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요갱 얘기는 이미 여러 차례 소개한 적이 있지만, 워낙 유명했던 인물이라 한 번 더 올린다.
조선 최고의 기녀라면 다들 조선 중기의 시인기녀 황진이를 꼽겠지만, 황진이는 실록에 한 번도 오르
지 않은 데 비해 조선 초기의 초요갱은 16차례나 이름이 올라 있다. 왕족을 비롯한 뭇 사내들이 죽음
을 각오하고 초요갱을 품은 걸로 미루어보아 그녀의 매력이 남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요갱(超腰
鏗)이라는 기명만 보더라도 ‘허리(腰=허리 요)가 회초리(超=회초리 초)처럼 가늘고 거문고(鏗=거문고
갱)를 잘 타는 여인’이라는 뜻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초요갱은 실제 세종 때 궁중악사 박연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운 수제자이기도 하다. 어떤 글에는 초요갱이란 기명이 ‘허리가 가는 초나라 미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楚나라와 超요갱은 한자가 다르다.
초요갱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단종 3년(1455) 2월 27일이다. 14세의 조카를 보위에 두고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농단하던 수양대군이 ‘화의군 이영이 평원대군 이임의 기첩 초요갱과
간통했으니 유배에 처하옵소서.’ 하는 상소를 올렸다. 화의군 이영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
어난 왕자였고 평원대군 이임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7남이었으니, 두 사람은 배다른
형제였다. 단종은 수양대군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화의군 이영은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했고, 초요
갱에게는 장 80대의 중벌을 가했다. 왕자가 하룻밤 통정으로 유배를 떠나도 좋은 기녀, 초요갱은 그
럴 가치가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이후 초요갱은 예장도감(왕실의 장례를 담당하는 관서) 판사(정3품) 신자형의 안방을 꿰차고 들어앉
았다. 신자형은 세종 말년에 좌의정을 지낸 신개의 3남으로 조선 초기의 명문가 문신이었다. 그런 명
문가의 당상관이 초요갱과 배가 맞아 본부인을 쫓아내고 기녀에게 안방을 내주었으니 문제가 된 것
이다. 게다가 신자형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초요갱의 고자질을 받고 두 여종을 때려죽이기
까지 했다. 수양 3년(1457) 6월 26일, 사헌부에서 이러한 죄목으로 신자형을 유배형에 처해달라는 상
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수양은 신자형이 단종 폐위에 앞장선 공신이란 이유로 판사직에서 파직하는
선에서 사건을 매듭지었다.
같은 해 10월 7일, 초요갱과 관련하여 더욱 기막힌 상소가 올라왔다. 신자형의 먼 친척 조카뻘인 안계
담이란 자가 초요갱을 취하기 위해 신자형의 안방에 난입했다는 것이다. 신자형의 부인은 혼비백산
하여 도망치다가 마루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고, 안계담은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초요갱이 없자 눈에
띄는 대로 신자형의 노비들을 두드려팼다. 수양은 진노하여 안계담에게 장 100대를 친 뒤 제주도에
부처(付處)하라 명했다.
수양대군도 초요갱의 미모에 홀렸을까? 그녀를 둘러싼 숱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재위 9년(1463) 5월,
수양은 초요갱의 거문고 솜씨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악적(樂籍)에 올려 대궐로 불러들였다. 윤
7월 4일, 수양은 원로대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당시 ‘한양
의 4대 기녀’로 손꼽히는 양대‧옥부향‧자동선‧초요갱이 모두 불려와 춤과 노래로 원로대신들을 즐겁
게 했다. 아무 사건도 없었는데 ‘한양의 4대 기녀’ 운운하여 기녀들의 실명을 실록에 올린 것으로 보
아 사관도 그 중 누군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듯.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아우인 계양군 이증이 초요갱과 사통하다 발각
되었다. 민망하게도 친형제가 거시기동서가 된 것이다. 수양이 이증을 불러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증
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딱 잡아뗐다. 질책만 당하고 무사히 대궐을 물러나온 이증은 그길로 초
요갱의 집으로 찾아가 밤새 질탕한 방사를 벌였다. 며칠 뒤 변대해라는 선비가 초요갱의 집에서 나오
다가 이증의 종에게 걸려 뭇매 끝에 죽기도 했다. 그러나 수양은 이증이 왕족이라는 이유로 종에게만
곤장을 치고 이증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이증은 이듬해 8월 16일, 한낮에 초요갱과 방사를 벌이다
복상사하는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
초요갱의 이름은 예종 원년(1469) 2월 8일 자 실록에도 등장한다. 예종은 아버지 수양대군의 총애를
받던 병조판서 남이를 시기해오다가 즉위하자마자 여러 죄를 조작하여 남이를 극형에 처했는데, 이
때 남이의 기첩 탁문아를 한양에서 추방하면서 초요갱도 함께 추방했다는 기록이다. ‘난신의 첩 초요
갱도 함께 추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도 초요갱이 남이와 가까이 지내던 어느 장수의 첩으로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불과 5개월 후, 초요갱의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한다. 예종 원년 7월 17일, 사헌부에 ‘평
안도 도사 임맹지가 평양부 관기 초요갱과 통정을 했다’는 고소가 올라온 것이다. 한양에서 추방된
지 5개월 만에 초요갱이 평양부 관기로 자리잡았다는 얘기다. 관기는 원래 관리들이 언제나 품을 수
있지만, 그 일이 죄가 된 것은 그때가 수양대군이 죽은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은 국상기간이었기 때문
이다. 임맹지는 파직되어 귀양을 갔지만 초요갱에 대한 처벌 기록은 없다. 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
얘기는 실록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수많은 관리와 선비들은 물론 왕자들조차 그녀를 한 번 안아보고 나면 부나비처럼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던 초요갱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실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초요갱이
조선 제일의 美妓였다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전혀 자신이 없다. 실록에 16번이나 올랐다는 것은 그만
큼 사건에 자주 연루되었다는 뜻일 뿐 그녀의 미모와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기 때문이다. 실록의 기록
이다 보니 초요갱의 미모나 몸매에 대해서는 당연히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고, 개인 문집이 드물
던 조선 초기의 여인이라 어떤 글에도 문집의 기록은 인용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황진이의 재색과
자질에 대해서는 여러 문집에 기록이 넘쳐난다. 정 성에 차지 않는 사람은 소설 「초요갱」(작가 박
지영)을 통해 상상만족이라도 하시길.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근로.자녀장려금등을 전달하느라 수고가 많았다며 일선 세무서에 피자를 돌리는 이벤트까지 벌인 대통령, 탈원전 여파로 1조원이 넘는 적자를 내고도 성과급을 받은 한전, 이 한겨울 야탑근처 멀쩡한 보도블록 공사를 하느라 출퇴근 시간대 까지 교통 통제를 하는등 국민세금 쓰기 경연대회 인것 같습니다.세금 낭비를 줄이고 아껴야 상을 받는게 아니라 세금을 최대한 많이 써야 칭찬을 받는 나라가 우리나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