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0
9월24일[연중 2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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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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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TTrughcYRM
[서울대교구 김도훈 라파엘(제기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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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언제나 깊이 새기고 곱씹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 말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때로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정확한 진의를 파악하기가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랜 시대적 간극, 문화나 언어 습관의 차이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시선이 지극히 인간적이거나 편협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으로 마리아에 의해 잉태되시고 출산되신 한 인간 존재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인해 잉태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작은 고을 나자렛에 머물러, 혈육이나 지연에 묶여 평생을 지내셔야 할 분 절대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혈육이나 인연, 지연이나 학연을 초월하는 크신 분, 세상 만물, 인류 전체를 주관하고 구원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예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위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들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의 애매모호한 말씀의 진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서 들으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성모님을 향한 극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 무수한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주님 말씀을 충실히 듣고 묵상하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한 사람은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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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음미하고 되새김질해야할 예수님 말씀>
강의나 강론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설 때 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의 한계입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말에 뒤따르는 진정성, 실효성, 육화된 말, 삶에 녹아든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멋들어진 말이라 할지라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 부족합니다. 때로 많은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진정으로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인격,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어부 베드로와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세리 마태오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예수님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인간을 향해 펼치는 예수님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는 진실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해 던지는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심오한 의미로 충만했고, 동시에 힘과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말씀에 힘입어 사람들은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냥 흘려버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말이나 소가 곡물을 천천치 씹고 또 씹고 거기다 되새김질하듯이 천천히 음미해야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정녕 보물처럼 대하고 음미하고 또 음미할 때 그 말씀은 우리 내면 깊숙한 영혼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제 태도를 돌아봅니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건성건성 듣습니다. 많은 경우 형식적이고 의무적입니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진실한 마음, 성의 있는 태도,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하는 사람들은 삶이 통째로 바뀌는 은총, 삶이 크게 한 단계 성장하는 은총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표면적으로 꽤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말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김없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저것 보세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찾아왔는데도 나가서 인사도 않는군요.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인류 구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기본이 먼저 되어 있어야지요. 기본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정성껏, 진지하고 성의 있게 귀담아 들은 사람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인류 전체를 구원해야 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에게 극진한 효심을 표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안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나 이스라엘만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 새로운 왕으로 모신 우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들입니다. 피를 나눈 혈연도 중요하지만 영혼과 사랑을 나눈 영적 가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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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tX71s28f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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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스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스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스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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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는 1권의 책이지만, 73권의 책이기도 합니다. 구약이 46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성서의 제목 중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사무엘, 다니엘, 이사야와 같이 구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전한 사람들이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부분이 남자의 이름이지만 여자의 이름으로 된 책도 2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에스테르와 룻입니다. 에스테르는 페르시아 왕국의 왕비였습니다. 에스테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알았고, 하느님께 의탁한 에스테르는 용감하게 왕 앞으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이 죽어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룻은 보아즈를 만나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나라의 왕비였던 에스테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이방인 여인이었던 룻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지위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업적의 크고 작음도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혈연의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저의 사제 생활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경기도 적성 성당입니다. 그곳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미사 예물과 사무장 급여를 교구에서 지원받았습니다. 주방을 도와줄 식복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3년간 저와 함께 지내면서 청소, 세탁, 식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평일 미사에는 5명 정도 나왔고, 주일미사에도 50명 정도 나왔습니다. 군인이 오거나, 서울에서 손님이 오면 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태권도를 시작했고, 농산물 직거래도 했고, 비디오 대여도 했고, 차량 봉사 팀도 만들었습니다. 3년이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고, 부족한 능력이지만 교우들과 알콩달콩 사목의 기쁨을 알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사목 체험을 발표했고, 그 소식이 교구에 전해져서 다음 임지는 교구청이 있는 명동이 되었습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사목국에서의 업무는 적성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구역장 교육에 지구마다 700명이 넘게 왔습니다. 남성 구역 봉사자 교육에는 2,000명이 넘었습니다. 