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 나의 아우에게 통행증(?) 인가를 주시면서..화물차를 가지고 개성을 다녀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죠".. 화물을 싫은 차는..철조망으로 겹겹이 두른 북한쪽 경비 초소 앞을 통과하여
꿈속에서 "우중충한"..거리를 지나다가 잠을 깼습니다.
"무슨 꿈 이래 ?".. 잠을 깬 후에 마누라에게 말을 했습니다.
"하도..산소에 다녀가질 않으니까..아버지가 야단 치신거지"...
(마누란..꼭~..요따우로 말 하더라...)
하긴..다녀오지..다녀오지...하면서.. 날짜를 "구구셈판"만 놓을줄 알았지
정작은 올해들어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아무때나 가쟈"...(급한 마음에 무조건(?) 가보기로 합니다.)
"17일날..애가..개교 기념일 이라서..학교를 안간대요 어머니도 평일이라 가실수 있을테고"...
"어머니..! 17일날..아버지 산소에 갑씨다".. 마누라 말을 듣자마자..어머니 방을 향해
소리를 칩니다. 어머니는 방문을 "삐끔"..여시더니 "반색"을 하십니다.
그리곤..아에.. 앉은 자리를 털고..거실로 나오십니다.
"그래..일찍 다녀올걸 그랬다"... (흐미~.. 반응을 보니..정작은 내가.."나쁜놈" 이었군요...)
우리집 성묘 모습은 .. 가족 나들이 풍경이 연출 됩니다.
사는곳은 부평 이지만..아버지 산소는 집과는 멀리 떨어진.. "송추"에 있습니다.
한번 다녀 오려면..오가는 길과 시간이..경우에 따라서는 (명절) 하루를 "꼴깍" 잡아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명절 전에 다녀 오거나..하루 이틀을 늦춰서 다녀 옵니다.
지금은 스물이 넘은 딸아이나 조카 아이가..어려서 철이 없을때 ..아이들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유택으로 마련된 산소는..인천에서 의정부로 진입하는 마지막고개..
"울대고개" 꼭대기 왼쪽에 있는 "운경공원" 묘지에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산 하나가..앞뒤 양편으로..온통이 산소로 되어 있는곳 입니다.
어린..아이들 로써는..온통사방이..죽은 사람 투성(?)이 인데.. 기억도 희미한..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이.. 반가울리 없을것 입니다.
그래도..반가워 하도록..소주병이 작전(?)을 짰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20 여년전 부터..)
"할아버지 산소에 가자"...
"앗싸 야로"... ( 사내인..조카 아이는 뛸듯이 기뻐 합니다. 이것은 나의 딸애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이..철없이 어린 아이를..산소 가는데 즐겁게 했나요...?
사정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산소를 가는 길..39번 국도..주변은 맛나 보이는 음식을 파는 음식점도 많고..
자연에 풍광이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에 눈길을 사로 잡을 곳이 많습니다.
특히..장흥 유원지에는..놀이기구 시설까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적절히 이용(?) 하는것 입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 올때마다..유윈지에 가설랑..아빠 엄마랑.."뺑뺑이"도 ..타고..
레스토랑에 가서.. 모처럼.."칼질" (?)도 ..하고 옵니다.
이러니..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날은.. 아이들 에게는 나들이 가는 날이요..소풍가는 날 입니다.
오랫만에 가게되는 산소는 어른들 이라고 다를것 없습니다.
오가는 여정에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것 만 바라 보아도 좋은 일 인데..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는 반드시..국도변에 산재한..맛갈스러운 음식점을 찾아가서..
오랫만에 별식을 함께 즐기고 돌아 옵니다. (이날은..소주병..지출이 많은 날 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애나..어른이나..산소에 성묘를 가는 계획이 잡히면..모두..그날을
즐거운 야유회를 기다리는 기분으로 맞게 합니다.
* 소주병에 어버이 날..지난 글에서 밝혔던 사돈어른 병세가 위중 하여서..
오늘..(2007.5.19 음 4.3).. 노구 (老軀)를 버리시고 영혼의 안식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차마 ,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셨겠지만..
이승과 저승 사이에 길은..어느 누구도.. 의지로 가를수는 없는가 봅니다.
또 며칠..소주병도 삶과 죽음 사이에서..영혼의 방황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온후에..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렇게..우리 집안에 산소가는 날은.. 아이들 에게는 놀이를 가는 날이요..
어른들 에게는 모처럼의.. 야외로 나가서 별식을 먹는 날 입니다.
