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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천녀리혼(倩女離魂)
- 천녀의 혼이 나가다
내일을 염려하고 있으면 현재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육체와 정신과의 관계는 장작과 장작불의 관계
허구인 초월세계 꿈꾸며 지금의 삶 낭비 말아야
오조(五祖) 화상이 스님에게 물었다.
“천녀(倩女)가 자신의 혼과 분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무문관(無門關) 35칙 / 천녀리혼(倩女離魂)
*倩(아름다울 천, 예쁠 천)
연료가 없다면 불도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싯다르타가 말한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겁니다. 장작이 다 소진되면, 장작불도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육체가 소진되면, 우리의 정신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1.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삶 피폐케 해
보험회사가 지금처럼 유행했던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정부마저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언제든지 암에 걸릴 수 있으니 미리 치료비를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것 아니냐고, 혹은 자식들이 봉양하기 어려운 경제 현실에 맞추어 외로운 노년을 품위 있게 보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심지어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식들의 경제적 부담을 미리 덜어주기 위하여 장례비용을 미리 마련해주는 것이 자식들에 대한 마지막 애정이 아니냐고, 온갖 이유를 들어 보험회사는 우리의 미래에 장밋빛이 아니라 잿빛 색깔을 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쓴다고 해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공포감을 주입하여 사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험회사 등에 돈을 갈취 당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건강에 좋은 의식주를 확보하고, 그 돈으로 가족들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닐까요. 이럴 때 나이가 들어서 우리는 더 건강할 것이고, 남은 가족들에게서 보살핌을 받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대비하는 것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깨달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미래를 생각하니까요. 그렇지만 미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내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면, 우리는 오늘을 제대로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공포 때문에 지금 앞에 있는 맛있는 음식도 먹는 둥 마는 둥 할 것이고, 지금 앞에서 고민을 토로하는 아이의 목소리도 듣는 둥 마는 둥 할 테니까요. 오늘 이렇게 내일을 생각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어떻게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렇게 내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람에게 걱정하던 내일이 와도 막상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내일이 왔을 때 그 날은 또 새로운 오늘이 될 것이고, 그렇게 새롭게 시작된 오늘에도 그 사람은 여전히 다시 또 다른 내일을 염려하고 두려워할 테니까 말입니다.
집착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삶을 주인으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집착만큼 우리 삶에 치명적인 집착이 또 있을까요. 미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우 사정은 좀 낫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비록 집착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염려나 공포가 모두 자기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그렇게도 걱정했던 내일의 일에 막상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내세, 즉 사후 세계를 통해 미래의 공포를 조장하는 초월종교의 협박과 사기만큼은 극복하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죽어봐야 사후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초월종교는 보험회사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험회사가 약속한 것처럼 보장을 해주는지는 살아있을 때 확인 가능하지만, 초월종교의 약속은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거의 완전 범죄라고 할 수 있지요.
2. 사후 협박이 보험사기보다 악질
보험회사는 미래에 펼쳐질 불의의 사고나 노후의 삶이 현재의 삶보다 더 중요하다고, 마찬가지로 초월종교는 현재의 삶보다는 죽은 다음에 가야하는 사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합니다. 현재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보험회사와 초월종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때 불교도 초월종교의 유혹을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전라남도 구례에 있는 화엄사(華嚴寺)나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는 명부전(冥府殿)이라는 전각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시왕탱(十王幀)이라는 탱화(幀畵)가 찾아오는 사람들을 아직도 주눅 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의 심판을 관장하는 열 명의 군주들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 유명한 염라대왕(閻羅大王)도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지요. 날씨라도 흐리거나 아니면 해가 지면 그 아우라는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물론 도교(道敎)에서 유래한 민속신앙 탓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사찰에 사후세계와 심판을 긍정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anātman)’, 즉 “불변하는 자아란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초월종교 브라만교가 사후세계로 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브라만교는 아트만(atman)이란 우리의 자아는 현세나 내세에나 똑같이 불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브라만교도들은 짧은 현세의 삶보다는 사후세계에 더 집착하게 되었지요. 