예산 규모도 달랐고, 만나는 사람도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적성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동에 있을 때도 하느님의 방법으로 저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따르기 위한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소외된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부지런한 것은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기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언제인가는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만드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이 나듯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손을 내미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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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8,19-21: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 그분의 가족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항상 강생하시는, 그래서 나에게 있어 그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들을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만든다. 예수께서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21절) 하신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셨다거나, 당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과 형제들을 최우선으로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더욱 들어 높이셨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신앙이 구세주를 낳아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과 같이 믿음을 갖고 산다면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해주는 마리아와 같이 된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의 형제도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성모님을 칭송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우리가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앙인들이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또 마리아를 닮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살 때 우리는 올바로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닮는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에서 당신의 가족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았다. 오늘과 같이 각박하고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진정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요구된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다시 한번 반성하며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도록 신앙을 점검하도록 하자. 즉 나의 삶이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언제나 주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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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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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이라면 말씀을 잘 듣고 들은 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19-21)
1)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곧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하느님 나라의 참 가족’이 되는 길을, 즉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말은 ‘실행’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하느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빈껍데기 신앙인으로 사는 죄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는 죄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자기는 충실한 신앙인으로 잘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2) ‘말씀’을 아예 듣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처음에 집을 떠날 때의 작은아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아버지가 그를 타일렀을 것이고, 식구들도 말렸을 텐데, 그는 마음껏 살고 싶다는 욕망에만 사로잡혀서 아버지의 말도, 식구들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은 채로 제자들 가운데에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유다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고, 끝내 멸망을 향해서 가버렸습니다. <복음을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아예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처럼 스스로 크게 깨닫고 뉘우치는 것 말고는......>
3) ‘말씀’을 듣고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사제와 레위인이 그 경우입니다. 그들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계명과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계명과 율법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기가 싫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가버린 것은 ‘큰 죄’입니다. 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라자로가 누워 있는 것을 못 본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외면했습니다. 그는 오며가며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습니다.
4) ‘말씀’을 듣고,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긴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인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인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이 말씀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좋은 일도 하지 않고, 목숨을 구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성경 해석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5) 어떤 경우든지 간에,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믿는다고 말만 하는 사람이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우리가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원하는 하느님 나라는 관광지가 아니라, 인생 전부를 걸고, 목숨을 다 바쳐서 간절하게 찾아가야 하는 생명의 집입니다. 아무리 성경과 교리를 잘 알아도 바로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루카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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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루카 복음 1장 45절 / 11장 28절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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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분을 찾아왔던 일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습니다. 다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들이 사람을 보내어 군중을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밖으로 불러내려 하였다는 내용이나(마르 3,31 참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 마르 3,33)라고 하신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예수님의 반문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의 가족들은 군중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그저 방해가 되는 존재, 또는 그분에게서 외면당한 이들로 여겨지는 오해를 벗고, 독자의 관심은 오롯이 예수님과 그분께 귀 기울이는 군중에게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서민들은 하루 품삯으로 온 식구가 끼니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빠듯하였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 사람들이 당신 곁에 모여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새 삶을 결심하는 그 자리가 매우 소중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미루어 둔 채 이들에게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과 ‘등불’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삶 안에서 열매로 맺어 내라는 가르침(루카 8,4-15.16-18 참조)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겉치레뿐인 예배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을 실현하고, 악인의 행실을 멀리하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삶입니다.(제1독서 참조)
