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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깨우치라
겔 3:16-21
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겔 3:16-21 / [백성을 경고하여 깨우쳐라] 7일이 지나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17) `너 사람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니 내가 내 백성에게 경고를 내릴 때마다 너는 그것을 곧 그들에게 전하여 자기들에게 닥쳐올 일을 깨닫게 하여라. 18) 가령 어떤 사람이 악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내가 네게 알려주거든 너는 책임 지고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어라. 그래서 그가 자신의 악한 행실을 고쳐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여라. 네가 만약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는 당연히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게도 그 책임을 지워서 살인자처럼 다루겠다. 19) 하지만 네가 그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그가 계속 악을 행하면 그는 죽을지라도 네게는 허물이 없다. 너는 자신의 생명을 건져낸 것이다. 20) 또 언제나 의로운 일만을 해오던 사람도 그 의로운 길을 버리고 불의를 행하기 시작하면 역시 죽게 될 것이다. 그가 전에 행한 모든 선행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리고 만약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나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네게도 책임을 지워 살인자처럼 다루겠다. 21) 하지만 네가 그에게 경고를 하고 그가 그 경고를 기쁘게 받아들여 뉘우치면 내는 그를 살려 주겠다. 그러면 그와 더불어 너도 자신의 생명을 건져낸 셈이 된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임명되어 말씀을 받았지만(2:8-3:3) 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될지 결정되지 않은 그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지시가 임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16-17) ‘파수꾼’이란, 성벽의 망대나 탑 같은 곳에 서서 적이 침입해 오는지를 언제든 살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적이나 수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먼저 성벽안의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 임무를 수행합니다(삼하 18:24-27). 그러면 성벽 안의 사람들은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그들은 기쁜 소식의 나팔을 불기도 합니다. 영적인 파수꾼 에스겔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미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즉 바벨론 제국의 세력과 그들의 찬란한 세속문명 앞에서 여호와 신앙이 병들고 세속화 되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쳐 참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에스겔의 소명입니다. 또한 그들이 바벨론의 압제를 통해 겪는 그 고난의 의미를 깨우치고, 고난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징계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18-19) 놀랍게도 하나님은 파수꾼 에스겔에게 연좌제를 적용시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에스겔이 침묵하지 말고 그대로 그 악인에게 경고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파수꾼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즉, 파수꾼 에스겔의 경고로 악인이 자신의 죄악된 길에서 돌아서게 되면 소명을 완수한 것이겠지만, 악인이 거부하여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침묵하면 그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겠지만 그 악인이 악에서 돌이키도록 전하지 않은 너 에스겔에게서도 책임을 물어 그의 피 값을 찾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20-21) 또 가령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 그것을 목격하고도 깨우치지 않아 그가 죄 중에서 죽었다면, 그 의인을 경고하지 않은 에스겔에게서 그 피 값을 찾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의인을 깨우쳐 도움을 줬음에도 그가 계속 악을 행하면 그 의인은 자기 죄로 죽지만 파수꾼의 사명을 완수한 에스겔의 생명은 보존되리라 말씀하십니다. 결국 파수꾼의 책임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명의 완수와 그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적용: 오늘과 같이 의인을 찾기 힘든 시대에 거룩하고 진정한 파수꾼의 역할을 하려면 어떤 준비와 어떤 소명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벤자민 프랭클린. 적의 침입이나 동태를 살피는 파수꾼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현상을 보고 영적으로 바르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하는 영적 파수꾼입니다. 영적으로 무디어 볼 줄 모르거나 듣는 이들의 감정이 상할까봐 경고하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그저 ‘다른 관점’으로만 치부하려는 현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변하지 않는 영적감각을 소유하며 민감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다시 주어지는 소명
겔 3:16-27 / 김광찬 목사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소명을 받은 후 그 신에 의해 자기의 집으로 옮겨져 혼미한 상태로 일 주일을 지난 후 다시 여호와가 그에게 소명을 주신다.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계속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그것은 그가 그 무거운 선지자의 책임을 포로지에서 감당하려며는 새로운 힘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혼미하여 무력한 상태에서 벗어나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로 잡았던 '여호와의 손'(22)이 다시 필요하다.그래서 에스겔은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22)는 명에 따라 들로 나갔다.그는 그곳에서 전 주에 보았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환상을 본다.'여호와의 영광이 거기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23)
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번이나 환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가?아마 에스겔에게 분명한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실 것이다.하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는다.포로지인 바벨론에 포로들과 함께 계신다.그 분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 신이 아니시다.그분은 자기가 가시고자 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 신이시다.
그가 본 것은 망상이 아니며 분명한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두 번이나 그 동일한 영광을 확인하자,에스겔은 '엎드릴'수 밖에 없다.에스겔이 그의 집으로 와 일 주일간을 분노 중에 있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신을 힘 입어 일어나 소명에 순종해야 한다.언제까지나 엎드려 있을 수 만은 없다.
이제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1.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라(17~21)
파수꾼은 다른 군사들이 잘 때 깨어 적이 오는 것을 잘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그래서 적이 가까이 온다면 소리를 질러 자는 자들을 깨워 적을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만약 이 임무를 소흘히하면 자는 자들은 적에 의해 죽게 된다.그가 깨어 적의 상태를 잘 감시하여 위험하다면 즉시 경고를 해야 하는 아주 두려운 책임이다.
적이 침략하여 아군이 많이 죽는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파수꾼이 자기의 책임을 잘 감당했는데도 죽었다면 파수꾼의 책임은 없다. 그러나 파수꾼이 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대비하지 못해 죽었다면 전적으로 파수꾼의 책임이다. 그만큼 파수꾼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런 중요한 임무를 에스겔에게 주고 계신다.'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17)그러나 에스겔에게 주신 파수꾼의 사명은 적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17)는 것이다.이 말은 하나님의 말을 잘 들어 그들이 살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그들에게 잘 알려 그들이 죽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에스겔은 파수꾼이다.그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경고해야 한다.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경고를 하여야 한다.
경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악인은 죽는다(18~19)또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악을 행하는 의인 역시 죽는다(20)그러나 경고에 귀를 기울려 회개하는 자는 산다(21)
어떤 경우라도 만약 에스겔이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해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에스겔의 것이다('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
그래서 파수꾼의 책임은 막중하다. 파수꾼은 악한 사람이 회개하도록 설득하거나 의인이 타락하지 않도록 말리는 일에 성공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할 문제이다.파수꾼은 오로지 신실하게 경고를 전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심판 받는다.
2. 독특한 방법으로 사명을 감당하라(24~27)
환상을 통해 두 번이나 확신을 주신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신다.선지자로써 사명을 감당하려면 아니 파수꾼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 알려야 한다.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이제 집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25).또한 특별히 신탁을 전할 때 외에는 벙어리가 된다는 것이다(26~27).어떻게 이런 상태에서 소명에 순종할 수 있나?
1. 너는 집에 감금 당할 것이다.(25)
보통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잘 당하는 방법이다.바른 메시지는 완악한 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져오게 한다.그래서 백성들은 바른 말을 하지 못하게 선지자를 묶어 두는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스스로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명하신다.그러면 백성들이 너를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은 이제 집안에 감금당한채 그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2. 네가 벙어리가 되리라(26~27)
파수꾼이 벙어리라면 어떻게 위급한 상황을 전할 수 있을까? 에스겔은 이 명령대로 예루살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바벨론에서 듣기까지 벙어리 상태로 지낸다.그러나 예외적으로'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즉 신탁을 전할 때만 입이 열린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이후 일상사에 대한 말은 일절하지 못한다.그가 입을 열어 말할 때는 그말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시다. 백성들은 이 일을 통해 도리어 에스겔을 참 선지자로 인정할 것이다(2:5)
파수꾼의 사명과 역할
에스겔 3:16-27 / 계강현 목사
최근에 우리나라 군대의 경계 태세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 6월 15일 북한 목선이 삼척 항에 들어오고 북한 주민 4사람이 항구에 올라와 잡아가기를 기다리도록 파악하지 못한 사건으로 경계 작전에 문제가 있음이 드러났다. 결국 국방부장관이 사과하고 경계 실패와 관련 박한기 합참의장 등에 대해 엄중 경고 조치하고 제 8군단장을 보직 해임하고, 육군 23사단장과 해군 1함대 사령관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였다. 군대에서 경계만큼 중요한 게 없다. 경계 구멍 나고 적군이 안방에 들어오면 뭐 끝난 거 아닌가! 멕아더 장군이 "전쟁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되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라는 명언을 말했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이 주신 두루마리 말씀을 받아먹은 후 이레가 지났을 때, 오늘 본문이 연결된다. vv16-17, “이레가 지난 다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신다. 그리하여 자신을 대신해서 포로 백성들을 깨우치라고 하신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도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 교회가 세상 속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기에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1. 파수꾼의 사명은 무엇인가?
파수꾼이란 뭔가? 사전적으로는 “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파수꾼은 마치 요즘 군대에서 보초와 같다. 무전기 같은 것이 없던 시절, 파수꾼이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거나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팔을 불어 군대와 거주민들에게 위기상황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첫째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v17,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 파수꾼의 사명이다. 보초가 보초인 것을 잊어버리면 근무 서다 말고 졸거나, 피엑스에 가서 음료수나 사먹거나, 담배나 피다가 적군이 침범해 들어와도 모르거나 오히려 보초가 적에게 노출되고 만다. 이를 위해서 보초는 자신이 보초라는 걸 인식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경계를 해야 하고 위기상황에 대해서 어떤 경고 나팔을 불어야 하고 그런 경계수칙들을 잘 듣고 숙지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파수꾼 사명을 잘 하려면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말씀을 잘 안 들으면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말씀을 들을 때 구원도 임하고 사명도 깨닫고 사명을 감당하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마치 출장인생을 사는 우리들이 왜 출장 왔는지? 출장 목적은 잊어버리고 출장비를 좀 벌려고 혈안이 되어 살다가 돌아가서 출장보고를 해야 하는데, 막상 보고할 게 아무 것도 없는 처지가 되면 어쩌겠나? 보스의 책망을 듣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심판과 수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출장의 목적을 잘 달성하면 출장비는 회사에서 책임지고 지원해줄 것이고, 출장 마치고 돌아가서 보고하면 보스가 잘 했다고 칭찬하면서 보너스와 휴가를 주신다. 하늘나라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지옥에 갈 영혼들에게 경계하고 경고하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천국의 영생을 소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주님이 지상명령을 통해서 영혼 구원, 제자 만들기를 통해 신약교회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부흥을 이뤄야 한다. 주님이 꿈꾸셨던 교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파수꾼의 사명이다.
