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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창세기 12: 1-9 “ 복의 사람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씀을 하신 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택함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하심으로 택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하여진 그 사실로 인하여 다른 사람보다 나는 낫다 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나는 주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의 기도 중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고르고 골라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하는 내용입니다. 한편으로는 맞지만 잘못 생각하면 나는 무언가가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뽑혀진 것이라는 우월성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실수를 유대인들이 하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선민이라는 우월의식, 자기들만 택함을 받았다는 우월의식으로 배타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택함을 입은 것은 다른 민족보다 강하거나 커서가 아니라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어서 택하셨다는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명기 7: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8절에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여 또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도 자신의 어떠한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그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자기가 선생님의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수고가 그 학생에게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수고는 학생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자잘한 심부름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처음부터 어떤 부르심의 내용입니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는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생존의 터전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떠남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믿어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기가 지금까지 자리 잡고 살던 그 땅을 떠나라는 말씀에 선뜻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오래되거나 한 것도 아니데 이러한 떠남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떠남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브람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떠남은 고향을 떠남은 불안과 장래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떠나게 하시고서 무엇을 위하여 떠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복의 사람이 됩니까? 2-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이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이루어내실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큰 민족을 이루어 주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문에는 복의 근원이라는 말보다는 복이 되게 하리라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복의 사람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으로 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는 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 세상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아브람처럼 복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신다는 의미에서 복의 근원 또는 복의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복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데 우리는 이러한 복을 자꾸만 부자 되고 출세하는 세상 쪽의 복을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복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뒤에 축복의 혁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서점에서 사서 보셔도 좋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저는 성경의 절반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브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의 시대에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을 복의 통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고 부자고 자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아브람편에 서지 아니하면 복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복의 사람으로 부르심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을 축복하면 이 축복은 사람이 사람을 축복하는 말이기에 빌 축(祝)자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으신 분이 없으시기에 복을 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사람들이 축복을 좋아하기에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복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단어의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은 둘 다 같은 복이라는 단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말하든 복을 말하든 그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으로 삼으신 것은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람과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인줄 모르면 기독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원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그 부르심이 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복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출세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받지 못하여도 우리는 복있는 사람임을 인정하십니까? 이 문제가 신앙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아브람을 따라 나선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이를 못낳는 사래, 고아인 조카 롯,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적으로, 복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붙어있음으로 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성에 편입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만이 그 당시에 하나님과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복의 통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시대에 누가 복의 통로입니까? 다윗입니다. 사울에게서 기름 부음이 떠나 다윗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실세인 사울에게 붙어 있으면 세상적인 복은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누구를 자신의 복의 통로를 삼고 있습니까? 다윗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 이제는 다윗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다윗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세가 사울에게 있고 다윗은 쫓겨 다니는 신세인데 사람들이 어디에 붙어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울을 택하는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자초하여 고생길로 가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람에게 따라 나선 자도 세상적으로 복없는 사람들이듯이, 다윗을 따라 나선 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가족이야 함께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 다윗에게로 간다고 보지만 다른 사람들이야 갈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편히 잘 살고 있는데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따라 가겠습니까? 