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商道 걸은 ‘검소한 장사꾼’구본흥 대구백화점 창업주
백화점 주인이면서도 옷은 길에서 사 입어 … 돈 빌려주고 이자 안 받아
대구백화점 창업주인 구본흥 명예회장이 지난 9월 1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7세. 구 회장은 ‘대구
유통업계를 현대화시킨 선구자’ ‘대구 유통업계의 대부’ 등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을 만큼 지역
유통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용과 성실을 바탕으로 대구지역 유통업을 주도한 구 회장의 사업
수완 때문에 한때 서울에 본사를 둔 유수의 백화점도 대구지역에 점포를 내는 것을 꺼렸을 정도다.
1920년 9월 20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호리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故人)은 타고난
근면함으로 동네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머슴들과 함께 쇠꼴을 베어 오고 논밭 일을 하는 건 물론
이고 인분을 져다 논밭에 뿌리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새벽 해와 함께 일어나 일을 하다 서당
에 가서 글을 읽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집안 일을 찾아나서는 생활을 계속했다.
나이 열여덟 되던 해 인근에 사는 권수년씨(2006년 8월 8일 작고)와 혼례를 올렸다. 이미 동네
청년들 중 일부가 도시로 나간 터라 결혼 후 구 회장은 점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커졌고
장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컸고 사업할 만한 돈도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던 중 장인인 권동환씨가 논 20여 마지기를 식산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당시로
서는 제법 큰돈인 2000원을 대출해 빌려 주었다. 이 돈을 밑천으로 21세 때 중구 삼덕동에 대구
상회를 연다. 이것이 대구백화점의 효시다.
구 회장의 부지런함은 이때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가게 주변은 물론 동네
전역을 깨끗하게 치우고 어지러워진 가게를 말끔히 정리해 놓곤 했다. 구 회장의 이 같은 행동이
계속되자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까지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음은 물론
대구상회를 찾아주었다.
또 타고난 친절로 고객을 대해 가게가 번창, 2000원을 주고 구입한 가게에서 불과 1년 만에 1000원
이라는 ‘거금’을 이익으로 남겼다. 이 덕택에 장인에게 빌린 돈도 3년 만에 이자까지 고스란히
되돌려 줄 수 있었다.
피란민에 값싸게 얼음과자 팔아
장사가 잘되자 구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이한다. 그의 성실함과 인간 됨됨이를 평소
부터 눈여겨 봐 오던 전유복씨로부터 현재 대구백화점 본점 자리에 위치한 유복상회 인수를 제의
받게 되는 것이다. 유복상회는 200평이나 되는 큰 점포였는데 일부러 대구상회에 몇 번씩 찾아와
음료수를 사 마셔가며 그를 지켜봤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인수자금이 없었다. 당시 구회장에게 160만원은 너무 큰돈이었다. 그러자 전씨는
점포인수 대금을 3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하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구 회장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구 회장은 마침내 인수를 결정하고 자금 마련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가게 단골이던 이병호씨(당시 검찰청 직원)가 구 회장의 성실함을 믿고 부친을 설득, 담보 하나 없이 자금을 빌려줬다.
말 그대로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쉽게만 풀려가지 않았다. 자금 부족으로 빈 가게만 인수한 탓에 점포는 제대로
상품 구색이 갖춰지지 못해 썰렁했고, 찾는 고객도 드물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은 피란민들을 상대로 당시 ‘아이스케키’라 불렸던 얼음과자를 파는 일이었
다. 대구백화점 한쪽 귀퉁이에 간이점포를 차리고 아이스케키를 만드는 기계를 직접 작동해 얼음
과자를 만들어 싼값에 팔았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 대구 시내를 방황하던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가
게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구 회장은 신용이라는 철칙을 지켜 나갔다. 당시 다른 업체들은 수돗물이나
우물물을 그대로 얼려 팔았으나 그는 일일이 물을 끓인 다음 식혀서 얼렸던 것이다. 구름처럼 몰린
손님 앞에서도 일일이 물을 끓여 파는 구 회장을 답답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나 고집스럽게
이 길을 지켰다.
60년대 중반 교동분점이 번성하면서 구 회장도 서울 진출을 고심했다. 그러나 당시 대구 시장과
대구 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적극 만류했고, 그도 고향 발전을 위해 상경을 포기했다. 대신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대형 백화점을 지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당시 전국적으로도 드물었
던 10층짜리 건물을 계획했다.