이를 위해 둘째로 파수꾼은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가 파수꾼인 줄 인식하고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도 막상 근무시간에 잠자거나 깨어있지 못하고 딴 짓하고 있으면 말장 도루묵이다. 그래서 보초는 깨어 있어야 제 사명을 다할 수 있다. 벧전 5: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우리를 삼키려고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깨어 있는가?
더 나아가서 셋째로 파수꾼은 제 때에 나팔을 불어야 한다.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깨어 있다가 발견한 보초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잠자고 있는 부대원들에게 경고를 보내 미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나팔이란 악기다. 나팔을 불어야 한다. 나팔을 불 때 아무 때나 불면 안 되고 위기 상황에서만 불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나팔이 사용되는 다양한 용도가 나온다. 1) 집회를 소집할 때(민 10:2,3,7), 2) 진영을 이동시킬 때(민 10:2,5,6), 3) 왕의 즉위를 알릴 때(왕상 1:34-41), 4) 전쟁을 알릴 때(렘 6:1), 5) 백성을 해산시킬 때(삼하 20:22) 사용되었다. 또한 종교적인 의미로는 6) 하나님의 임재를 알릴 때(출 19:16- 19), 7) 안식일을 기념할 때(레 23:23-25), 8)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민 10:9), 9) 금식을 선포할 때(욜 2:15), 10) 나팔절, 속죄일 등 절기를 기념할 때(레 23:24, 레 25:9) 사용되었다. 그 중에 오늘 에스겔에게 말씀하시는 파수꾼의 나팔은 하나님의 심판의 위기상황을 경고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에스겔이 알려야 할 긴급한 대적은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내리실 임박한 심판을 알려야 했던 것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나님이 속히 자신들을 구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거라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거다. 장밋빛 기복신앙으로 무성한 이 시대에 하나님이 때로 우상숭배와 죄악에 빠진 우리들의 대적이 되신다는 불편한 진실도 선포되어야 한다. 이런 파수꾼의 나팔이 실종될 때 죄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갈 것이다.
양치기 소년이란 이솝 우화가 생각난다. 한 양치기 소년이 심심하여 마을 사람들을 깜작 놀라게 할 일을 꾸미게 된다.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늑대가 양들을 잡아먹어요. 와서 도와주세요!” 마을 사람들이 호미와 곡갱이를 들고 늑대를 잡으러 왔더니 소년이 장난삼아 거짓말을 한 거였다. 다음에도 또 그런 일이 생겼지만, 마찬가지로 거짓말이었다. 이런 반복된 장난으로 이번에는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서 도와달라고 외쳤지만, 마을사람들은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오지 않아서 양들이 다 죽고 말았단 얘기다.
때에 맞게 나팔을 불어야지, 거짓말로 불거나, 안 불어야 할 때 불게 되면 이런 결과를 맞게 된다. 자기 자신은 하나도 심각하지 않은 채 세상 쾌락에 취해서 살면서, 남들에게만 하나님의 심판의 위험을 알리려고 한다면 그들이 과연 그걸 실감할까?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먹힐까? 아닐 것이다. 제 때에 맞게 임팩트 있게 경고해야 하는 것이다.
2. 파수꾼의 역할은 무엇인가(겔 3:18-21)?
이 말씀에 의하면 파수꾼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파수꾼의 역할은 성실하게 경고하는 것뿐이다. 악인들을 회개시키거나 의인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만드는 일은 그의 소관이 아니다. 악인에게는 그의 악한 길을 떠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하고, 의인에게는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죽는다고 경고하라고 하신다. 악인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면 의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뜻할 것이다. 악인도 의인도 파수꾼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의인도 지금까지 올바른 길을 걸어왔을지라도 떠나서 악한 일을 할 때에 역시 죽을 수 있고, 이미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 그걸 경고해주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를 안전하게 보면 안 되고 늘 두려워 떨며 구원을 이뤄야 한다. 그런데 악인이나 의인이나 파수꾼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더라도 파수꾼의 잘못은 아니나, 파수꾼이 깨우치지 않아서 그가 죽으면 파수꾼의 죄라 하신다. 그들을 깨우쳐 범죄 하지 않게 되면 그들도 살고 파수꾼도 산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하면 된다. 그것은 경고하는 것이다. 회개하거나 회개하지 않거나 하는 것은 파수꾼의 몫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몫이다. 파수꾼이 말씀을 알렸다면 그는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한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가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듣고도 깨우치지 않으며 깨닫지 않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요, 그 책임은 각자 그 자신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경고를 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옳고 그른 것을 말하는 것에 불편해하면서 빙빙 돌리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복음 전도와 설득과 선포에 있어서 이 파수꾼의 역할을 잘 인식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구원하는 것까지 우리가 하려고 하면 월권이다. 되지도 않을뿐더러 낙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목장 사역을 하다가 지치는 이유 중에 이런 경우가 꽤 많다. 내가 사랑으로 섬기고 VIP의 필요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하며 섬기고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목장에 초대하고 때가 되면 교회로 초대하고 예수영접모임과 생명의 삶에 자꾸 밀어 넣어주고 하면 된다. 반면에 그 VIP영혼을 구원하고 성장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걸 거꾸로 하여서 구원과 성장을 내가 시키려고 하면 실망하게 된다. 기대치를 자꾸 높이게 되면 ‘내가 이만큼 했는데, 이 정도는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갖게 되고 그 기대치에 못 미치면 분노가 일어나고 자괴감에 시달리고 비교의식에 빠지면서 절망과 탈진이 오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치를 제로로 만들어야 한다. 구원받는 것과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기적이고 천지개벽할 일이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다. 그저 나는 사랑으로 섬길 뿐이다. 이걸 딱 붙잡아야 한다.
3. 파수꾼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치열한 사역 현장으로 보내기 전에 에스겔을 들로 보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셨다. vv22-23, “거기서 주님의 능력이 내 위에 내렸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들로 나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할 말이 있다.’ 23 그래서 내가 일어나 들로 나가서 보니, 그 곳에는 주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는데,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던 영광과 똑같았다. 나는 땅에 엎드렸다.” 우리도 에스겔처럼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의 능력으로 일해야 한다.
우리가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내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해야 한다. 목장사역을 하다 보면 어려움과 고난이 생긴다. 그게 당연한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 목장 나눔을 듣다 보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서 마음이 답답해진다. 우울증 걸렸는데, 내가 정신과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해결해줄 것인가? 부부관계가 악화되어 이혼하겠다는 데, 내가 무슨 상담 전문가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나? 사업이 망해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뭘 해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이걸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해야 할 때이다. 주일 연합예배에 와서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위로와 격려와 도전과 책망과 용기를 얻게 되고 그러면서 치유가 일어난다. 또한 목자들의 목장인 목자조모임에 가서 거기서 힘든 얘기도 하고 기도제목을 내놓고 기도하고 응답받게 되면 어려워도 이겨낼 힘을 얻게 된다.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난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과 격려하심이 있을 때 우리는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예배와 말씀과 기도가 결여되거나 메마른 사역은 언젠가 힘을 잃고 방황하고 좌절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가득한 삶을 통해서 사역할 때 영혼 구원의 열매도 맺히게 되고 지치지 않고 사역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아멘! 아니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이겨낼 영적, 정서적 에너지, 능력을 얻게 된다. 할렐루야!
vv24-27, “그 때에 주님의 영이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셨다. ‘너는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거라. 25 너 사람아, 사람들이 너를 밧줄로 묶어 놓아서, 네가 사람들에게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26 더욱이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너를 말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들을 꾸짖지도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27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할 때에, 네 입을 열어 줄 것이니, 너는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들을 사람은 들을 것이고, 듣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할 것이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좀 이상하고 이해가 잘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의 마음속에 들어와 일으켜 세우시고 일러주시길,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으라고 했다. 이 명령에 따라 에스겔은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은 앞의 내용과 상반된다. 사람들이 에스겔을 밧줄로 묶어 놓아서 사람들에게 나가지 못할 것이란 얘기다. 또 하나님도 에스겔의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말 못하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의 뜻은 선지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밧줄로 묶어놓는 박해 때문에 하나님도 에스겔이 당분간 공적 예언사역을 하지 않도록 말씀을 주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에스겔은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경고해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을 받았지만, 백성들은 듣지 않고 핍박할 것이 예상되고, 또 하나님도 말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경고해야 하지만, 말은 못한다. 참 어렵다.