제 정신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이 되시면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제정신이 아니면 무슨 정신이겠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에 성공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성공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주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만들어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니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따라 나선 자들도 결국은 세상의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 사무엘상 22: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었더라” 가족들은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따라 나선 것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따라 나선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체제하에서 적응을 못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모여 든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그 정부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모여서 민.가.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지요. 그래서 고문전문가 이근안이 자수한 곳에 가서는 야 이놈아 너 때문에 우리 아들 다리를 절고 있다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다윗에게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이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의 군대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살기 힘들고 환난 당하여 세상에 적응을 못하여 다윗에게 피하여 갔는데 다윗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 감이 오지요. 그러나 수용하기는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알게 하시고 그런 복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기도를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주 기독신문의 만화에 이런 만화가 실렸습니다. 만화 네 컷으로 되어 있는데 첫 장면 기도, 주님. 제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둘째 장면, 주님. 친정아버지 병 낫게 도와주세요. 셋째 장면, 주님. 이번에 아파트 꼭 당첨되게 해 주세요. 주님, 딸 아이 대학 진학 잘하게.... 그리고 제일 밑에 주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이 참된 복임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유일한 복의 통로인 예수님을 믿는 이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예수님을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아브람에게 붙어 있는 자가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자들이나 복의 사람이 된 것처럼, 다윗에게 환난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자가 모였지만 이들이 다윗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에 편입되듯이 예수님 당시에 참으로 환난당한자 빚진 자 병자 세리 창녀 죄인들이 주님께 붙어진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잘났다 하는 모든 자들이 동일하게 다 죄인인데도 그들은 복의 통로를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복의 통로가 되는 예수님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예수님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의 모습을 로마서 4:1-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체를 한번 읽기만 하겠습니다. “봉독”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는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복입니다. 이복을 놓치지 말고 감사하며 그 복의 위력을 나타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세상의 복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싸움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작은 형제자매라도 세상의 복이라고는 가지지 못하였더라도 그가 참으로 주님의 은혜를 알고 받고 믿는 자라면 그 사람이 복의 통로임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적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한 것이 됩니다. 약한 아브람, 약한 다윗, 약한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도 역시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복의 풍성함을 더욱 많이 크게 알아 가시기를 부탁합니다.
19. 창세기 12: 1-20 “ 애굽으로 간 아브람 ”
창세기 11장까지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이 흩어버리신 내용입니다. 이렇게 흩어버리시고 다시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드신다는 것은 아브람을 통하여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모든 가치관이나 윤리 도덕적인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 이름으로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것 대신 아브람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는 대신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셔서 인간의 자기 이름을 내려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내용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징표가 동원됩니다. 땅의 개념, 자식의 개념, 의의 개념 등이 아브람을 통하여 새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생애를 통하여 땅의 의미가 단순히 발 딛고 사는 땅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자식이 단순히 혈통을 이어 가는 많은 자식이 아님을 보게 되고,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님을 창세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창세기를 통하여 보지 못하면 우리는 자꾸만 다른 복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아브람이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당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12:7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이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약속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이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면 이 땅에 머물러야 하는데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으로 살기 힘들어 지니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서 아브람이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욕할 수는 없습니다.
룻기 1: 1-4을 봅시다. “봉독” 이 사건도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벌을 받아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땅에 붙어 있자 그런 식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베들레헴이 사사들이 다스리든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에 베들레헴이나 이방이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룻을 구원하시고 룻을 통하여 다윗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심으로 기존의 베들레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교훈을 꺼집어 내어서 가나안땅을 떠나니 벌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잘 섬기자 그러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 아브람과 나오미의 가정을 그렇게 정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가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처럼 기근이 오면 살길을 찾는 것이고, 나오미의 가정처럼 기근이 오면 살길을 찾아 나서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브람 그러면 부름을 받자 말자 갈바를 모르고 다 버리고 떠났고, 아들 바치라니까 단번에 아내와 의논도 없이 아들 갖다 바쳤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집하나 못 팔아 바치느냐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밀어 부치는 식으로 나가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는냐 하면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큰 끔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이루어 냅시다. 이런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굴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브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약속하신대로 만들어 가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이런 저런 생각없이 애굽으로 살려고 내려 간 것입니다. 애굽땅에 가까이 이를 때에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그러니 애굽사람들이 당신을 나의 아내라고 하면 나를 죽이고 그대는 살릴 것이니 원컨데 나의 누이라 하라. 