모두들..즐거운 날 이지요..
그러나 행사에 주장인인 소주병은 내심..걱정이 되는 것이 있으니..그것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도 지금까지와 같은 행사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겠냐..는것 입니다.
어렵겠지요..이미, 아이들이 크면서..큰아버지와 아빠의 "산소가는날 작전"은..
그날에 행사를 하는 의미가 아이들에게 "간파"를 당했습니다.
아이들이 "훌쩍" 커버린 요지움에는..습관이 변하여.. 산소에 다녀 오는것을..의무로 알고
다녀 옵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저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에는 선산이 있어서 별도에 관리도 되고 있어서..시제에 가노라면
일가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조상님께 제를 올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오랬만에
일가의 만남에 회포를 풀었노라..
세상이 한참을 어지럽다가 이르게된 오늘날은..찾아보기 어려운 모습 입니다.
축하하고 경사받을 일에 초청을 받으면..인사치례 하는 정도의 시간을 함께하고
돌아오는 소주병..그러나,초상을 당한 초청에는 별탈 없는한 장지까지 함께 다녀 옵니다.
각자의 집안과 종교적 특성에 따른 장례제례를 눈여겨 보아두고..마지막 가시는 분에
음택을 어떻게 마련하여 모시는지..여간 궁금한것이 아닙니다.
살림이 가난하여 화려하게 격식을 차리지 못 하였다고 나무라지도 않고..
생활이 풍족해서 오만가지 없는 격식까지 동원하여 "치사"를 하였다고 부러워 하는것도 아닙니다. 다만..천태가 만상인 사람에 생활에서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 하는지가..궁금할 뿐 입니다.
아버지 산소는 공원묘지로써 5평 남짓 됩니다.
20년전..산소에 석축,석띠,장구 준비까지..당시로써 500만원 가량 들었으니..
산소를 쓸만한 나머지 자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리 사둘수 있는자리..)
비용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가족 묘지로 쓸만한 자리를 마련할수 없었고..어머니 한분을 더,합장할수 있다는
조건으로 산소를 마련 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요즘처럼 묘지난이 심한때 에는..비록 가족들이 시간차를 달리하여 유명을 달리하게 되더라도 앞서가신 분들에 곁에 묻히기가 어려운 일 입니다.
(온 산을 빈틈 없이 산소가 "다닥 다닥" 붙어 있거든요..)
아버지에 고향에 있는 선산같이 되기는 어렵겠고..세대를 바꿔가며 산소는 자연히
여기저기 산재되고..요즘처럼 후손을 적게 낳아서 키우는 세태 에서는 조만간에
절손과 대물림 정신의 퇴색으로 대부분에 산소가.."무연고" 묘지로 남게 될것 같습니다.
위에 거론된것이 나의 진정한 걱정사 입니다.
비단,위에 걱정은 나만에 것이 아닐것 입니다.
생전에 아버지도 위와 비슷한 걱정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일가가 한자리에 모일수 있는 기회가 줄다보면..나중에는 앞뒤차가
부딪쳐서 잘 잘못을 가리다가..일가친척을 만나게도 되겠다"..
따라서..아버지 께서는 생전에 가족들이 사후에 같은 공간에서 영면할수 있는 곳을
당신에 손으로 마련하시는 것이 꿈 이셨습니다. (가족묘원..)
낳아서 키우는 자손의 수가 줄어서..앞으로는 격식을 차리는 집안이라 하여도..
돌아가신 어른의 산소가 묘지난 으로..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다면..명절과 기일을 전후하여..조상님 산소를 찾느라고 매우..바쁘겠다..
매장문화가 화장문화로 바뀌기 시작 하면서..소주병에 이런 고민이.. 해결에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매장을 하려면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지만 ,화장을 하여서 유골을 안치 하는
것은..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이 방법 이군"...
초상이 난곳을 조문하며 장지까지 따라서 다니다 보니.. 이렇게,좋은 사례가 발견 되었습니다.
서구의 평장 문화와 다르게 우리의 매장풍습은 산소마다 봉분을 틉니다.