그런데 그 다음 절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v27,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할 때에, 네 입을 열어 줄 것이니, 너는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들을 사람은 들을 것이고, 듣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할 것이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나님이 말할 때에 에스겔의 입을 열어 줄 것이고, 그때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하면 된다. 물론 그때에도 들을 사람은 듣고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씀은 에스겔이 파수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만, 청중은 반역하고 패역한 족속이고, 에스겔이 자기 임의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입이 열려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벙어리 아닌 벙어리가 될 것이란 얘기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할 말을 주셨고 파수꾼이 되라고 하셨고 침묵하면 죄를 묻겠다고 하셨지만, 에스겔은 벙어리 된 자신의 입을 하나님이 열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마디로 예언자는 제 시간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야 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사실 파수꾼의 사명을 받아 사역했지만, 많은 날 동안에 벙어리 선지자로 퍼포먼스를 하면서 보내야 했다. 몇 번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에스겔이 장로들에게 말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벙어리 선지자에서 본격적으로 입을 완전히 열어 말하게 된 것은 겔 33:21-22에서 부터다. “우리가 포로로 잡혀 온 지 십이 년째가 되는 해의 열째 달 오 일에,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이 내게로 와서, 그 성읍이 함락되었다고 말하였다. 22 도망하여 온 그 사람이 오기 전날 저녁에,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아서, 나의 입을 열어 주셨다. 그 사람이 아침에 나에게로 올 즈음에는 내 입이 열려 있었으므로, 나는 이제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걸 복음전도와 연결하여 생각해본다. 우리는 지금 가정교회 목장을 통해 전도하는 관계전도를 하고 산다. 관계전도를 하는 목장의 전도는 먼저 vip를 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과 목장을 정말 필요로 하는 5명의 목장 vip명단을 정한다. 교회와 목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정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를 떠났다. 아니다. 목장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장과 하나님을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목장에서 함께 기도한다. 매일 기도하고 목장에 모여서 기도하고 수요기도회 때 같이 이름을 불러 가면서 기도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든 목원들이 다 참여해서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자 목녀만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하면 막상 vip가 왔을 때 목원들이 다 같이 품어주지 못하고 질투한다. 동생이 태어났는데, 눈을 콱 찌르는 일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 대다수 VIP들은 에스겔 시대에 포로 백성들처럼 아무리 권해도 꼼짝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끌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사진과 간단한 신상을 제출하여 기도한다. 카톡이나 sns를 보면 사진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사진으로 얼굴을 보면서 하루에 한 번씩 기도한다. 그냥 막연하게 “OOO를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단계에 따라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주님과 천국에 대해 목마르게 해주세요.”, “한 번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목장에 참석하게 해주세요.”, “예수영접모임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세례 받게 해주세요.” 똑같은 기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기계적이라고 폄하하지 말라. 기도가 쌓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다. 한 명의 VIP가 예수를 영접하면 그 사람 명단을 빼고 다음 타자를 집어넣는다. 그래서 목장 VIP로 항상 5명을 유지하게 한다.
그리고는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보내고 싶은 목장과 교회가 있다. 맡기면 잘 할 것 같은 목장과 교회가 되라. 그런 목장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감동을 주는 섬김과 구체적인 기도응답이 있는 목장이다. 설득해서 되지 않는다. 섬겨주니 고마워서 찾아온다. 기도제목을 내놓으니 응답이 되기에 계속 오는 것이다. 없을 때 섬겨야 진짜 감동이다. 있는 걸로 섬기면 고맙긴 하지만 감동은 없다. 그러나 없는 걸로 섬길 때에는 감동이 있다. 그래서 없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축복이다.
그렇게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주님이 감동주실 때 가서 사랑으로 섬기는 거다. 그럴 때 목장에 나오라고 쉽게 말하지 말라. 에스겔처럼 벙어리 해라. 설익은 걸 거두려고만 하지 말고 그냥 참고 인내하면서 사랑으로 섬겨라. 정말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영혼을 사랑하면서 섬겨라. 말하고 싶을 때 참고 말하지 말고 섬겨라. 그러나 때가 온다. 말해야 할 때가 온다. 먼저 상대방이 물어올 때다. “혹시 교회에 다니지 않으세요?” 그때가 바로 말할 때다. 목장에 초대할 때다. 그럴 때도 안 들을 사람은 안 듣고 떠나간다. 그러나 그 중에 들을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목장에 나오게 되고 교회에 나오게 되고 예수영접하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 사실 우리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입을 열어주시는 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사명을 모른 채 살고 있는 것이다. 아! 내가 그와 같지 않은가?
요나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 시대에 파수꾼으로 세워졌다. 하나님은 그에게 원수의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외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러나 요나는 그 일을 버리고 다시스로 도망갔다가 강풍을 만나 고기뱃속에서 건짐 받고 기도를 통해 살아나게 되었고 니느웨에 토해 내쳐졌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복음을 외쳤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의 외침을 듣고는 앗수르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여 구원함을 받았다. 우리는 하기 싫어도, 힘들어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파수꾼의 사명을 깨닫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되 내 힘이 아니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일하고 하나님의 때에 말할 줄 아는 지혜로운 파수꾼이 되자. 파수꾼의 사명 잘 감당해서 칭찬 듣고 상급 받는 주의 일꾼이 되길 바란다. 아멘.
영적 파수꾼의 사명
겔 3:16-21 / 박봉수 목사
일전에 초등학교 6학년아이를 둔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글쓰기 숙제를 도와달라고 왔더랍니다. 글쓰기제목이 무엇인지 보니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답니다. 그런데 아이는 선생님께서 이 숙제를 내준 의도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이 제목의 뜻도 잘 모르고 있더랍니다.
아이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답니다. 아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이번에는 왜 의사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답니다. 아이가 멋있어보여서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의사가 돼서 뭘 하려고 하느냐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싶다고 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네가 살아가는 이유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이분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답니다. “나는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고 보니 자기는 스스로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물었던 기억이 별로 없더랍니다. 오래 전 학창시절에 생각해 보고는 사는 것이 바빠서 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처럼 아이 때문에 자기가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이 바쁘고 살아내는 일이 벅차기 때문에 살아가는 이유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분명히 살아가는 이유를 붙잡고 살아온다고 왔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두 종류의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는 ‘생존’(生存)입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에 급급한 인생을 말합니다. 하루하루 밀려드는 일상을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삶의 과제와 씨름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실존’(實存)입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으려고 힘쓰고, 그 이유에 충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인생을 말합니다. 일상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유를 놓치지 않고, 그 이유를 좇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에서는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서 실존으로 나가야 한다고 권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합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 살아가는 이유를 ‘사명’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명은 특별히 예수를 믿고 난 뒤 발견한 살아가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살아가는 이유라고 믿는 그 무엇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예수 믿고 난 뒤 새롭게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겔서 전체로 볼 때 본론이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앞의 겔 1:1-3:15까지는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 내용은 에스겔이 부르심 곧 소명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왜 부르셨는지를 말씀하시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야기요, 에스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주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명의 발견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스겔은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는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원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바벨론이 침공을 받아서 멸망해 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주전 605년에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유다의 지도자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8년 뒤인 주전 597년에 다시 쳐들어와서 또 지도층 인사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에스겔이 이 때 26살 젊은 제사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서 눈물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겔은 제사장이었지만 성전이 없는 곳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살아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채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전 593년 그가 포로로 끌려온 지 5년째 되던, 그가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로 선지자로의 사명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성전 없는 곳에서 허울뿐이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명이 에스겔을 다시 새로운 삶을 살게 일으켜 세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줍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모르고 살던 사람이 분명한 살아야 할 이유를 알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일은 의미 없는 노동이요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이지만, 그 일 가운데서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더할 수 없는 축복이요 기쁨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자식들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골칫거리요 짐이지만, 양육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자식들은 보배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가사노동은 도망치고 싶은 무거운 짐이지만, 가족들을 섬기는 사명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일은 사랑의 일거리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은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의미 없는 삶을 의미가 가득 담긴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가 넘치는 삶으로 바꿔놓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명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뒤 칠일 후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그에게 사명이 무엇인지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부분을 읽게 될 때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까 사명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한 나는 어떻게 사명을 알 수 있을까? 내가 사명이라고 믿는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스스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제로 성경에서 사명을 받았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거나 고민할 필요 없이 사명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오늘 그들처럼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사명을 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 주십니다. 때로는 설교말씀을 들을 때, 때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때로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 마음 속에 깨달음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어떤 결심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따라 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성령의 감동’이라고 부릅니다.
벧후 1:21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이 말씀은 성경기록 과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들은 이야기, 자기가 체험한 사건, 그리고 자기가 써야 할 내용들 이런 것들을 마치 책을 쓰는 저자들이 자기가 구상해서 자기 생각대로 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저들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성경저자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온 존재 전체를 사로잡으셔서 쓸 마음을 갖게 하시고, 쓸 것을 생각나게 하셔서 그들은 성령에 순종하여 쓴 것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깨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자는데 꿈속에 환상을 보고 신비한 음성을 듣고 사명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다가,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다가, 어떤 사건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시고 그 길로 나가시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라는 분이 쓴 책 가운데 [이것이 사명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남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축복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는 사람은 단지 그것을 망상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짐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사명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남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말거나, 남다른 아픔이 있는 것을 고통으로 느끼고 말거나, 남에게 없는 설레는 꿈을 망상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거나, 남다른 힘든 일을 그저 부담으로만 느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성령이 감동하시면 이것들 안에서 우리는 사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명을 발견하려면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로 내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십시오. 특히 성령께서 가슴 뛰게 하시는 일에 주목해 보십시오.