막연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주 읽으며 삶의 방향을 잡고,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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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43년 전 일본 나가사키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이내 저는 광주 화정동 피정센타의 피정 지도자의 소임을 받고 활동하면서 ‘성직자, 수도자 부모님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성직자·수도자 어머님들의 모임(=현 광주대교구 농심회)이 결성되었는데, 제 어머니도 다른 교구 사제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에 참여하셨죠. 그런 계기로 다른 신부님들의 어머님들로부터 아들 신부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때론 함께 만나시던 사제의 어머니께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아들 신부의 환속 때문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제 어머니에겐 걱정 아닌 걱정이 생기셨고 그래서 늘 저를 위해서 사제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셨습니다. 저로 인해 부모님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세례를 받으셨지만, 참으로 열심한 신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시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존재는 바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더 심화시키면 성직자·수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분은 하느님이시겠지요. 수도자이며 사제인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수도자·성직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을 떠났다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부모와 가족을 되찾은 것이라 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신부나 수도자보다 더 효자가 없다, 하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 수도자나 사제에게는 영원히 부모와의 관계 이외의 어떤 가족이 없습니다. 형제도 자매도 결혼하면 다 자기 가족이 생기지만, 수도자에게는 참으로 남는 것은 부모님뿐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 때문에 부모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으며, 혈연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새롭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젊은 날의 저에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결국 복음의 내면을 깊이 숙고하지 않은 저의 체험 부족과 연륜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첫 장면, 곧 어머니와 형제들이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고”(8.19), 또 “밖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이 제겐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구도로 보자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가장 먼 밖에, 멀리 서 있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의 내용들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등불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고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과 주님의 말씀을 등불처럼 실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게 될 것입니다.”(8,15.18)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추어 볼 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참된 가족 관계는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루카 사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 범주에 포함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혈연적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위치해 놓고 상대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과 그 실행 여부가 바로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 구성원이 될 수 있는 조건임을 이런 영적 원근법을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복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과 형제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었고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인 예수님께 다가설 수 없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런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 한 사람, ‘그 어떤 이’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8,20) 하고 환기喚起시켜 드립니다. 어쩌면 그 ‘어떤 이’의 의도는 만나야 하는 가족을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예수님께 귀띔해 주었으리라 봅니다. 아마 우리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이런 상황을 알았다면 ‘그 사람’처럼 했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영적 관계를 여는 새로운 지평이며 이를 위한 포석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답변은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적이고 영적인 면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사실 성서학의 발전으로 성서의 중요한 영성의 본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이 따름의 요소는 떠남과 버림인데 이러한 추종 영성의 모범인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이미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택과 주님을 잉태한 순간부터 ‘주님의 여종’으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듣고 실천해 오신 분이셨으며, 그 순간뿐만 아니라 아드님 예수의 마지막 삶의 순간, 십자가 밑까지 동행하시면서 인간적이며 모성적인 측면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모질고 힘든 순간도 신앙으로 이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표현은 역설적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후에 이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 어머니와 같이 인간적인 관계와 인습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강한 의향을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단지 말씀을 들음으로만 듣지 않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신자信者란, 곧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말씀이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주님, 저에게도 저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셨고, 그분들과 저는 혈연으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였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가족이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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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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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 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결합과 통교가 중요합니다. 그리하면 이웃과의 관계도 새롭게 형성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또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히브 2,12-13)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 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 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 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 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 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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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가족>
루가 8,19-21 (예수님의 참가족)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참가족>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믿음의 참가족은 믿음입니다
희망의 참가족은 희망입니다
사랑의 참가족은 사랑입니다
진리의 참가족은 진리입니다
정의의 참가족은 정의입니다
자유의 참가족은 자유입니다
기쁨의 참가족은 기쁨입니다
온유의 참가족은 온유입니다
자비의 참가족은 자비입니다
함께의 참가족은 함께입니다
품음의 참가족은 품음입니다
돌봄의 참가족은 돌봄입니다
섬김의 참가족은 섬김입니다
베풂의 참가족은 베풂입니다
