877년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고,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기자, 청각장애인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후대에 더욱 평가받는 성인입니다. 성인에 대한 평과 어록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문 영성”<앙리4세>
“사부아의 보석”<교황 바오로 6세>
“하느님의 사랑을 잘 아는 박사”<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스승”<교황 베네딕도 16세>
“그의 융통성과 선견지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교황 프란치스코>
성인의 어록입니다.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인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애가 강하면 더욱 상처를 받습니다.”
“분노는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미움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고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찰해야 함에도 섣불리 남을 판단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행위입니다. 판단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락에 빠지지 마십시오. 아무리 건전한 놀이라도 그것에 애착하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질투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불신과 부정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대서 생기는 반면에 질투는 그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판단하므로, 우리가 그 비위를 맞추기는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금과옥조의 조언으로 주님의 제자다운, 사도다운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답게, 사도답게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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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당신 가까이
부르시니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한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늘 당신 곁의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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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마르 3,17)
예언을 완전한 기억으로 새겨 주는 새로운 이름
그분은 야고보와 그의 형제를 “천둥의 아들들”이라 부르셨습니다(마르 3,17 참조),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이 바로 구약성경을 주신 하느님이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창세 17,5 참조), 사라이를 사라라(창세 17,15 참조), 야곱을 이스라엘이라(창세 32,28-29 참조) 새로 이름을 부르신 분임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레아가 그러하였듯이(참조: 창세 29,32; 30,11.13.18.20)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은 성조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까닭도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름을 통하여 하느님의 선하심을 상기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이름으로 불릴때마다 이름 안에 담겨 있는 예언을 그 사람안에 완전한 기억으로 새기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셋째,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완덕은 이 세상의 물질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 속에 있다고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해서 가난해진다면, 이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바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그랬듯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하는 의도마저 가지지 않은 사람, 곧 자신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비우고 사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난을 일컬어 최고의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우리는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만물을 여의고 계시듯이 우리가 지식을 여윌 때,그것을 일컬어 가장 순수한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제 이야기하려고 하는 셋째 가난은 가장 어려운 가난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입니다.(320)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강론 60
우리는 “상속받아라”리는 말씀과 영원한 불속으로 가라”는 말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런 판단의 기준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은 그러한 상을 받게 된것입니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왼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벌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에 도달한 사람들은 장차 다가올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실천한 선하고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들이 삶에서 행한 모든 것들은 겉으로는 정의로운 듯이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머물고 말 것입니다. 이들은 삶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살았고, 사기꾼이나 주정뱅이가 아니며, 나쁜 일로부터 자신을 잘 지켜 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선행을 행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면, 이들의 삶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머물고 말 것입니다. 이들은 “나쁜 일을 멀리 하라”는 말씀에 충실했을 수는 있습니다만 “착한 일을 하여라”(시편 34,14) 라는 말씀은 소홀히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와서 하늘나라를 상속받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깨끗한 삶을 살았고,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지 않았으며 거짓 증언으로 다른 사람을 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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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 곁에 부름 받은 열두 사도 /
박윤식 [big-llight] 250123. 19:53 ㅣNo.179521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는 권한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도는 그분 곁에 머물고, 때로는 파견되는 이다. 아무튼 함께 지내는 것이 파견보다 먼저인 게 인상 깊다.
그분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 만나서 동고동락으로 친교를 나누며, 이르면서 스승을 먼저 알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러고 나서야 나아가서 선포와 마귀를 쫓는단다. 어쩌면 그 열둘의 이 사도는 교회 공동체의 표상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말씀 선포와 마귀 쫓는 권한을 받은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뛰어난 학식도 없었고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다.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사제, 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는 평범한 이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예수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거다. 그래서 주위의 힘 좀 쓴다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을 보면서는 다소 의아해 하였으리라. 글도 오르는 어부와 세리, 열혈 당원까지, 그들이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 천하고 죄인들이라 생각했을 수도. 아마도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을’하고 하찮게 여겼으리라. 그만큼 열둘의 면면은 ‘스펙’다운 게 없었다.