영적파수꾼의 사명
이제 에스겔이 발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7절을 보면 “이스라엘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여기서 파수꾼은 성벽이나 망대 위에서 망을 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말로는 군의 경계병을 말합니다. 이 경계병은 적군의 공격이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미리 대처하도록 알리는 임무를 띤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은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을 실제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는 뜻이 아니고, 영적인 파수꾼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파수꾼의 사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내 입의 말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파수꾼의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이스라엘백성들의 상황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잘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현재 영적상태를 잘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관점에서 현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현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 상황을 잘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공부했던 한 신학자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손꼽히는 칼 바르트가 한 말입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그리고 한 손에는 신문을” 그리고 또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성경과 신문이 정말로 필요하다. 신문은 인간이란 뭔가에 대한 일상적인 기사를 매일 제공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렇습니다. 영적파수꾼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읽으면서 현재 상황을 남다르게 영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만 들고 읽기만 하면 세상물정을 잘 모르게 됩니다. 반대로 신문만 들고 읽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각만 가지게 됩니다. 이 둘을 함께 들고 읽으면 영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이 일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메시지는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과 신문을 함께 읽으며 영적메시지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특히 창세기의 바벨탑사건을 읽으면서 신문을 통해 현 상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우선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인간이 쌓아온 현대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기루같이 허망한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보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첨단과학에 기반을 둔 현대의료체계가 생각지 못했던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맥을 못 추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 사회, 문화 등 현대사회의 눈부신 발전성과들이 속절없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마치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이 쌓아온 현대문명이 무너져 내린 저 바벨탑과 같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악함을 보게 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알리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은 점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파수꾼은 나팔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높은 망루에서 망을 보다가 적군이 쳐들어오면 나팔을 불었습니다. 적이 쳐들어온다고 나팔을 불어 알렸습니다. 영적파수꾼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깨달은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무엇을 알려야 할까요? 우선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임을 알려야 합니다. 대적 마귀가 다가오고 있는데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야 합니다.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데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야 합니다.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구원받을 때라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다음으로 죄를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죄 짓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 인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분명하게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18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파수꾼이 알리지 않을 때 준엄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파수꾼이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아서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이 믿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권하지 않아서 헌신할 사람이 헌신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즉 사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가 영적파수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의 눈으로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리고 잘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파숫군의 사명
피영민 목사
서 론
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시작해서 1945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날이었습니다. 당시의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12월 7일을 국치의 날로 발표했습니다. 일본의 해군 비행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군 해군 기지를 공격한 날이었습니다. 열 두 척의 미국 해군이 침몰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리조나선은 1,000명 이상이 타고 있었고, 1,000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습니다. 2,403명의 군인들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진주만 공격이라고 부릅니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Tora Tora Tora)」, 「진주만(Pearl Harbor)」에서 생생한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준비한다라는 내용을 미국에 송신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심지어는 진주만 공격 개시 불과 몇 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 200마일 해상에 잠수함이 떴고, 거대한 물체가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미국 해군은 그 대상은 필리핀이라 생각하고 휴일을 즐겼습니다. 미국 해군이 얼마나 파숫군의 경고를 무시했으면 심지어 음모설이 퍼졌겠습니까?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해서 일본을 결국 패망시키려고 하는 명분을 얻고자 했다는 음모설이 지금까지도 유포되어 있습니다. 몰론 이런 음모설은 사실이 아닌 것이 충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큼 미국 해군은 파숫군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파숫군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미국은 일본에게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일본이 진주만으로 말미암아 미국을 단결시키게 하고 미국 사람들이 모두 단결해서 일본 패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 진주만 사건입니다.
그런데 에스겔 3장과 33장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파숫군의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이 파숫군이 되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파숫군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기분과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스겔을 파숫군으로 임명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파숫군은 영어로는 Watchman이라고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중동 국경 지역에는 성들이 있었습니다. 파숫군은 성벽 꼭대기에 올라가서 밤새 지켜 보는 것입니다. 적이 쳐들어오지는 않는가? 짐승이 오지는 않는가? 성내의 시민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경고하는 것이 파숫군의 사명이었습니다. 파숫군은 잠시라도 졸아서는 안됩니다. 성내의 모든 시민들의 안전이 파숫군의 눈꺼풀 하나에 달려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도시를 방어하고 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이 파숫군이라고 하는 자리는 꼭 필요한(Necessary)일이며, 매우 중요한(Important)자리입니다.
Ⅰ. 파숫군의 사명은 누구에게 있느냐?
먼저 우리는 이 파숫군의 사명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에스겔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해당되는 사명인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파숫군의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는 파숫군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소아시아 밀레도에 도착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감독자라 했습니다. Overseer는 위에서 내려다 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Watchman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장로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양떼를 헤치지 않는가를 살펴보는 사람입니다. 이단이 들어오지는 않았는가? 교리적으로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는 하지 않는가? 윤리적으로 부패한 사람이 들어와서 양들을 잘 못된 길로 이끌지는 않는가? 이러한 것들을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하는 파숫군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 목사님들은 파숫군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파숫군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파숫군이 적군이 쳐들어온다고 소식을 알려도 듣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또 경성한다는 말은 계속해서 살펴본다는 말입니다. 목사나 장로들은 파숫군이 되어 계속해서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 성서는 목사나 장로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파숫군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2절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 마태복음 25장 13절에는 “그런즉 깨어 있으라”, 고린도전서 16장 13절에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는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파숫군의 사명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소원이 있다든가, 하고 싶은 기분이기 때문에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기 때문에 파숫군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죠! “우리는 영적인 파숫군이다”
Ⅱ. 영적인 파숫군의 사명은 무엇인가?
본문 17절을 보면 두 개의 동사가 중요합니다. “듣고, 깨우치라”입니다. 파숫군은 첫째로 들어야 하고 둘째는 깨우쳐야 합니다.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파숫군은 시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귀도 좋아야 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한 친구가 보초를 서게 되었습니다. 보초를 서고 있는데 부대장이 동쪽에서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서쪽을 향해 응답을 했습니다. 동문서답한 것입니다. 이후로는 보초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보초는 눈도 좋아야 하고 귀도 좋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파숫군이기 때문에 보초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파숫군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깨우쳐야 합니다.
깨우치는 대상은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악인이고, 또 하나는 의인입니다. 본문 18절로 19절에서 악인은 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죄인을 향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죄를 용서 받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영원한 지옥 형벌에 떨어진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가는 길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가도 죽는 길입니다. 파숫군은 그 길 가운데 서서 막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은 죽는 길입니다. 지옥 가는 길입니다. 그 길로 가지 마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값을 값으셨는데 어찌하여 안믿으십니까?”라고 전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전하지 아니하면 피 값을 파숫군에 찾을 것입니다. 지옥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합니다. 지옥은 관광하는 곳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영벌의 장소입니다. 영원히 매 맞는 곳입니다. 지옥 가서 친구들과 논다고 하는데 엉뚱한 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가지고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되면 영원 형벌의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 이야기 보다 지옥 이야기가 더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인해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숫군이 되어 주의 말씀을 듣고 악인의 가는 길을 막아서야 합니다.
어떤 분은 “2000년 전에 청년 예수가 33살의 나이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은 것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나쁜 강도가 십자가에 죽으면 마땅히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품안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 온 인류의 생명을 다 합하여도 그분의 생명값만큼 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귀한 분이 십자가에 죽어 피 흘린 것을 강도의 죽음과 같이 똑같이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들이 가는 길을 막아서서 “예수 믿으면 그 피가 너희 죄를 씻어 줄 것이고, 너는 돌이켜 예수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지옥가지 않고 언제 죽어도 천국가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파숫군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을 보면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파숫군이 깨우쳐야 할 대상은 악인뿐만이 아닙니다. 의인들도 깨우쳐야 합니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예수 믿고 교회 다녔을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배역(Backsliding)하고,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향해서도 파숫군은 경고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찌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백성의 죄에 대해서 경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사야 58장 1절을 보면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파숫군은 크게 외쳐야 합니다. 적들이 밤에 쳐들어 오는데 속삭이듯 말하면 안됩니다. 나팔을 불 때에도 가장 큰 소리로 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어느 전도사님이 갖고 있는 핸드폰의 벨소리가 군밤 타령입니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입니다. “찬송가, 복음성가, 클래식 같은 벨소리 많은데 왜 하필 군밤 타령이냐?”라고 물었더니 대답이 그럴 듯 합니다. “새벽 예배 나오기 위해서 알람 소리를 큰 소리로 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조용히 하면 안됩니다. 아주 큰 소리로 외치고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숫군은 발음도 좋아야 합니다. 어떤 집안의 내력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발음 중에 “아”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군대에 갔습니다. 하루는 밤에 순찰을 돌았습니다. 보초 서는 병사가 “암호?”라고 외쳤습니다. 이 날 암호는 “고구마”였습니다.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고구미”라고 답했습니다. 이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죽으면서 오늘 암호가 “김진기(감잔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확인이 안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Ⅲ. 파숫군의 일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파숫군은 일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정병이 잠깐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초 선 사람이 졸게 되면 큰일 납니다. 그러므로 파숫군에게는 절대 성실이 요구됩니다.
절대 성실이 요구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명을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불성실한 자세로 하면 안됩니다. 요즘 미국에서 일어나는 교회 운동 가운데 Community Church 운동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면 “동네운동”이라는 말입니다. 목사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는가를 묻고, 이에 대한 답변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회방향을 설정하는데 참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교회가 부흥되는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목사들에게 불신자들의 말 듣고, 여론을 따라 불신자들 좋게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에게도, 예레미야에게도 사람들이 요구했습니다. “에스겔아 우리 귀에 듣기 싫은 소리 하지 말고 부드러운 소리해라! 너는 우리가 망한다는 소리하지 마라!” , “예레미아야 너는 우리가 포로로 끌려간다는 소리 하지 마라! 듣기 좋은 소리만 해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는 “나는 주께서 주신 말씀을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노라”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사야 30장 10절을 보면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 귀에 좋도록 부드러운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 14장 13절로 14절을 보면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아 죄로부터 돌이키지 아니하면 바벨론이 와서 너희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멸망시키면 너희는 70년은 포로생활을 해야 한다. 회개를 하든지, 바벨론에 항복을 하든지 선택을 해라!”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아니다. 우리들은 포로 안 될 것이며 전쟁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근도 없다. 평강 할 것이다.”라고 거짓말만 했습니다.