여러분이 남편에게서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내용 중에 아브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면 아직 부족도 이룰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목축업을 하는 한 무리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더라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당시 정말 부자인 왕들 앞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벌벌 떠는 아브람이 과연 부자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분위기 좋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우락부락한 깡패 같은 자들이 대여섯 명 둘러서서 접근 해올 때 남편이 여보 당신은 내 동생이라고 하시오 그런다면, 당장 이혼이지요. 남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휴대폰으로 112에 신고한다 그러시겠어요, 싸우다 죽더라도 한판 붙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람보다 훨씬 나은 사나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브람의 그 말에 순종을 합니다. 말도 안되는 것 같은데 순종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그것이 순종할 일입니까? 힘있는 사람이 지참금을 주고 자기 아내를 사가지고 가서는 아내를 삼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있는 바보같은 남편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이 남편의 말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보다 사래가 더 나은 사람같아 보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 남편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났다 아니다 하는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서두에서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옳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래에 대하여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사라가 아브람을 순종하였듯이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남편을 주님처럼 대하십시오. 사래가 아브람의 그 엉터리 같은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약속을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바로의 대신들이 바로 왕에게 보고 하였지요. 아브람이라는 유목민이 왔는데 그 여동생이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그러자 바로왕이 사래를 자기 아내로 데려오면서 아브람에게 무엇을 줍니까?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마누라 팔아서 부자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가 놀라서는 아브람에게 그 아내를 내어 주며 왜 그렇게 말하였느냐고 하면서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잘못하였습니까? 아브람이 잘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바로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왕은 사래를 강제로 빼앗아 온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여동생이라고 하기에 지참금을 후히 주고서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바로의 집안에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 같은 큰 나라의 왕이 얼마나 큰 재앙을 만났으면 혼이 나서 사래를 돌려주었겠습니까? 아마 사래에게 손도 못되고 혼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질서로는 풀리지 않는 면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서 구약에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전쟁을 하느냐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 사람들의 죄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또다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나쁜 놈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벌도 안 받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셔서 오래 참는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대답입니까? 그런대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옳습니다 하고서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 그러면 아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를 다해서가 아닙니다.
좀더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에 세상의 기준을 하나님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여인입니다. 기생입니다. 거짓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이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이고 더러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믿는다는 것을 단지 이 세상의 윤리 도덕적으로 조금 나은 삶을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아내를 팔았고 바로왕은 정당하게 그 지참금 주고서 사래를 취하려다 재앙을 만난 것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약속하신 그 약속 때문입니다. 첫째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래에게서 나오는 아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낳는 여인에게서 아이가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람이나 바로왕이 망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람의 이름이 창대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의 이름은 점점 창대하여지는 것입니다. 무력이나 재물에 의한 힘이 아닙니다. 국희에서 사채놀이 하는 사람은 돈이 힘이라고 하고 국희는 사람이 힘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무엇이 힘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아브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애굽으로 내려간 일에서 바로왕이 재앙을 만나서 아브람이 함부로 손대면 안되는 사라인줄 알고 놀랍니다만 바로왕 보다 더 놀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이고 무엇이고 간에 자기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그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애굽의 왕 바로가 벌벌 떠는 하나님인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셔 아브람이 무어라 말하였을까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실력이 대단하다 그랬을 것입니다. 애굽 하면 얼마나 크고 강한 나라인지 아직도 애굽의 피라밋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돌들을 날라다 사막에서 세우려면 어느 정도의 세력이 있어야 하는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러한 왕이 아무것도 아닌 아브람 그냥 죽여 버려도 누구 한 사람 가타부타 말할 자가 없는 그런 아브람인데, 바로왕에게서 살아 나왔으니 그것도 재물도 얻고 아내도 찾고, 얼마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실력과 솜씨에 놀랐겠습니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아브람의 이름이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러한 창대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으로 부르셨기에 아브람을 선대하면 복을 받고 알든 모르든 아브람을 해치면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예수의 죽음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사람들이 말하지요. 그 말이 그들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말 하면서 지옥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므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를 입은 자만 성경이 보이고 자신의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으로 잘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게 이해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더 단순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예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흰 것을 검다 하면 예, 검은 것을 희다 하면 예, 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맹종이 아니냐구요? 사람의 가르침에 예 하는 것은 맹종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 세상을 보는 시각, 죄에 대한 개념 모두...
시편 105편 12-15절을 봅니다.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 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이 말씀을 목사들이 자기들의 전유물처럼 사용하는데 아브람을 말하고, 다윗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여 세우신 사람이기에 어떤 누구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셨다면 아브라함처럼 인도하심을 믿으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열심히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는 그 사랑에 놀라고, 또한 항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