우리의 장묘와 장사에 관한 법률에서 조차, 평장을 한 묘지는.. 관습법과 법률로써 보호를 받을수 없습니다. 화장의 경우는 구체적 사례가 법률로써 보호되지 않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유골을 담아서 집단적으로 한곳에 안치한 시설만이 법률로 보호될뿐, 개별로 유치한
시설에는 법적인 보호조치가 없습니다. 산소는 단, 한기라도..관습법및 장사에 관한 법률의
적용이 가능한것이 현실임에 비추어..두가지를 모두 만족하는 방법이 최근에 개발되기 시작 했습니다. 기존의 산소의 봉분 형태를 그대로 두고..산소에 시면으로 석띄를 두르고
그,석띠의 안쪽에다 유골함을 안치할수 있는 석실을 만드는것 입니다.
이렇게 하면..기존의 한기에 산소에는 두분을 합장하고 나머지 석실에는 조성방법에 따라서는
총, 18기의 유골을 모실수가 있습니다.
산소는 봉분의 형태를 갖추었으니..현행법상,관습법과 장사에 관한 법률에도 보호가 가능한것
입니다.
"그래..이 방법이야..! "
이번에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며 .. 산소가 온산에 그득한 탓인지.."묻힐 자리가 부족하다고
난리더라".. 교회에 교우들이 돌아가실때 마다 장지까지 다녀오신 어머니가 말씀 하심니다.
"어머닌 걱정 마시고..잘~만 (?) 돌아 가세요.. 아들이 ..아버지 옆에 고이 모셔드릴께요"..
"그래..그래..나는 하나도 걱정이 없다"..당신이 묻히실 ..아버지 옆을 돌아다 보시며..
산소 봉분에 난..잡풀을 뽑고 계십니다.
"나중에는 요..여기..여기에..석띄를 두루고 유골함을 만들어설랑..나나..에미나..
아우네 내외까지..화장을 해다가 하나씩(?) 죽는 순서대로..아버지 어머니 옆에 묻힐테니까"...
손짓을 해가며..아버지 산소에 봉분 옆에 석실을 만드는 모양을 그려 보입니다.
"그게 좋겠다"..어머니는 반색을 하십니다.
"그럼요..아버지 비석도 새로 만들어서..."주가(酒家) 가족묘".. 이렇게 세워 놓고..
개별의 유골함 입구에는 석문을 만들어서 그 문 에다가 안치된 유골에 인적 사항을
새겨서 막게되면..모르긴 몰라도..아이들 대에까지 쓸수가 있을테니..어머닌 돌아가시더라도
한번도 못본 증손자..고손자 들이..세월이 한참을 지난후에 찾아와 인사를 하게 될것 이예요"..
"설마하니..제 아비가 안치된 산소에 와설랑..오늘..우리가 하는것 처럼..간단하지만 제물과
헌화도 바치고..잡초를 뽑지 않겠어요..? "
...
(누이좋고 매부좋고..도랑치고 가재잡고..떡 본김에 제사하고..내친김에 서울가고..)
통털어서 하나뿐인 딸 아이를 둔..소주병 내외.. 통틀어서 하나뿐인 아들을 둔 소주병 동생
양주병 내외..죽더라도 아버지 어머니 곁에 묻힌다면.. 제사를 떠 받들 아들이 없더라도..
일년에 한번..아니..십년에 한번 이라도 제 애비와 에미 산소에 한번 다녀 가더라도..
설마니..빈손으로야 오겠어요..? 꽃이라도 한다발 가져 오던지..술 이라도 한병 꿰차고 오겠지.. 이렇게 다분히(?) 계획적으로 직접 제례의 대상이 안되는 집안에 먼저간 조상님의
배려로(?).. 기존에 산소 한기로써..집안이 함께 쓸수있는 "가족묘원"을 조성 하게되면..
꿈을 이루지 못 하시고 가신..나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후대에 이르는 꿈의 현실화를
만들게 될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소주병의 꿈이..?
많은 분들이 소주병의 블로그에 오셔서 글을 읽고 가십니다.
이중에는 여론을 조성하고 정책을 펼수 있는분이 계실것 이라고 믿고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소주병의 생각은..아직은 법적인 보호장치가 만들어 지지않은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대로..기존의 산소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개인이 조성을 하여도 무방 하다는
관련 법에 조항이 첨삭 된다면..앞으로 묘지난은 적어도 3대..100년간은 문제가 되지 않을뿐만
아니라..점차 증가되고 있는 화장문화로 인한, 납골당 부족 사태도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족이 한테..모임으로써..서로 헤어져서 자주 만나지 못하였던 일가도..일년에 한차레 만이라도 산소에서라도 만날수가 있을것이고.. 가정의 화목이 .."국태민안"을 이루는 근간 이라고
본다면..사회가 지금보다 따듯해지고..태평해 지지 않겠습니까..?