수석 좋아하는 부자가, 어떤 수집가에게서 탐나는 돌을 봤다. 모양새가 너무 마음에 들자, 그는 값은 충분히 줄 테니 팔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걸 바라며 팔지 않았다. 뒤에도 몇 번이나 찾았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핑계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가격을 올릴 방도로 예쁘게 갈고자 좀은 정성스레 돌을 갈았다나. 그 후 부자가 다시 왔다. 주인은 허세 부리며 그 돌을 내놓았으나, 부자는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냥 돌아가 버리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단다.
사실 열두 제자는 타고난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지닌 평범한 이들이었다. 꾸밈이 있었다면, 굳이 선택되지도 부름을 받지 않았을 수도. 그러므로 주님 앞에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만 할 게다.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질 게 없기에. 꾸미고 싶은 그 마음은 때로는 유혹이리라. 평범한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도로 만드신 거다. 세상은 점점 지식, 스펙이 꾸며진 이들을 요구한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적인 순수한 모습만은 아닐 수도.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부터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으셨다. 당신을 배반할 저 유다를 열둘에 포함시킨 것은, 분명 영원으로 가는 구원사의 한 신비라 할 수밖에. 성경은 이 부끄러운 신비조차 들추었지 숨기지 않았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나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당신의 때가 가까이 오자, 원하시는 열둘을 사도로 손수 뽑으셨다.
이처럼 예수님 사명을 따르려면 먼저 함께 머물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때가 되면 그분께서 파견하실 게다. 스스로가 선포자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서 파견하시리라. 이런 과정도 없이, 어디 갑자기 사도가 될 수가! 그분 곁에 없던 이를 어찌 감히 말씀의 선포자가? 이렇게 사도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머물러야만. 그러기에 이 시각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도 의로운 예수님 제자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려면 먼저 그분 곁에 머무르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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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12’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의 숫자입니다. 완전과 충만을 뜻하는 숫자이지요.
그러기에 구약 성경은 메시아의 할 일을 늘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로 묘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를 뽑는 일은 그러한 구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부름을 받아 파견된 존재, 사명이 위임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신 것처럼, 제자들 또한 자신들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예수님의 삶은 바로 이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4-15).
그런데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처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5).
그러기에 제자들은 파견되기에 앞서 예수님 곁에 머물며 그분을 맛 들여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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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앙생활 오래 해도 주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
라이언 벨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목사로서 약 20년 동안 신앙과 사역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2013년, 그는 “하느님 없이 보낸 1년”이라는 실험을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은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신앙에 대한 점진적인 의심과 불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벨은 자신의 갈등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제 신앙을 더 포용적이고 자비롭게 만들고자 했지만, 그럴수록 기독교가 감당할 수 있는 경계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가 동성애자나 여성들을 대하는 방식과 타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실험에서 벨은 기도와 교회 출석을 포함한 모든 종교적 관행을 중단하고, 마치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무신론의 세계로 들어가고 무신론자로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입니다.
1년간 기도도 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하나님을 어떤 일의 근원이라든지 나 자신이나 어떤 이의 삶을 바꾸어줄 희망이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대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을 때,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는 이 여정을 기록하며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었습니다.
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아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단순히 신념 체계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식을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이성, 연민, 정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상했습니다.
“제가 신앙 안에서 소중히 여겼던 많은 가치들 — 친절, 관대함, 평등에 대한 헌신 — 이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여전히 실천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1년이 끝난 후, 벨은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책도 읽고, 깊이 생각하고, 신앙과 무신앙 양쪽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제가 믿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라이언 벨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벨은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시간이 지나며 다시 거의 무신론자가 되는 수많은 냉담자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둘을 뽑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열둘을 임명하셨으니,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낼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뽑으시는 세 가지 이유는
a. 함께 있게 하시고 = 기도하게 하시고,
b.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 선교 사명을 주시며,
c.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의 선물을 주고자 하심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라이언 벨의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분명 뽑혔으니 주님과 함께 머물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 사명으로 ‘파견’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파견받으면 주님께서 성령의 힘을 주시는데 이를 통해 주님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성 요한 보스코의 삶을 돌아봅시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 베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후 그의 가족은 생계를 위해 애썼습니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그에게 강한 신앙심을 심어주며, 어려운 시기에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밝고 쾌활한 성격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요한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능했지만, 그는 훗날 자신의 부르심 이전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참새 같았다.