살림의 참가족은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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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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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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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걸었던 길을 아까워하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다산> 회개에 신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오므로 뉘우침에 이르지 않으니 길하다.”<주역> 늘 깨어 살 때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제목 “예수님의 참가족”이 맘에 들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혈연 가족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참가족의 이상이 참 원대합니다. 예수님의 품은 그대로 온 인류를 품에 안는 하느님의 품임을 봅니다. 인류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마음을 넓고 깊게 멀리 개방해야 함을 봅니다. 교회가 날로 예수님의 큰 품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자 누군가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즉각적인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화두입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 말씀인지요!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시공간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파를 초월하여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반듯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도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혈연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품, 하느님의 품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교회요 우리 마음이면 참 좋겠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참가족의 생생한 증거가 교회공동체요 이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미사한번만 함께 하면 국적, 인종과 상관없이 한가족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나 미사에 참여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 한가족임을 체험하지 않는지요! 도대체 미사전례가 아닌 그 무엇이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을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을는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사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듣고 실행하여 사는 이들은 그가 어디에 있던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를 사랑하여 듣고 공부하며 실행에 옮기는 삶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참 사람이 되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단 하나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것뿐이요, 부단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평생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전 삶을 요약하는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 한결같이 평생 하느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실행한 “예스맨(yes-man)”이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잠언의 현자가 말하는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손(in God’s hands)’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의 지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려는 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그러니 말씀에 맛들여 잘 듣고 실행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세상맛이, 돈맛이 아닌 하느님맛에 살게 하는 말씀맛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란,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라는 시편 말씀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제가 피정지도시 자주 드는 예에 웃습니다만 대부분 공감합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을 북돋우는 ‘말씀맛’만이 ‘돈맛’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119장은 “주님의 법”이라는 제하에 무려 176절에 이르는 제일 방대한 시편입니다. 흡사 ‘말씀 찬가’같은 시편입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이 더욱 말씀 사랑과 실행을 고무합니다.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당신 계명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가르침을, 길이길이 지키오리다.”
말씀이 사람이 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때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온전하고 충만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자 영이요 주님의 현존입니다. 다음 히브리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우리의 주님 향한 갈망은 시종일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고 주님을 닮아 참내가 될 때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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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ㄴ)
<아빠, 아버지!>
오늘 복음(루카8,19-21)은 '예수님의 참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옵니다. 군중 때문에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없게 되자,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루카 8,20) 하고 알려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하느님을 믿는 이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이들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가 이를 확인시켜 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십계명의 제4계명', 곧 인간 사랑의 으뜸 계명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육신의 부모가 있는 혈연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영적 관계 속에 있습니다. 때문에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잘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가족관계(참 가족)에 대한 말씀이며, 영적 관계가 핏줄로 맺어진 혈연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하느님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웃 사랑과 부모 사랑(효도)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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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예전보다
더 나은
우리 자신이길
기도합니다.
누구
없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단호한
질서를 만나며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되잡습니다.
하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빠진
세상적인
인정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올바른
형제의 관계란
기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인정할 때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소중한 관계는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보는
관계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어머니요
형제들을
귀하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계도
머무를 수 없는
관계들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떠나고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 어떤 것도
부여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
기쁘게
맡기고 기쁘게
성장하는
우리 자신의 삶이
있을뿐입니다.
말씀은
성장이며
말씀은
존중이며
질서입니다.
혈육의 정에
연연하기 보다는
하느님께로
더 다가서는
맑은 가을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말씀 안에서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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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 21)
익어가고 영글어 가는 가을 소리를 가을 풍경과 함께 듣습니다. 먼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지를 묻게 됩니다. 먼저 듣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마음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말씀에 집중할수록 삶은 달라집니다.
말씀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여정이 신앙의 참된 여정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생활 신앙이 참으로 중요한 신앙입니다.
생활 신앙은 먼저 말씀을 듣기에 새로워질 수 있는 이들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우리가 제대로 듣는 변화입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시작은 이와 같이 경청입니다.
사람의 성장은 경청의 성장입니다. 먼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변화는 말씀이며 실행은 경청입니다.
기도도 소통도 관계 맺음도 모두가 제대로 듣는 경청임을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오늘을 말씀을 듣는 마음과 함께 시작합니다. 익어간다는 것은 말씀을 듣는 마음이 익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아름다울 수있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자아에 갇혀 있기에 우리 모두를힘들게 합니다. 이기적인 자아를 치유하는 그 시작은 먼저 말씀을 듣는 실행임을 기억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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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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