저에게도 사람들이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고, 종교는 다 천국가는 각각의 길이니깐 “목사여 다른 종교 비판하지 말고, 다른 종교도 천국가는 길이라고 말하십시오. 좋은게 좋은거 아닙니까?”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서는 모두 지옥갑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왜요? 성경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기록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동네 아저씨가 말씀하셨으면 약을 잘못 드셨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듣는게 좋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데로 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를 전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깨우치라고 사명을 받은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성실해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만약에 파숫군이 사명을 성실하게 증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살인자”의 책임을 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18절 후반과 20절 후반을 보면 “피 값을 찾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파숫군에게 “악인이 있는데, 계속가면 죽는다고 전하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파숫군이 전하지 않아 죽었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지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왜 이곳에 오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파숫군 보냈는데 안갔냐?”라고 물어 봅니다. 파숫군이 대답합니다. “예 안왔는데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피 값을 그 파숫군에게서 찾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 할 것입니다. “나와 함께 생활 했는데, 죽으면 지옥간다는 것을 왜 안가르쳐 주었냐? 예수 믿으면 죄 용서 받고 천국간다는 것을 왜 안가르쳐 주었냐?”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 집사를 그냥 두지 마시옵소서”라고 하면 그 사람 죽은 피 값을 파숫군된 우리에게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경고입니까? 죄인의 대해서 경고하지 않으면, 의인이 배역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살인자의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숫군의 사명을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숫군의 사명을 다 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 26절로 27절을 보면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파숫군의 사명을 다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내 주변 사람이 지옥가도 그 피에 대해서는 깨끗하다. 내가 그들에게 틀림없이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안믿었다”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에게 전하지 않아서 죽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파숫군의 사명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성실히 수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파숫군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악인에게 전하게 되면 악인들은 돌이키게 됩니다. 악한 행실과 악한 마음에서 돌이키게 되면 악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타락한 의인들에게 전하고 돌이키게 되면 그 사람도 살게 되고, 파숫군의 영혼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고 그들도 살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파숫군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지켜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말씀을 악인과 타락한 의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성실한 파숫군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우리 영혼도 보존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집시다
겔 3:16-21 / 박금호 목사
요즘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열정이 축구를 통해 분출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도대체 어디서 이런 열정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열정입니다. 이 열정을 보면서 저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이 열정을 영혼구원에 쏟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열정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되지 않는 것이 세상만사의 이치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열정이 없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감격과 기쁨이 없이는 참으로 고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우리 선수들은 열정을 가지고 경기하고, 우리 국민들은 열정적으로 응원하다보니 세계가 놀라지 않습니까! 축구 경기에서도 그러는데, 하물며 영혼을 구원하는 고귀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열정을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매진한다면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이 일에 열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까?
Ⅰ.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 주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주님의 군사이기도 합니다. 군사는 대장되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복종하되 열과 성을 다해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오신 이유는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도하러 다른 마을로 가자.”라고 제자들을 재촉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열정적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쳐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33년의 공생애를 영혼구원에 열정적으로 매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면서도 영혼구원에 대한 명령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그래서 우리는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결박당하는 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매 맞고 핍박 받고 죽임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긍지요 영광이었습니다. 이런 열정 때문에 그 많은 핍박과 압제를 이기고 복음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 안에 이러한 열정이 타오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의 존재가치는 복음증거에 있으며,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병폐, 말세교회의 병폐가 무엇입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고 미지근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습니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각오가 있으십니까?
Ⅱ. 천국과 지옥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으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누구든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죄 사함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립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우리의 인격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예수 믿고 가정이 좀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삶이 좀 더 풍성해지고, 자녀들이 더욱 더 번성해지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맞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예수 믿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갖지 못했다면 궁극의 문제를 놓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믿으십니까? 영생을 얻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 복음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사후는 지옥입니다. 멸망입니다. 그렇게 선언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아시지요? 여기에서는 음부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음부가 어떤 곳입니까?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을 적셔서 혀끝에 댈 수 있는 긍휼조차도 얻지 못하는 곳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다른 사람은 이곳에 오지 않기를 절규하는 곳입니다.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고통의 단말마가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부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내 형제들로 이곳에 오지 않게 해주소서!” 지옥에 있는 죽은 자들의 부르짖음과 절규를 생각하십시오. 예수 믿으면 영생천국이요, 믿지 않으면 영벌 지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천국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Ⅲ. 이 길만이 참 행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집니까? 어떻게 살아야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까? 지식을 많이 쌓는 것입니까? 권세를 잡는 것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유명인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고, 내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값있고 가장 보람되고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만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생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가치있게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행복해지지 않았습니까? 이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십니까? 다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일어나서 전하십시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인생의 참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떠들썩합니다. 감격합니다. 스트레스가 확 해소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일시적인 일 때문에 영원한 문제에 관심을 소홀히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스포츠는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천국은 영원한 것입니다. 스포츠가 주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예수 만남으로 얻게 되는 참 행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스포츠는 일시적으로 근심걱정을 잊게 해주지만 그것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예수 만이 우리의 근심 걱정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행복과 기쁨과 의미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전에는 허무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예수 만나고 행복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일어나 전합시다. 참 행복의 길을!
정리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고 ….”(겔3:1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민족과 가정의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들을 깨우치는 것이 파수꾼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6월 한 달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온 교회가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어야 합니다. 날마다 심방하고 전도하며, 날마다 잃은양을 찾아 나섭시다. 여러분, 뜨거움 없이는 아무 것도 안됩니다.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집시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영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명령을 생각하십시오.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십시오. 이 길이 참 행복의 길임을 생각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에게 총명을 주실 것입니다.
파수꾼
토마스 왕 목사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시대 교회에 매우 중요한 내용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날 교회의 위기와 책임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선 본문 말씀과 함께 여호수아 8장15절-22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 패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그 성 모든 백성이 그들을 따르려고 모여서 여호수아를 따르며 유인함을 입어 성을 멀리 떠나니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따랐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 본 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따르던 자에게로 돌이켰더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을 죽이고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혹은 이편에서 혹은 저 편에서 쳐 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BC 600년 경, 에스겔 선지자시대에 유다국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고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워 그들을 사수하도록 하셨습니다. 파수꾼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자더라도 깨어있어야 하고, 남들은 쉬더라도 쉬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깨어서 적들이 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또한 적들이 오면 소리를 내어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에게 큰 책임을 주셔서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경계토록 하셨습니다. 만약 악인이 회개치 아니하면 죄로 인해 죽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도 악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막중한 책임입니다. 에스겔이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악인은 죽고 에스겔 역시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이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악한 사람들에게 말해야 할 책임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주님을 믿지 않고 멸망한다면 교회에 그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우리는 복음의 빚을 진 자들이다”라고 말한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책임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에스겔로 하여금 악인들을 깨우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도 깨우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의인도 때로는 하나님을 잊고 잘못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 크리스천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큰 종파에서 2년 전에 주교를 세웠는데 그는 동성연애자였습니다. 원래 가정이 있던 사람으로 부인과 이혼하고 자녀들도 방치한 채 지금은 한 남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주교는 목사의 목사를 말하는데, 명색이 교회라는 곳에서 그런 사람을 주교로 세웠습니다. 그들은 이미 교회의 범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의인에게도 깨우쳐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의인도 회개하고 교회도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잘못 나가고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파수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무리를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이 말세에 그의 악함이 더욱 거세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갔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아이 성도 점령하고자 했지만 패했습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울부짖을 때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지은 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척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시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그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성을 일곱 번 돌고 함께 고함치며 앞으로 달려가자 그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 얼마나 기이한 하나님의 전략입니까? 아이 성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성 뒤편에 매복하고 “너희들은 여전히 그들과 싸우라. 그렇지만 그들과 마주할 때는 너희는 도망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다음 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 성 사람들과 싸우자마자 몸을 돌려 도망갔습니다. 아이 성 사람들이 쫓아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도망갈수록 아이 성과는 멀어지고, 성은 지키는 자 없이 텅 빈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너의 그 창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이 신호를 보고 성 뒤편에 매복했던 복병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 성을 점령하고 불살랐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던 아이 성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성은 불타고 있었고,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몸을 돌이켜 그들을 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시사점이 있습니까? 아이 성의 전략은 오늘날 동 서양의 교회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날 사탄의 전략은 마치 그때와 같습니다. 마귀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전략을 따르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전면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항합니다. 많은 나라가 선교사들에게 문을 닫고 기독교를 반대하고 성경을 불태우고 많은 형제자매들을 감옥에 가두고 많은 전도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귀는 또한 우리의 뒤에도 복병을 두고 공격합니다. 크리스천 국가들을 부패하게 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여러 선교사 파송 센터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과거 서양교회는 선교사 파송의 센터였습니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제 마귀는 정면으로 그들을 막을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 그 국가들을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들고 교회를 타락하게 만듭니다.
요즘 유럽이나 영국의 교회를 가보시면 많은 교회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천주교나 모슬렘 예배당이 되었고 박물관이나 심지어 도박장이 된 곳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유럽은 50년 전의 유럽이 아닙니다. 아이 성의 사람들은 아무런 방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갔다가 성을 함락 당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국가들도 점점 자신의 신앙의 성을 함락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달 전에 런던에 있으면서 영국교회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모리슨 선교사를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중국에 파송했고 그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를 중국에 파송했던 영국교회가 오늘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영국의 목회자들로부터 아시아 지역의 목회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최근 한 법이 통과 되었는데, 어느 교회든 동성연애자들의 결혼 주례를 반대하면 위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 영국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일이 아시아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서양의 문화와 풍속은 전 세계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30년 전에 영국 사람들도 오늘날의 영국이 이렇게 되리라고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반 년 전에 저는 아내와 함께 비엔나를 방문했습니다. 비엔나는 아름답고 좋은 음악적 전통이 있는 곳이지요. 매일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한 호텔에 묵으면서 그곳에 비치된 여러 관광 안내책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여행에 관련된 책자였는데 그 중에 ‘게이 가이드’라는 동성연애자를 위한 책자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동성애자 남성의 나체 사진과 이름, 주소, 전화번호와 함께 가격이 적혀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는 이 문제에 대해서 호텔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안내책자를 어떻게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놓을 수 있습니까? 다른 곳에서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반응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가?’하는 식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것은 매우 일상적인 것입니다. 비엔나에는 이런 곳이 백 곳이 넘게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방에 들어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유럽은 본래 선교의 기지였는데 오늘날 이렇게 되다니요. 신앙과 교회의 본 고장이었던 곳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요?” 우리는 주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서양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50년 동안 미국에 살고 있는데, 지금 미국의 상황도 좋지 않습니다. 1962년 미국의 최고 고등법원에서 “공립학교에서 다시는 기도할 수 없다”는 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1963년에는 “공립학교에서는 성경을 더 이상 읽으면 안 된다”는 법을 또 통과 시켰지요. 그래서 미국 사회는 1960년대 초부터 점차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에 대해 던지는 메시지는 “만약 미국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미국에 돈이 얼마나 많고 군사력이 얼마나 강하든지 미국의 앞날은 없다”는 것입니다.