내 마음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목적에 따라 계획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아홉 살 때 꾸었던 생생한 꿈을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싸우고 소리치며 욕설을 퍼붓는 소년들로 가득 찬 들판을 보았습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이 꿈은 그의 삶 내내 그를 떠나지 않았으며, 아이들을 이해와 사랑으로 인도하고 돌보겠다는
그의 사명을 형성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라는 확신을 절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아이들을 내 손에 맡기셨다. 그분은 내가 이들을 인도하고 사랑하며, 그들을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가길 원하신다.” 그의 이러한 목적의식은 그가 어려움을 견디고 자신의 사명을 지속하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힘을 깊이 믿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우리의 노력은 어둠 속의 화살과 같습니다.”
그는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사역을 위한 힘과 지침을 얻었습니다.
그는 소년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체와 마리아께 가까이 있으십시오. 그러면 여정에서 힘을 얻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은 보스코의 삶에서 놀라운 사건들과 열매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오라토리오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보스코는 기도하며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부유한 후원자가 예상치 못하게 찾아와 필요한 금액을 기부했습니다.
또 다른 일화로, 보스코는 한 중병에 걸린 소년이 나을 것이라고 예언하며 말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의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소년은 회복되었고,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돛을 채우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한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의 힘을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파견받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성령으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면, 기도할 것이고, 기도한다면 그 부르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사명을 찾으려 할 것이며, 사명에 순종하면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0,10-12)
주님께 파견받았다고 믿어야만 성령의 도우심이 주어집니다.
라이언 벨처럼 목사로 살아도 매일 기도로 파견받지 못하면 목사가 되어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매일 미사를 하거나 기도를 마칠 때,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나의 사명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묻고 결심하고 나가서는 실천해야 합니다.
기도에서 파견이 빠지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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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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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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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 3, 14)
예수님의
사랑법은
당신과 함께
지내는
머무름의
사랑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지내길
바라십니다.
머무름의 빛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머무름이
노래가 되고
기도가
탄생이 됩니다.
다시 태어나는
제자들의
기쁨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
함께 지내는
머무름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생활을 배웁니다.
생활의 시선은
감사를 향합니다.
이렇듯
머무름이
펼쳐나가는
사랑의
새로운
길입니다.
오늘에서야
알게되는
사랑받는
기쁘고 뜨거운
귀한
만남입니다.
우리는
머무름을
먹고 마시며
살아갑니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머무름입니다.
오랫동안
머무름의 기쁨을
잊고 살았습니다.
머무름의 초대는
가장 좋은
사랑의 초대입니다.
가장 좋으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가장 좋은
사랑의
복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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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많은 분들이 제게 묻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수도회인데, 왜 돈보스코 수도회가 아니라 살레시오회인가요?
돈보스코가 활동하던 1800년대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쪽 대세 성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십니다.
살아 생전 돈보스코는 사랑의 박사, 친절과 온유의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행 중인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 사업의 주보 성인으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한 것입니다.
1593년 갓 서품된 순간부터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성소 여정은 범상치 않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서품과 동시에 제네바 교구 참사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서열상 교구장 다음가는 위치였습니다.
1594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샤블레라는 험한 산간 지방에 칼뱅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되돌아오게 하기 위한 목숨 건 선교를 자청했습니다.
그가 샤블레에 최초로 도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의 냉대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심자들의 수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칼뱅파 신자들의 집회가 끝난 예배당에서 홀로 쓸쓸히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도우미로 따라왔던 사촌은 2년 만에 두손 두발 다 들고 돌아갔습니다.