그날을 기다리며..
소주병에 바쁘다는 핑게로 미루다..미루다..다녀온..
"성묘 나들이" .. 글을 마침니다.
진부하게 길어진 글을 읽으시느라.."고생 하셨습니다"
*5월 21일 (음 4.5일) 사돈 어른에 장지까지 장모님을 모시고 소주병 내외..다녀 왔습니다.
인하대 병원 영안실 지하 2층 15호로 모셔진 영정 앞에서 늘어선 근 조화 50 여개는..
일층 입구까지 늘어서 있어서..돌아가신 분에 후덕을 알아보게 합니다.
평소에 남에게는 후덕하고 가족에게는 엄격 하셨던 사돈어른..(유골가인..무골타인 )
주),좋은상조 인천 지점장 지건홍님 께서 제례 전반에 걸쳐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운구는 고인께서 회원으로 가입하신 국제 라이온스 협회 354-F 지구 ..남경 라이온스 클럽
김승태 회장님과 그 회원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운구 선도차는 고인에 사위인 "박"氏..의 소유인 (현대 자동차 판매점 남구(?) 영업소장)
에쿠스 리무진이 앞서서 가고..그 뒤로는 운구차인 캐딜락 리무진이 따랐습니다.
45인승 문상객을 태운 리무진 버스가 뒤 따랐고..장지까지 따라나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12인승 봉고가 추가로 한대 더 붙었습니다.
차가.."부평 승화원" (화장장) 으로 향 합니다.
"???"... (이 사람이.. 아직껏..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택도 마련치 못 했단 말인가 ? )
여타에 남들처럼..화장을 하여서..벌집처럼 생겨먹은 집단 유골 안치소에...
팽겨치듯..조상님을 버리고(?) 오는줄 알았습니다.
장지는 여주군..(?)..칠리... 뒷산 너머에는 남한강이 있다하고.. 앞산 야트막한 산자락 끝..
양지가 바른곳에..150평은 넘어보이는 산소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아아..!" 소주병이 그 토록 바라던..산소의 모습이...이곳에 일찌감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제례 중간에 동서에게 물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훌륭한 산소를 조성 했나"...?
"아버지가..만들어 놓으셨지요".."저희 내외 까지 쓸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살펴보니..봉분을 주위로..총..12기의 유골을 안치할수 있는 석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아..자네 선친은 대단히..영명하신 분 일쎄"...
고인을 떠나 보내는 가족은 "울고불고"..애통해 하셨지만...
다녀온 소주병은...부럼반 두렴반..으로 한동안 마음을 다잡지 못했습니다.
동서는 국내에 남아서 고인께서 하시던 사업을 돌보기로 하고..처제는 아직도 학기중인
조카 아이들을 등교도 시켜야 하고..그곳에 벌려놓은 사업도 돌봐야 하고..
삼오제를 끝낸 26일 토요일..호주로 출국한다고 했었는데.. 딴때 같았으면 제..큰언니에게
"다녀오마" 전화를 했을텐데..전화가 없는것을 보니.."경황"이 없었던가 봅니다.
그래..경황이 없겠지..."형부도 아버지 돌아가시고..3년은 경황이 없더라"...
동서에게 한마디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경험한 대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조만간 자네 꿈에 나타나실 것 이네...자네를 제일 믿음직 스러워 하셨으니...
그때..아버지께..자네가 하고픈 말씀을 모두 드리게나" ...(나는..다 하질..못했거든...)
경황중에 나의 말을 얼마나 새겨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이친구..이럴것 입니다.
"형님..! 왜 ?..힘 주어 말씀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지께 할말을 다..못했쟎아요..)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돌아다 보면..후회가 항상 남는것이..사람에 삶 이라네"
...
첫댓글 맞습니다... 깔끔한 글솜씨... 무지 부럽삼..자기의 속내를 어케 저래 표현을 잘 할수 있을까... <== (얘는 죽어도 저래 몬쓸꼬얌.) 근데 항상 소주병님의 소주병에는 소주가 차있읍니까?? 궁금 하네요.. ^^**
비요나라..빈 공간에는 채울수 있는것이 많지요..꽉 차서 넘치는것 보다는..조금, 빈것이..담길수 있는 여분이 있어서..더욱 좋습니다.속내에 표현은..별것이 아닙니다. 솔직한것은.. "너줄너줄" 나열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알아보게 마련이죠...
수일내에 한번은 연락 드려서... 상담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장례 문화에 많은 지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수 배우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