1년 전 저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미국이여,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과거 중국과 한국, 아시아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나라입니다. 저희 집안이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금년에 82세인데, 저희 집안은 150년 전, 제 할머니 대로부터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님들이 제 할머니가 살고 있던 중국 북쪽의 한 시골에 오셨습니다. 그 당시에 중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을 ‘서양 귀신’이라면서 배척했습니다. 저희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면 당시 중국 사람들이 선교사님들을 환대하지 않아서 그들은 심지어 길거리에서 잤다고 합니다. 미국의 선교사가 중국의 시골마을의 길거리에서 잠을 자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국 사회는 점차 하나님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미국 교회들이 회개하도록 부르짖어야 합니다.
지난 해 우리는 이 잡지 50만 권을 인쇄해서 미국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 미국 연방과 각 주와 지역의 법률, 군사, 경제 등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선교사들을 중국에 보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 중국인 중 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내서 회개토록 하니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편지를 보내서 저희를 욕했습니다.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고, 더 이상 종교를 신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미국이 그렇게 싫으면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 반응에 대해서 입을 다물면 되겠습니까? 오늘날 사탄은 뒤에서 선교기지를 초토화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왜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세계 선교를 할 때 양면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앞과 뒤에서 함께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처럼 앞에 나서서 각 선교지역을 향해서 선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또 해야만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 선교기지, 선교센터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영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양 교회들은 세계선교를 하면서 정작 그들의 기지는 초토화되었던 것입니다. 서양 교회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여의도 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대회로 아시아의 많은 교회들이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선 한국 교회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1만 여 선교사들이 몇 백 개 나라에 나가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한국 교회는 하나님 손에 크게 쓰임 받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선교지를 향하여 사역함으로써 하나님의 큰 축복을 얻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후방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원래의 선교기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우리 앞에서 우리를 대적하고 방해하지만, 또한 우리의 후방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로 하여금 천천히 식어가게 합니다. 세상의 돈을 탐욕 하도록 합니다. 점점 더 세상을 주님보다 사랑하게 합니다. 그는 앞에서 우리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방을 패하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곳에서 말씀을 전할 때 “우리는 양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은 오늘날 더 이상 피선교지가 아닙니다. 한국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센터요, 기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선교기지를 지켜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더 이상 선교의 큰 본향인 기지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새로운 선교사역지에 대해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모슬렘 지역을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가장 최신의 선교 대상지역은 어디입니까? 바로 서양 국가들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거 서양 국가들은 계속 선교를 나가고 선교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입니다. 그런 그들이 오늘날 선교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과거의 세계 선교는 일방통행처럼 서양으로부터 나가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 선교는 쌍방통행입니다. 서양에서 서양으로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국가들 중에는 비기독교 국가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기독교 국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캐나다, 미국, 유럽, 여러 서양 국가들에도 선교사를 파송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입니다.
저희는 곧 두 번째 잡지를 출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영국이여,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잡지입니다. 이어서 “유럽이여,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책도 곧 출간할 계획입니다. 여러분, 서방국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지 않는 죄
김남준 목사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해서 징벌하고자 하실 때에는 늘 인간들에게 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전쟁, 기근, 질병 그리고 흉년 등으로 나타났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평화로웠던 환경들이 깨어져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크고 환난이 중하면 중할수록 하나님은 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충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심판은 경고 없이 행하여진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알리신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이런 경고를 하셨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듣도록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알리셨습니다.
계속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이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은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그는 매우 불우한 시대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망하고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도 바벨론의 포로 중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4월 5일에 그발강가에 있을 때였습니다. 추측하건데 고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저녁 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도 강가에 나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였고,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징계하고 심판해서 모두 포로가 된 이러한 상황에서도 선지자를 세우시는 일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의 상황이 비극적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요지는 이것입니다. “나는 악인이 계속 악을 떠나지 않고 율법을 거스르면 그를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누차 경고하지만 그는 직접 내 말을 들을 수 없으므로 네가 이 경고의 음성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만약 네가 그들에게 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전하였는데도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너희들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무지 가운데서 멸망한다면 너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으리라.
그는 피를 흘리고 죽을 것이지만 그 피의 대가는 너에게서 찾겠다.”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전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전도란 무엇인가?
전도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정확하게 전해 주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자체가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너무나 경박하고 신중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교회에 나가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을 향해서 보이실 은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길에서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자들을 향한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인식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영혼에 대해서 깊은 염려와 근심이 없는 것은 그의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사랑
진정한 가족사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말씀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서 많이 희생해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모든 면에 있어서 이해하고 양보하여 성스러운 바보가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용하려고 하면 좀 이용을 당해주고 사람들이 자기를 속이려고 하면 좀 속아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복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만으로 궁극적인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연민의 마음은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지 않는 우리 가족에 대하여,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영혼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시고 지옥으로 보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으면 지금보다 삶의 질이나 형편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해서 새 생명 속에 살지 아니하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등의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던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사실들이 가족들에게 마치 도전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다 말해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도 많이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심판의 심각성에 대해서도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들에게 더 깊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죽는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살아온 날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행복한 날들이 없었으며, 열심히 살았으나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반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후에는 부활할 것이지만 그것은 심판 받기 위한 부활이고 결국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들의 심판이 중하면 중할수록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이 그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가를 주님께서는 검증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알고 심판의 의미를 알고 주를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아는 우리가 그것을 전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취해 가시면 다음 기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가족 중에서 혼자만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 책임이 더 막중합니다.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더 심각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려야 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솔직히 말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가족이 복음화 되는 것이 싫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돌아오겠지. 돌아와야 할 텐데...’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가족이 구원 받지 못한 것이 우리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때 여러분은 이렇게 아뢸 자신이 있습니까?
“하나님, 결국은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그리고 내 동생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심판을 받고 주님께 진노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거듭나지 못했고 구원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아시지요?
저의 가족 때문에 제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일평생 사는 동안 가족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몸부림치며 내 모든 인생이 그들로 인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슬픔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까?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울어보았습니까? 주어진 상황에서 몸부림치며 복음을 전해도 차갑게 되돌아오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때 많이 울었습니까?
그들에게 충분히 경고했습니까? 그리고 충분히 사랑했습니까?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인생의 아무런 계획 없이 한 마디의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나곤 합니다.
우리의 가족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충분히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결단할 수 없어서 불붙는 지옥에 던져졌다면 그 고통 속에서 얼마나 우리를 원망하겠습니까?
“맨날 웃고 장난치는 식으로 경박하게 말고 좀더 진지하게, 알아듣도록, 심각하게 그 복음의 진실을 들려주었더라면 내가 믿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사람이 여러분들의 가족 중에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영혼을 지옥으로 보낸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지 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두 가지 중요한 사명을 주셨는데 하나는 제사장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반복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을 비롯해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주신 메시지를 한 번 선포하고 거두어 버린 것이 아니라 계속 전파했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되었습니까? 그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돌이키든지, 아니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바뀌어 질 때까지 끊임없이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또 하나는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의 죄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도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전도는 가족들을 만날 때나 만나지 못할 때나 계속됩니다.
그들을 볼 때에는 사랑으로 대하며 복음의 진실을 일러주고, 그들을 볼 수 없을 때에는 중보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도록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작정하며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이 비록 부흥을 못 만나고 엄청난 회심의 역사를 보지 못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최선을 다해서 살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힘을 다해 경고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샘솟듯 눈물을 흘렸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펑펑 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의 복음화라고 하는 것은 흘릴 피를 다 흘리고 쏟을 눈물을 다 쏟고 찢어질 살을 다 찢기기 전까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 먼저 믿은 우리들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일년이 지나도록 그들에게 한번도 복음을 전한 적이 없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그렇게 죽어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가 그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성적표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만큼 가족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예수 믿게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서 누구도 정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문제로 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향한 찢어지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그들을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샘솟듯 솟아나는 그 눈물의 기도,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묘비의 글자처럼 가슴에 새겨진 사람들, 그 사람들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맺음말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의 눈물이 아직 다 차지를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서 흘린 우리의 마음의 피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당신들이 없는 낙원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당신들이 함께 가지 않는 천국이 내게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그 천국에서 울부짖는 내 육신의 식구들의 통곡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그곳이 내게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구원을 얻어 은혜 속에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침체되어 마음이 곤고해지더라도 어느 순간 이렇게 곤고해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동안에는 우리의 심령이 건조해 질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혼이 고갈되어 비참한 눈물을 흘리는 우리를 보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데, 하물며 전해주는 자 없고 구원을 얻을 만한 지식이 없어 탄식하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깊은 사모함으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가족들에게 우리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줄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런 기도 하나로 그 영혼들을 향한 부담감을 덜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만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래도 응답이 없으면 몸부림치면서 매달리십시오. 그래도 안되면 굶으면서 매달려 보십시오. 마지막에 그래도 대답이 없으면 가족들에게는 생명을 주고 내게는 죽음을 달라고 매달려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정말 우리의 가정에 선지자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제사장의 마음으로 믿지 않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샘솟듯 솟아나는 눈물로 기도해야할 의무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책임감이 투철한 성도
겔 3:17-19 / 김홍도 목사
미국 남북전쟁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부대에서 중요한 비밀 문서를 다른 부대에 전달해야 되는데 그 메신저를 보호해서 데리고 갈 병사를 찾던 중 한 용감한 육군 상병이 지원하고 나섰습니다. 적군이 들끓는 적진을 통과하던 중 그 문서를 가진 사람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자 호위해 가던 그 병사가 그 문서를 낚아채 가지고 돌진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이 병사도 옆구리에 적탄을 맞아 상처 입고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그 중요한 문서를 상처난 자기 옆구리에 쑤셔 넣고 계속 돌진해 목적한 부대에 거의 다 가서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군의관이 숨진 병사의 시체를 검사하다 보니까 그 병사는 입술에 미소를 띄우고 말은 못하니까 손가락으로 자기 옆구리를 가리킨 채 쓰러졌더랍니다. 시신을 검사한 군의관이 말하기를 “옆구리의 상처는 죽을 만큼 치명적이 아니었는데 그 서류를 옆구리에 쑤셔 넣은 것 때문에 죽었다(Wound itself not fatal)”고 보고했습니다.