혹독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자, 칼뱅파로 넘어간 신자들을 위해 팔이 아프도록 눈물의 편지를 썼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대문 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는 이른바 ‘미디어 선교’를 일찌감치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그의 부단한 노력에 더해 1598년 프랑스와 사보이아 간에 이루어진 평화 협정에 힘입어 샤블레 지역의 칼뱅파들이 서서히 가톨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마침내 4만여 명에 달하는 양들이 다시금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대한 보상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1602년 35세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제네바 교구장에 착좌하게 됩니다.
알프스산맥과 안시 호수가 멋지게 어우러진 안시에 거처를 정한 그는 600여 개의 본당을 두루 다니며 사목활동에 전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부드럽고 달콤한 품성의 소유자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큰 환영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모습과 삶에 홀딱 반하고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까지 나 돌 정도였습니다.
“제네바의 주교님이 저렇게 선(善)하다면 하느님은 얼마나 더 선하실까?”
틈만 나면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은
부드럽고 자상한 어투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한 말의 식초보다는 꿀 한 방울로 더 많은 파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설득력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를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그가 남긴 불멸의 명저 신심 생활 입문을 통해 영성 생활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시각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하실 때, 초목들은 종류에 따라 각기 자기 열매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당신 교회의 살아있는 초목인 그리스도인이 각자 자신의 품위와 신분, 성소에 따라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신심은 귀족, 노동자, 왕족과 노예, 과부와 미혼녀, 기혼녀 등에 따라 각각 다른 방법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각자의 능력과 일, 직무에 알맞아야 합니다.
신심 생활은 군인들의 막사, 수공업자들의 점포, 왕족들의 궁정, 부부들의 가정에서도 활짝 꽃 피어나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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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 열둘을 부르시어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신다.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어부, 세관원, 혁명당원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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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3-19).”
1)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2-14).”
묵시록의 묘사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즉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각자 맡은 직책과 직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12.18-20.26-27.29.)”
그러므로 자신이 맡은 직책과 직분을 내세우면서 우쭐거리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맡은 직책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도 그렇고,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신 일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주춧돌이 건물의 가장 아래쪽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고위 지도자의 자리가 ‘높은 자리’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낮은 자리’입니다.>
4) ‘낮춤, 섬김, 사랑’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고,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은 ‘섬기는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증언하라는 명령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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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3,13-19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고 고민하여 열 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특별히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포함되어있는 것은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그를 당신과 함께 일을 해 나갈 사람으로 뽑으시고, 항상 함께 다니며 동고동락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두렵고 불편하겠지만, 그것이 밤새 기도해서 얻은 결론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셨기에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유다를 당신 곁에 두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자신을 뽑아주셨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집착,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겠다는 욕심 중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려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끊어내지 못하고 그릇된 욕망의 노예로 살았기에, 그 욕망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오늘 복음에서 처음으로 이름불린 베드로의 모습도 유다 이스카리옷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와 같은 날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돈을 받고 적대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던 베드로나 예수님의 믿음과 사랑을 배신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더구나 예수님을 ‘한 번’ 배신한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했습니다. 그런 잘못을 범한 이후 베드로와 유다 모두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선택된 사도로서 소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생은 서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사도’로 남아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유다는 더 이상 ‘사도’로서 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대체 무엇이 그런 큰 차이를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여러가지로 부족하고 죄많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아주셨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은 그분의 능력으로 채워주실 거라고 믿은 것이고, 유다는 자신처럼 부족하고 죄많은 사람은 ‘사도’로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아무리 자신이 예수님께 뽑힌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그런 사실은 변할 수 없다고 믿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그분께서 직접 뽑으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뽑아주셨기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우리를 뽑으셨고, 우리들 각자는 그분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못생기고 모난 돌이라도 다 쓸모가 있고 자기의 자리가 있습니다.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지요.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커다란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쓰시든지 성모님처럼 “이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며 따른다면, 우리를 통해 주님의 놀라운 섭리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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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주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
쉐난도우 산행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스스로 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타인을 위한 배려가 배여 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식사를 하거나 쉬다가 뒷 정리를 하는 것을 보는데,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휴지 조각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오고 가면서 서로 만날 때, 그들은 미소를 짓거나 친절한 말로 인사를 건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리운 동포를 만나면 씁스레지는 심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계약은 쌍방의 의무를 지우는 법을 바탕으로 합니다. 거기에는 신의가 함께 해야 그 법의
가치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나이 산에서 신정국가로 태어나면서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고 변덕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칫하면 입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떠들면서 불충실과 이방인의
신에게 추대를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고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히브 8,10)
이런 히브리서의 이런 맥락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에제 36,26-27)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삶을 넉넉하게 해 줍니다.