그들에게 현세의 삶은 단지 사후세계, 나아가 다시 태어날 윤회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사후세계니 윤회니 하는 모든 초월종교의 논의들은 불변하는 자아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뒤의 자아가 현실 세계의 자아와 다르다면, 어떻게 초월적인 신이 우리 인간을 심판하거나 평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에서 이야기하는 아트만 같은 불변하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겁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이 옳다면 브라만교나 기독교는 토대에서부터 균열이 생겨 무너지게 됩니다. 하물며 명부전에서 묘사한 7개의 지옥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은 사후에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혹은 정신과 육체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중아함경(中阿含經, Madhyamāgama)’에 실려 있는 ‘다제경(帝經)’을 보면, 싯다르타는 장작불의 비유로 우리의 의문에 답을 줍니다. “불이란 그 연료에 따라서 이름 지어진다. 불이 장작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장작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나무 조각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모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섶에 의해서 타게 되면 그 때는 섶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쇠똥으로 인해서 타게 되면 쇠똥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왕겨로 인해서 타게 되면 왕겨불이라고 불린다. 불이 쓰레기로 인해서 타게 되면 쓰레기불이라고 불린다.” 연료가 없다면 불도 존재할 수 없을 겁니다. 싯다르타가 말한 연기(緣起, pratityasamutpada)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겁니다. 장작이 다 소진되면, 장작불도 없어집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육체가 소진되면, 우리의 정신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3. 연료 의존하지 않는 불이란 없다
‘무문관(無門關)’의 서른다섯 번째 관문에서 오조(五祖) 화상은 어느 스님에게 몸과 마음, 혹은 육체와 정신과 관련된 심각한 화두를 하나 던집니다. 참고로 여기 등장하는 오조 화상은 육조 혜능의 스승인 오조 홍인(弘忍, 601~674)이 아닙니다. 홍인이 활동했던 황매산(黃梅山)에서 제자를 가르쳤던 법연(法然, ?~1104)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조 홍인이 활동한 뒤 황매산은 그를 기려 오조산(五祖山)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고, 법연은 관례대로 오조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오조 화상은 당(唐)나라 때 진현우(陳玄祐)가 지었다고 하는 괴담소설 ‘이혼기(離魂記)’의 내용을 언급합니다. 이 소설은 왕주(王宙)와 천녀(倩女)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둘 사이가 맺어질 수 없자, 천녀의 혼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 나와 왕주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살게 됩니다. 물론 그녀의 몸은 자신의 집에 앓아누워 있었지요. 우여곡절 끝에 왕주를 다시 만나게 된 천녀의 가족들과 왕주는 자초지종을 알고 경악하게 됩니다. 왕주가 천녀, 정확히 천녀의 혼을 데리고 그녀의 집에 들어오자, 그녀의 혼은 집에 있던 몸과 결합하게 됩니다. 해피엔딩인 셈이지요.
바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제로 지금 오조 화상은 난해한 질문을 제자에게 던지고 있는 겁니다. “천녀(倩女)가 자신의 혼과 분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다시 말해 왕주와 함께 있던 천녀의 혼, 그리고 집에 앓아누워 있던 천녀의 몸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고민이 많이 되시나요. ‘천녀의 혼이 진짜일까? 천녀의 몸이 진짜일까? 둘 다 진짜일까? 아니면 둘 다 가짜일까?’ 이런 의문에 빠졌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오조 화상의 희롱에 걸려 들어버린 겁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뭐 중요합니까?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처럼 불교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모닥불에 관한 싯다르타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세요. 장작불이 있습니다. 장작을 떠나서는 불이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장작을 떠난 불 자체, 즉 어느 연료에도 의존하지 않는 불 자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겁니다.
오조 화상이 살았던 시대에도 지금처럼 살기가 팍팍했나 봅니다. 사람들이 자꾸 불변하는 정신, 즉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살기가 힘들면 초월적인 세계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디서나 확인되는 현상이지요. 아마 오조 화상의 제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도 불변하는 영혼을 꿈꾸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제자만 그럴까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오조 화상은 허구적인 초월세계를 꿈꾸느라 현실의 삶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옥이나 천당이 내일이나 노후의 세계로 바뀌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느 경우든 현재를 주인으로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천녀(倩女)가 자신의 혼과 분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요?” “스님! 농담도 잘 하시네요. 그 소설이나 빌려주세요. 요새 밤에 너무 더워 잠이 안 오네요.” 이렇게 대답한다면, 오조 스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되돌려줄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