이 용감한 병사가 얼마나 책임감이 투철합니까? 책임 완수를 위해서 문서를 상처난 옆구리에 집어넣고 목적지에 도착하여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을 찾고 있으며 우리 영적 군대의 총사령관이신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책임감에 충실한 성도들을 찾고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 자기의 책임을 제멋대로 벗어던지는 무책임한 사람은 교회에도, 하나님의 나라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크나 작으나 책임을 맡으면 그 용감한 병사와 같이 최선을 다해야 주님도 기뻐하시고 큰 상급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즉 중간에 변절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책임완수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를 하고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고 은혜를 받으면 그만큼 책임도 따릅니다. 남달리 축복을 받으면 그만큼 책임완수의 의무도 따르는 법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맡으면 그 직분만큼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인데 어떤 분은 집사, 권사, 장로가 되거나 무슨 기관의 장이 되면 그것을 벼슬처럼 생각하여 세도나 부리고 좌지우지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직분을 받으면 받은 만큼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받고 남달리 축복을 잘 감당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수평을 이룬 저울대와 같습니다. 한쪽은 은혜와 축복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 다른 한쪽은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쪽만 자꾸 무거워지고 다른한쪽, 즉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일과 영적 책임을 감당하는 쪽이 가벼우면 언젠가는 뒤집혀서 물질이나 사업이나 건강이 파산되고 쓰러지는 날이 옵니다.
잠깐 있다가 썩어지고 없어지는 세상 것에 치중하고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청지기입니다. 대통령도 잠깐이요, 장관, 국회의원도 잠깐입니다. 몇천 억 제물을 모았어도 잠깐입니다. 죽을 때는 옷 한 벌, 관 한 개면 족합니다. 영원한 것, 영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 두는 것이나 교회에서 책임을 잘 감당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이며 천국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쾌락을 위해 먹고 입고 쓴 것은 다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지만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뿐 아니라 파손이 있으면 그 자손에게 복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사람이 정말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난 뒤부터는 세상의 부귀영화는 분토와 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농담으로 여기거나 웃기는 말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심판 받는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이 코웃음치며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재산도 불타고 생명도 불타 죽었습니다. 바벨론 제국도 멸망했고 그 후신인 이라크도 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파사 제국의 후신 이란도 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는 미국도, 독일도, 일본도 다 멸망하고 심판받는 날이 옵니다. 영적 책임을 완수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과 교회 일을 하는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1. 자신과 가정을 위한 책임
엊그제, 자기 두 아이를 한강 물에 집어던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책임한 아버지입니까? 그럴 것 같으면 장가를 가지 말고 자식을 낳지 말았어야지, 귀찮다고 한강에, 아이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집어던져죽이다니 한마디로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가정을 이루면 그만큼 책임이 중한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신랑이나 신부나 책임이 따릅니다. 그전에는 남의 여자, 남의 남자와 만나는 것도 자유로웠지만 결혼 후부터는 다방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은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자녀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대학엔 떨어져도 지옥엔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에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암살당한 뒤에 Dallas에 있는 한 침례교회 교회학교 선생님한테서 온 편지가 그곳 신문에 게재된 적이 있는데, 그 암살범 오스왈드(Lee Harvey Oswal)가 어려서 그 교회학교 선생을 두세 번 찾아왔던 일이 있는데 잘 만나주지도 않고 방문도 안 했는데 그런 큰 죄를 범했다고, 자기의 책임을 통감하고 후회하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5년 후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가 암살된 다음에 패사디나에 있는 나사렛 교회의 교회학교 선생님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로버트 케네디를 암살한 암살범 씨란 씨란(Sirhan Sirhan)이 어렸을 때 자기가 담임한 반 학생이었다고 하면서 검은 피부의 씨란이 어렸을 때 잘 지도하지 못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하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더랍니다. 그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관심을 가지고 잘 지도했다면 그런 비극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전에 저의 모친께서는 예수님 잘 믿지 않는 자식이 있을 때에는 며칠 밤씩 철야기도 하시면서 “내 자식이 지옥 갈 바엔 내 생명을 거두어 가시더라도 내 자식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술 먹고 담배 피고 깡패 노릇하던 동생 김국도 목사가, 저의 모친이 다리에 시커멓게 멍이 들도록 자기 몸을 때리면서 기도하신 것을 보고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고 결국 목사가 되었습니다.
자기 가족 식구들에 대한 영적 책임감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신앙 지도를 잘해야 될 것입니다.
2. 영혼구원의 책임감
사람이 가진 감정과 열정 중에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은 영혼 구원에 대한 사랑과 열정입니다. 육신은 아무리 일류 대학을 나오고 큰 재벌이 되어도 100여 년 살다가 죽어 흙이 되고 말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입니다. 장차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느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지내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도 영혼구원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6장 38~40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멸망할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 아흔 아홉 마리보다 잃은 양 하나를 찾아오는 기쁨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눅15:7,15:10). 잃었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큰 잔치를 배설하고 기뻐했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시는 목적도 능력 받고 나아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영혼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후예들에게 영혼구원 하는 일 외에 다른 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휘트필드(Gearge Whitefield)는 “하나님이여, 나에게 영혼을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거두어 가시옵소서”라고 구령열에 불타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ier)은 “내가 매를 만 대를 맞더라도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 매를 맞겠다”고 했습니다. William Booth 대장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다면 거꾸로 서서 춤을 추라고 해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영혼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육신구제, 섬김, 봉사만 강조합니다. 그런 것들은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가 부흥되면 자동적으로 하게 마련입니다. 영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큰 교회를 까고 치며 숫자만 많으면 되느냐고 물량주의가 어떻고 하면서 비판합니다. 영혼구원의 책임감 때문에 선교사업도 하고 개척교회도 하고 예배당도 짓는 것입니다.
3. 국가에 대한 책임감
성경 전체를 보면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였고 목숨 바쳐 충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모두가 그랬습니다.
나라가 잘못 되어 갈 때 눈물 흘리며 기도했고 근심하고 탄식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① 진리파수를 위한 책임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진리를 안 후에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 진리 외에 다른 진리를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신앙 외에 다른 데는 구원이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면 독선이라고 하면서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는 멸망의 자식들입니다. 그것이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입니다. 관대한 척 하면서 불교, 유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할 것 없이 다 같은데 기독교는 조금 더 고차원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모든 전통적 진리를 다 부인하는 후기근대주의(Post-modernism)입니다. 십자가의 구속도 부인하고 부활도 부인합니다. 심지어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끌어내리고 너희가 제2, 제3의 예수가 되라”고 합니다. 기독교 복음은 황소개구리와 같아서 이미 있는 토속종교를 다 잡아먹고 심지어 복음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도구로 쓰여진다고 하면서, 황소개구리를 때려잡듯이 때려잡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수, 신학자도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어떤 교회는 복음의 확신이 없고 성령의 능력도 못 받고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자꾸 시대를 따라 변화를 시도합니다. 체질개선을 하고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하면서 별별 것을 다 도입해 시도합니다. “열린 음악회”를 하듯이 “열린 예배”도 시도합니다. 예배가 언제 닫힌 적이 있습니까? 기독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진리와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의 확신도 없고 성령의 능력도 받아본 일이 없으니까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허둥대는 것입니다. 21C가 아니라 31C가 되어도 그 하나님, 그 복음, 그 성령이십니다. 도리어 성경 진리보다 앞서가지 말고 복음으로 돌아와야 되고 초대교회로 돌아와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만 바로 전하면 예나 지금이나 부흥됩니다.
요사이 진보주의, 자유주의자들은 자꾸 변화를 시도합니다. 동성연애도 찬성하고 안락사도 찬성하고 음주, 흡연도 찬성합니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신은 죽었다. 신이 있다면 바로 내가 그 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미쳐 죽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Back to the Bible)라고 했듯이 탈선해 나아가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형식을 좀 바꾸는 것까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기술정보시대이기 때문에 세상 기업과 사업은 뒤떨어지지 말고 변해야 합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놓고 다 바꾸라”고 했다는데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사이는 질서를 파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처녀들도 젖가슴을 다 내놓고 배꼽, 허벅다리 다 내놓습니다. 성한 옷도 갈기갈기 찢어서 입습니다. 가정주부들도 따분하게 어떻게 한 남편만 바라보고 사느냐고 하면서 적당히 간식도하고 양식도 해야 된다고 합니다. 바꾸면 안 될 것까지 바꿉니다.
애국가는 안창호 씨가 작사한 것이 아니라 윤치호 씨가 작사했다고 합니다. 1888년 테네시에 있을 때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지었는데, 일본 총독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6년 징역 형도 받은 사람인데 후에 일본의 압제에 못 이겨 총독부의 귀족원의 원이 되었다고 해서 애국가를 바꿔야 하겠습니까? 춘원 이광수가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잠깐 친일파가 되었다고 해서 이광수 소설책을 다 불태워야 하겠습니까? 육당 최남선이 잠깐 친일파 노릇했다고 해서 “기미독립선언문”을 폐기처분 해야 되겠습니까?