율법이 해 주지 못한 것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미래 교회를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두신 사람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머무르게
하시고 복음 선포를 함께 하게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돌과 같았던 심장에
돌 심장으로 바꾸는 삶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율법의 지배를 받던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함께 참여하며 미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대열에 서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다른 마태오나 루카에 비해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를 첫 번째로 꼽는 것입니다.
예언자들도 그러했지만 제자들의 위로와 희망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맞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 주님과
함께 하는 성경과 묵상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게 됩니다.
세상에 살지만 주님과 함께 할 때 그 어떤 어려움과 위험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받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주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삶을 통하여 우리는 오늘 하루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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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어울림을 통한 복음선포 ♣
오늘 복음은 우리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부르심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초대이다. 루카 복음의 소명 사화(5,1-11)를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보여주신다. 그분은 감당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던 시몬을 부르시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
다른 제자들도 이런 식으로 불림 받았다. 오늘 복음에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3,13)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심장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의 부르심도 자신의 의지로 응답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랑의 부르심임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적인 주도권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다. 곧 그분의 부르심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성소는 온전히 그분 편에서의 절대적인 선택이기에 절대적으로 응답할 의무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소는 내 편의대로 내 방식에 따라 내가 원하는 때에 부를 수 있는 콜택시(Call Taxi)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부르시는 주님의 ‘5분 대기조’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동기는 하나는 함께 있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3,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처지나 신분, 능력, 교육정도, 연령, 외모, 취미 등 인간적인 그 어떤 것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원하시는 이들”을 뽑으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데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요소도 문제 되지 않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우리 부르심의 일차적인 동기와 목적은 그 모든 것에 앞서 오직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왜 함께 있는 것을 제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혼에 흠뻑 젖어들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 나가 전파할 말씀의 뜻을 충분히 알아차리도록, 당신과 계속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결국은 당신과 함께 있음이 참 행복임을 깨닫게 해주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고, 세상의 버림받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측은한 마음’(compassio)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함께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체 구원사적인 몸짓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형제적 삶을 나누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함께한다는 것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다.
제자 공동체는 오직 사랑 때문에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고, 제자들끼리 운명을 같이하며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형제 자매들과 조건없이 어우러지는 형제공동체이다.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이 선택하셨으므로 서로 다른 성격, 능력, 교육 정도, 연령, 신분, 신앙의 정도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도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형제공동체도 운명의 어울림 공동체였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서로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위해 열어야 하며, 마음을 열고 대화함으로써 사랑을 발생시키고, 판단하지 않으며 서로의 장점만 보며 살아나가는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이 어울림 공동체에서는 무엇보다도 인내심과 관대함이 중요하다.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이 운명의 어울림 공동체에서 참된 사랑으로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서로의 좋은 점만을 바라보며 희망이신 그분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누며, 청하기도 전에 먼저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신 그분을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나자. 이렇게 조건없이 어울려 사는 자체가 바로 가장 강력한 복음선포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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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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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24.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5.1.24> 아침을 여는 묵상 (수 15:20~63절)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사모하는 삶❞
❚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음 세대에게 물려 줄 영적 기업을 준비하고 영적 전투를 이어 가야 합니다.
✔ 어떠한 영적 교훈을 갖고 살아야 합니까?
➲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20~32절).
