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민호선생은 1924년 9월 29일생으로 향년 89세 나이로 지난 11월 2일 별세했다.
언론 보도로 나온 선생의 경력은 아래와 같다.
장민호는 1944년 황해도 재령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8.15 해방 직후 현철이 만든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해 전문적인 연기자가 되기 위한 기초교육을 받았다.
장민호는 1946년 기독교 계통 아마추어 극단인 원예술좌의 성극 '모세'에 주인공으로 첫출연했다.
피난 시절 대구에서 신극협의회 단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이어갔다.
정동의 서울중앙방송 제1기 전속배우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고 1950년 국립극단 전신극단 '신협' 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장민호는 '세 자매', '성웅 이순신', '남한산성', '파우스트', '꿈하늘', '북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
'보이체크 2004', '3월의 눈'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1986년 '바냐 아저씨', 1991년 '소'를 연출했다.
장민호는 1950대부터 다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백치 아다다', '그대와 영원히', '생명', '소낙비', '종각',
'아름다운 여인', '경상도 사나이', '육체는 슬프다', '거지 왕자', '또순이', '상속자', '저 하늘에도 슬픔이',
'황금의 눈', '잘 돼 갑니다', '고원', '생명'에 출연했다.
장민호는 2000년대에도 영화 출연을 이어갔다. '미소', '태극기 휘날리며', '천년학', '날나리 종부전',
'두 여자'에 출연해 열연을 펼쳤다.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원빈이 맡은 진석의 노역을 연기해
많은 이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장민호는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제작하는가 하면 라디오 성우로 300여 작품에 참가했다.
드라마 역시 약 50여편에 출연했다. '귀향', '야행열차', '밀봉', '해빙', '그리워', '로드 넘버 원' 등에
열연했다.
장민호는 1966년부터 199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맡았으며 1968년 연극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국립극단 단장을 맡았고 1970년부터 1995년까지 성우협회 명예회장,
1977년부터 1984년까지 방송연기자협회 명예회장, 1978년 국립극단 원로단원,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중앙국리극장 극단장, 1979년부터 1990년까지 국립극단 단장, 1986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1년 연극배우협회 이사를 지냈다.
장민호는 11월 2일 오전 1시45분 향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장민호는 지난 2011년 6월부터 폐기흉으로 투병생활을 해왔다. 유족은 부인과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에 마련됐다.
5일 오전 10시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극인장 영결식을 갖는다. 장지는 성남 메모리얼파크다.
[추기]
연기자로 일생을 보낸 장민호 선생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 극단 신협의 맴버로
활약할 때였다. 피난 시절 대구에서 주로 연극 활동을 했던 이해랑, 김동원, 박암, 최남현, 주선태,
백성희, 황정순, 최은희, 등 당시의 신협 맴버 들은 쟁쟁했다.
신협 출신 남자배우로는 아마 장민호선생이 마지막까지 생존하신 분이 아닐가싶다.
여자배우는 백성희, 최은희씨 등이 아직 생존해 있지만...
장민호 선생은 성우로도 많은 활동을 하셨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KBS에서 몇 해 동안 방송한
"삼국지' 에서였다.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을 혼자서 목소리를 바꾸어 연기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영화에서는 주로 조연급으로 출연하여 별로 기억에 남지 않지만 만년에는 연극협회, 성우협회 회장직을
역임하셨고 1986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까지 역임하셨으니 연기자 출신으로는 최고의 경지까지
오른 분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카페지기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