요사이 전교조 선생들은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가르치고, 김현희가 KAL 858기를 폭파하여 죽인 사실을 김정일도 시인했는데 김현희도 가짜요, 군사독재가 꾸며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말장난을 하고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잘 만들어 냅니다. “공산주의혁명”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적화통일에 걸림돌이 미군이기 때문에 패권주의니 뭐니 해서 반미감정을 확산시키느라고 여러 달 동안 촛불시위도 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골고루 나눠 가지고 살자는 것인데 요사이 공공연히 “있는 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갖도록 한다”는 미명 하에 “경제개혁”이니 “재벌해체”니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북한처럼 거지의 나라가 되고 맙니다. 민총련, 한총련 등이 폭력 데모를 하면서 북한을 돕고 있습니다. “민족공조”니 “민족통일”이니 하는 것을 미군을 철수시키고 공산화 통일을 하자는 것인데 요사이 젊은이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설명하기를 386세대는 3.1절도 모르고 8.15도 모르고 6.25도 모르는 세대라고 했는데 적당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잘 믿든 못 믿든 이 나라에 5만 교회, 1200만 성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눈물과 땀으로 기도하면 결코 공산화되지 않고 축복받아 선교하는 나라가 될 줄 믿습니다. 나라를 위한 책임감을 가지고 기도하여 공산화를 막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파숫군입니다
조상호 목사
아마 이 자리에 ‘람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1983년에 상영되어 대박을 터트린 영화로서, 제 기억으로는 1편에 이어 2편과 3편이 나온 영화입니다.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인공으로 나와, 혼자서 M-60 기관총 하나 가지고 수많은 적군들과 용감하게 싸우기도 하고, 돌을 던져 헬기 유리창을 깨트려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떨어져 죽게 만들고, 피가 흐르는 팔을 바늘로 직접 꿰매기도 하는 등, 만화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람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된 후에 영웅하면 람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서, 한 때 시중에 ‘람보 같은 영웅’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람보 같은 인물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우리와 똑같은, 아니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보다 못한 모습을 보인 인물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애굽의 바로 왕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마누라까지 팔아먹은 한심한 남편이었습니다. 또 출애굽의 영웅 모세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데 쓰시겠다는 데도, 그는 계속해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잘 못 보셨습니다.’라고 하며 5번씩이나 거절했습니다. 사사 기드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사로 쓰시겠다는 데도, 그는 계속해서 주저했습니다. 분명히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며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 번씩이나 시험했던 겁쟁이였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에는 거인 골리앗 앞에 당당히 맞섰던 적이 있지만, 나이 들어서는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위해 블레셋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사람 행세를 했던 겁쟁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거장’이라고 후세에 불려지고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스겔도 사실은 ‘람보 같은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서 고향과 부모님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떠나 물설고 낯 설은 이방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환상 중에 하나남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2:3)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에스겔은 “예,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반응하는 대신, 주저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3장 1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두려워서 주저하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서 네 백성에게 전하라“고 재차 재촉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에스겔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3장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또 다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하나님께서는 주저하고 있는 에스겔을 설득하다시피하며 “가서 네 백성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7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에스겔에게 나타나셔서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17절)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민족의 파숫군’으로 세우시겠다고 합니다. 파숫군은 영어로 Watch-man, 오늘날의 보초병을 의미합니다. 보초병은 적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서서 적군이 침입해 오는 것을 살피는 일을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가지 않고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으로 끌려간 것이고, 자신들은 의롭고 정직하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심판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경고하기 위해서 에스겔을 "파숫군"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파숫군의 역할은 적군이 오는 것을 살피는 일 뿐 아니라, 여러가지 위험과 위협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에스겔에게 파숫군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할까요? 파숫군의 사명은 에스겔에게만 해당되는 사명일까요? 아닙니다. 파숫군의 사명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적인 파숫군
하나님은 오늘날 뉴질랜드를 위하여, 남태평양을 위하여, 우리가 두고 온 대한민국을 위하여, 우리들을 영적인 파수군으로 세우신 줄로 믿습니다. 신학교 나온 목회자만 파숫군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다 영적인 파숫군인 줄로 믿습니다. 목회자가 주로 의인을 깨우치는 파숫군이라고 한다면, 일반 평신도들은 주로 악인을 깨우치는 파숫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만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목회자는 불신자들보다 신자들을 더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일반 평신도들은 신자들을 만나기는 하지만, 목회자들보다 불신자들을 더 많이 만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켄터베리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켄터베리대학의 파숫군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번사이드 하이스쿨을 다니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번사이드하이스쿨의 파숫군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면 택시 안에서 파숫군이 되고,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고 있다면 사업장 안에서 파숫군이 되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직장 안에서 파숫군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학교를 다니든지, 직장을 다니든지, 사업을 하다보면 영적인 파숫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학교 친구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직장 상사의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거래처 사장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한 육군 신병이 2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추억에 남을 만큼 보람찬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고참인 한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병장님,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고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고참인 그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는 거야. 명령이 떨어지는 대로만 복종하면 돼. 그러니까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고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 신병은 “아, 간단하군요.”라고 대답하며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저는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라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치보다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우리 인생의 최고 계급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적인 파숫군이 되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대신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함으로 영적인 파숫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조목사가 한국에 선교대회 다녀오더니, 드디어 이단이 되었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17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대신해서 이루어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을 바라고 계시지만,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당신의 백성들을 대리인으로 세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임무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사신'이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영어로 ‘ambassador’ 다시 말하면 ‘대사’라는 말입니다. 대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보낸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열심히 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국에서 말하라고 하는 것을 충실하게 말합니다. 만일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기 생각대로 일을 하는 사람은 본국으로 소환되고 맙니다. 또한 대사는 자기의 실력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대통령의 권위를 가지고 대통령이 위임한 일들을 합니다.
제가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신정승씨가 뉴질랜드 한국대사라고 한다면, 신정승씨는 한국의 노무현대통령을 대신해서 이곳 뉴질랜드에서 한국정부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또 제인 샬롯 쿰브스(Jane Charlotte Coombs)라는 여성이 주한 뉴질랜드 대사라고 한다면 그녀는 뉴질랜드의 헬렌 클락 수상을 대신해서 한국에서 뉴질랜드 정부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대사입니다. 누구의 대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이 집사든지, 안수집사든지, 장로든지, 목사든지 직분과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만,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은 가지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영적인 파숫군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을 깨우치라
우리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함으로 영적인 파숫군이 될 수 있습니다. 파숫군의 임무는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안전하게 평안 가운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높은 망루에 서서 적들이 오는지를 잘 살피고 있다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즉시로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17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여기 ‘깨우친다’는 말은 NIV 영어성경에 ’give them warning'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경고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언자적인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파숫군은 백성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도록 외쳐야 합니다. 외치는 소리가 무시당해도 그래도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장 7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이 터지라고 외쳐도 변화가 없고 아무런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 말씀을 외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외치라고 요구하십니다.
다같이 11절을 보겠습니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야훼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일에는 분명히 손해와 이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특히 전도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전도는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전도의 ‘책임’과 ‘의무’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전도는 누구의 의무입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면 전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십니다. 아멘입니까? 만약 우리 주위에 자신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네가 하나님이니?“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책임질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옛날 최권능 목사님은 무대포로 전도하기로 유명한 분이셨습니다. 최목사님이 한 번은 버스를 타고 버스 안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데, 마침 채필근 목사님이 그 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최권능목사님은 채필근목사님이 앉아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앞에 가서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시오“고 소리쳤습니다. 최권능목사님이 채필근목사님으로부터 훈련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서로 얼굴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최권능목사님을 향하여 채필근목사님은 "최목사! 나야 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최권능목사님이 채필근목사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벙어리 교인이구만." 그 말을 들은 채필근 목사님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벙어리 교인은 아닙니까? 입이 있지만, 복음을 들었지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영적인 벙어리는 아닙니까? 몇 번 복음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복음을 듣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 소매상 협회(National Retail Goods Association)의 조사통계가 있습니다. 세일즈맨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고,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15%는 세 번 전화해 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88%의 세일즈맨이 한 통 내지 두 통 내지 세 통의 전화를 해보고 세일즈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12%는 끈질기게 전화를 해서 결국은 판매를 한다고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교회 전체의 전도실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는 그 12%에 드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으로 사람들에 도전하여 영적인 파숫군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며 사람들을 깨우치게 함으로 영적인 파숫군이 되라고 말씀하신 후에 18절부터 이상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비결
18절 이하를 보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비결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8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내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임무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이었습니다. 악한 길로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네가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알려주어 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전해주는 말을 듣지 않고 죽는다면 그는 자기 죄악의 결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에스겔이 악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파숫군의 임무를 소홀히 한 에스겔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의 말씀을 20절과 21절에서 또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과 19절 말씀을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이지만,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은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 피 값을 우리에게서 찾으시겠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 후반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州)의 한 법정에서 흥미진진한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부둣가를 거닐던 한 사람이 로프에 걸려 그만 깊은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헤엄을 칠 줄 모르던 사람인데다 갑자기 차가운 물이 닿는 바람에 다리에 쥐까지 나서 그는 물 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살려줘요!" 그는 잠시 동안 허우적대며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그만 물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그의 친구들이 달려 왔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그의 생명은 끊어진 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물에 빠진 사람으로부터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서 한 젊은이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분명히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줘요!"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영에도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도 일광욕을 즐기며 그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익사자의 가족은 그의 이러한 행동에 분개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이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 있다니요! 그것도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 그러나 결과는 익사자의 가족이 패소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법정의 판결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할까요? 하나님께서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기는 커녕,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래, 잘 했다’라고 하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사람에게 영적 책임을 물을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람에게 결코 죄 없다 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인까지도 그냥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포기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는 8월 첫째 주는 우리 교회 창립 13주년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주보 안에 들어있는 2006년도 태신자 작성카드를 가지고 가셔서 2주
동안 기도하시면서 생각나는, 아직까지 주님을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이나 주님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작정카드에 기록하신 후 6월 둘째 주까지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작정카드에 기록한 사람의 구원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전도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단지 우리의 책임은 전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음에도 본인이 돌이키지 않는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파숫군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나 열매가 아니라 오직 충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패역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포기치 않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파숫군의 직무를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