유다 지파가 ‘가족대로’ 공평하고 균등하게 분배받은 기업의 성읍과 마을들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들에 비해 규모가 커서 가장 먼저, 가장 넓은 지역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이처럼 유다지파가 강성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성취된 것입니다. 유다 지파가 분배받은 지역은 남쪽 끝 즉 에돔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지역입니다. 본문에서는 스물아홉(32절) 성읍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정확한 성읍의 개수는 ‘서른여섯개’의 성읍입니다. 이처럼 숫자상 차이가 나는 것은 동일한 성읍이 다른 이름을 갖거나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읍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단순 필사 상의 오류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신 결과 유다 지파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는 인간적인 결함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문이 위기를 맞았을 때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을 모아 놓고 축복할 때 유다를 가장 많이 축복했습니다(창 49:8~12). 야곱의 유다를 향한 축복은 오랜 시간을 걸쳐 서서히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도 현재 누리고 있는 이 복을 자녀 세대에까지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 많은 시행착오도 겪고, 신앙적으로도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안에서 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크고 놀라운 복을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까지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복잡하고, 신앙의 혼란을 일으키는 사회적 분위기이지만 그럼에도 복음의 본질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힘써 지켜내므로 현재 누리며 살아가는 믿음의 유산을 자녀 세대에게까지 잘 물려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승리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33~47절).
남쪽 지역에 있는 성읍에 대한 열거가 끝난 뒤에 33~47절에서는 서쪽 지중해 연안의 평지 지역에 위치한 42개의 성읍과 마을들이 소개됩니다. ‘평지’(33절)로 번역된 ‘쉐펠라’는 ‘낮다, 낮아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샤펠’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저지대’를 의미합니다. 33~36절에는 평지에 이는 14개의 성읍과 마을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37~41절에는 16개의 성읍과 마을들이 소개되고, 42~44절에는 9개의 성읍과 마을들이 소개되며, 마지막으로 45~47절에는 에그론과 그 변두리의 성읍과 마을들(45절), 에그론에서부터 지중해까지 아스돗 곁에 있는 모든 성읍과 마을(46절), 아스돗과 그 변두리의 성읍들과 마을들, 애굽 국경 지대의 강과 지중해 일대에 있는 가사와 그 변두리의 성읍과 마을들이 잇달아 소개됩니다(47절).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손에 넘겨주셨지만, 이스라엘이 직접 전쟁을 치르면서 땅을 정복해 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받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수많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무속과 점쟁이, 혼합주의와 범신론, 영적 교만과 오만에 빠져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과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히 기도와 말씀만 잘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영적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영성과 함께 지식도 갖추어야 하고, 더불어 인격도 잘 준비되어야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차원적이고 종합적으로 잘 준비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승리의 역사, 정복의 역사를 써 내려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역사가 아름답게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하늘의 기업을 사모하여야 합니다(48~63절).
계속해서 서쪽의 평지와 동쪽의 광야 사이에 있는 중앙 산지의 여러 성읍과 마을을 지역별로 정리합니다. 11개의 성읍과 마을들(48~51절), 9개의 성읍과 마을들(52~54절), 10개의 성읍과 마을들(55~57절), 6개의 성읍과 마을들(58~59절), 2개의 성읍과 마을들(60절) 등의 순서로 모두 38개의 성읍과 마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쪽에 있는 광야 지역의 성읍과 마을들 6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61~62절).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들보다 먼저 기업을 분배받을 정도로 규모가 큰 지파였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여부스 족속만큼은 쫓아내지 못해 그들과 함께 불편하고 위태로운 동거가 시작이 됩니다(63절).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된 것은 다윗 시대 때였습니다(삼하 5:6~9절).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라는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다른 약속들처럼 이 약속 또한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 중에는 목초지뿐 아니라 산지와 광야도 있었고, 여부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불완전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아무리 멋지고 완벽해 보여도 도처에 불안의 요소들이 남아 있는 세상입니다. 즉 불완전한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받을 기업은 영원하며 완전한 곳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불리한 조건이고, 불편해 보이고,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러나 광야 생활이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오히려 유리한 조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 고난은 신앙생활에 영적으로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시 119:71).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안락한 환경을 꿈꾸는 삶이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사모하는 성도의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의 복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누릴 수 있도록 영적 기업을 물려주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수많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15:20~6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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