이번에도 문제는 자금이었다. 200여 평의 부지는 본점에 있지만 건축할 돈이 없었다. 그동안 이익
금은 물론이고 공평동에 있던 살림집까지 모두 처분해 공사 대금으로 넣고 가족들은 백화점 옆에
가건물을 지어 생활했다. 장사가 잘되던 교동분점마저 대구은행에 팔았다. 여기에 은행 빚까지
보태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10층짜리 빌딩을 짓다 보니 건축비도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사채도 끌어 썼다. 한 달에 3~4부(3~4%)나 되는 이자를 꼬박꼬박 물면서도 그는
공사를 계속했다. 우여곡절 끝에 69년 12월 마침내 완공했다. 구 회장은 이때의 감격을 잊지 못해
이날을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로 기억했다.
하지만 완공의 기쁨도 잠시. 넓디넓은 백화점이 한동안 텅 비어 있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1층은
금은방과 카메라점, 전자제품 대리점 등과 지갑, 핸드백 등 잡화가 주류였고 2층은 거의 의류가 차
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류는 서울의 남대문시장까지 구매담당자가 가서 일일이 선별해 사온
것들이었다. 지하에는 다방·이발소·통닭집 등에 임대를 주었고, 3층의 절반을 사무실로 썼다. 나머
지 4~10층 가운데 일부를 싼값으로 임대했고 그외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사채동결 조치 후에도 이자 갚아
신축백화점 매장을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배포가 두둑했던 그도 걱정을 적잖이
했다. 건축 때부터 끌어 썼던 사채 때문에 그의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셋째 사위
로 대구백화점 경영에 참여한 이정무 한라대 총장(전 국회의원)은 “회장님은 그 와중에도 사채
이자를 주기 위해 또다시 사채를 쓰는 등 신용을 생명같이 지켰다”고 회고했다.
마침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8·3 사채동결조치를 내놔 사채상환이 연기됐지만 구 회장은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꼬박꼬박 줬다. “내 신용을 보고 돈을 빌려 준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악전고투 끝에 시간이 지나면서 고객들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구백화점은 1년에 1층
꼴로 매장을 넓혀 70년대 후반에는 10개층 전 층이 직영매장 및 사무실로 꾸며졌고 지하는 식품관
으로 사용됐다. 백화점이 인기를 끌자 주변에도 의류점·식당 등이 몰려들기 시작해 대구 시내의
중심 상권으로 급부상했다. 덩달아 이 지역의 땅값도 급등, 대구백화점 앞 부지는 2000년대 초반
까지 평당 가격으로 대구 지역 최고가를 유지했다.
특히 대백 본점은 80년대 후반 평당 매출 기준으로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이어 전국 2위를
하는 등 전국 랭킹 3위 백화점의 위상을 상당 기간 유지했다. 또 93년 9월 문을 연 대백프라자는
2만 평이 넘는 지방 최대의 초대형 백화점으로 95년 2610억원, 96년 2946억원, 97년 2963억원의
매출을 올려 전국 7~8위권 매출을 기록한 매장이었다.
90년 한국능률협회가 선정한 100대 우량기업에 전국 유통업체 중 유일하게 대백이 84위를 기록
하기도 했다. 위기도 없지 않았다. 98년 외환위기 직후 워크아웃을 신청했지만 뼈를 깎는 경영
정상화 덕분에 2000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워크아웃을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69년부터 87년까지 20년 가까이 구 회장을 보필한 이정무 총장은 “대구 지역의 대기업가이자 전국
적인 수준의 백화점을 경영했지만 고인은 검소하기가 마치 농부 같았다”면서 “심지어 넥타이나
양복 등도 백화점에서 파는 고급제품을 쓰지 않고 길가 상가에서 살 정도”라고 회고했다. 사채
이자에 갖은 고생을 다한 그지만 정작 본인은 남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단 한 번도 이자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구백화점 초창기 서울로 물건을 떼러 올라갈 때면 밤 기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 남대문·동대문
시장을 다니다가 다시 밤차를 타고 내려왔다. “낮에 가서 시간도 버리고 숙박료도 버릴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구 회장의 뜻이었다. 일하느라 못 잔 그가 이제 영면(永眠)에 들었다. (끝)
구회장 묘소 : 대기업을 추동하기에 부족함없는 혈처에 모셨다
부인 묘소 : 중견기업은 추동할 역량의 혈처에 모셨다
좋은 묘소가 복수로 있으면, 그 효과는 단순 플러스가 아니라 에스컬레이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