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읽기
이현애
아득하게 바란 기억 속에서 나에게는 가끔씩 탄성을 되찾아 튕겨 나오며 빛을 발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도록 읽어라’, ‘글 뒤에 숨어있는 글을 읽어라’ 등이 그 구절들이다. 요즘은 더 적절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어렸을 적 말랑한 두뇌에 입력된 정보는 쉽게 갈아치워 지지 않아서 인가 보다.
떨떠름한 낭패감을 맛보며 숨바꼭질을 하던 시절을 숱하게 지나왔어도 나는 아직도 글을 읽으면 대부분 미로 속에서 헤매는 기분이 든다. 정작 어떤 방법으로 어떤 마음자세로 읽어야 안광이 빛나며 어떤 방법으로 읽어야 지배를 철하는지 철저하게 고민해보지도 않고 건성건성 뛰어넘는 버릇 때문일 게다. 어렴풋한 깨우침과 동감, 또는 공감만 가지고 이해했다고 여기는 안일함이 지금의 우매한 읽기 능력을 방관, 배양한 것이다.
미로를 탐색해 가면서 작가의 무한한 숨결과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서 빛나는 극히 현실적인 울림을 만나고 다면적인 작가의 언어를 읽는다. 작가는 길을 보여주기만 할 뿐 본인과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유도하지 않는다. 사실 작가와 평설가의 암시도 필요 없이 미지항未知項을 풀며 나아가야 하는 일은 독자의 사명이 아닐까. 나의 깊숙한 어딘가에 숨겨진 제 3, 4의 감성이 켜지는 소리, 나도 그렇게 물들고 싶은 글 한 편 발견하여 내 안에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안온함이며 심연에서 나를 건져 올려주는 듯한 상쾌함이랴. 그러므로 좋은 독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노력만 가지고 되는 일도 아니련만.
대부분 그리 개의치 않지만 가끔 ‘어떤 뜻으로 썼을까’에 관심이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해설을 좀 읽어보지만 내 생각과 꼭 동일하지는 않는다. 해설이나 서평도 다분히 개인적인 오차가 있기 마련이고 호불호가 흑백 논리처럼 분명해서 그 너머에 있는 편견까지도 표출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믿을 만하지 않지만 내 방식의 해석력과 경험과 사고 논리에 비추어 생각이 넘어가는 대로 맡겨보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의 해석 방식이 더 논리적이며 적합하고 작가의 의도적인 핵심을 잘 짚어가는 등 작가의 의도를 더욱 빛나게 할 수도, 역으로 아주 간혹 작가의 미숙한 부분까지 들춰내어 작가에게 일보 전진의 기회를 주기도 하겠으나 나는 그냥 참고만 할 뿐이다. 그런데 해설이 첨부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니 혼자 고민해 볼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꼭 나의 읽기 능력이 상당 수준에 있다거나 안광이 남보다 더 반짝여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이러저러 하면서 미로는 다소 단순해지겠고, 잠시 잠깐이지만 전문 평설가의 의견과 상당 부분 일치했을 때의 기쁨에 감히 우쭐해지기도 할 터이다. 곧게 뻗은 길만 계속된다면 곧 지루해진다. 구불텅길과 귀퉁이가 헐어 후미진 흙탕길도 섞어져야 긴장감이라든가, 묘미가 생기고 없던 용기와 알맞은 변칙을 찾느라 머릿속이 활발해지지 않던가. 내가 미로 찾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또한 평론가나 석학들의, 작가의 일탈까지 잡아내는 해석력을 겸한 좋은 독해력 등등을 부러워한다.
그런데 나도 나만의 미로를 어쭙잖은 자작시에 숨겨놓고 싶어 한다. 나 역시 모국어를 잘 익히지 못한 탓으로 적절하고 아름다운 시구를 적재적소에 끼워 넣지 못하니 미로 만들기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내 글을 변호한다. 미로에 큰 보물이라도 숨겨놓은 양 슬그머니 이해라는 말을 빌어서 당부하면서. 그런데 끝까지 추적해 출구를 찾아내기도, 만들어내기도 하는 스승들과 친구들이 있다. 나에게는 누구나 스승이므로 고맙기 짝이 없으며 그분들에게서 많은 것을 깨우친다. 어느 스승은 우리가 말과 글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채 600자도 안 된다 했다. 그분이 볼 때는 보통 숫자이지만 나에게 600은 너무 많은 숫자다. 그러저러하니 내가 쓴 시를 무에 그리 아름답다 나 스스로 자신하겠는가. 노상 부끄럽다.
제1외국어는 물론이고 제2외국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재들도 모국어로 역번역할 때는 정작 알맞은 모국어 구사가 어려워 전문 번역사에게 맡기는 일이 허다하다고 한다. 아마 태어나 마악 입을 떼기 시작할 때부터 모국어보다 외국어 익히기에 더 집중한 결과이리라 생각된다. 누구나 모국과 모국어의 소중함을 모를 리가 없겠지만 선진 문명에 더 빨리 다가가고자 벌어진 옛날부터 이어 내려온 습관적인 일일테다. 그렇다고 모국어를 더 많이 익힌 이들이 꼭 모국어에 능통한 것만은 아닐 것이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고 다 본인 개개인의 노력 결과라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많은 세월을 지나쳐오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외국어를 배웠지만 지금 한마디도 자유로운 구사를 못 하고 간단한 문장도 사전 없이는 읽어내지 못하며, 모국어도 사전을 자주 활용해야 할 정도로 자신이 없으니 다 나의 게으른 소치이다.
플라톤은 문자 표기가 보급될 때 기억력의 퇴화를 우려했다는데 과연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은 의지 할 곳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안이함에 빠지는데 게다가 개인적으로 기억력이 썩 좋지 않은 나에게는 글자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앞서 날아가는 생각이나 상념들을 채 잡기도 전에 다른 괘념들까지 합세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치니 기억의 갈피 속에 미처 다 끼워 넣지 못해 날것인 채의 언어를 허다하게 잃는다. 그나마 글자라도 알고 있으니 본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 수준의 부호 같은 문자 흉내를 내며 건성건성 따라가 보다가 다음 상념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조용해졌을 때 훑어보면 이미 내 품에서 날아가 버린 상념들이 반절은 되살아나기도 하니 고마운 글자다. 나름 개발한 속기 방법이다.
글자의 힘을 빌려 나온 글들은 그 표현방법이나 적절한 이용능력에 따라 읽는 이에게 잘 전달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을 지난다. 순전히 창작자의 능력 수준이 가늠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순간순간 많이 망설이고 몇 시간, 며칠, 또는 수일을 기다려 한 단어 한 구절을 찾아내 화룡점정이 되기를 꿈꾼다. 아무리 그리해도 마땅치 않은 것이, 부끄럽지만 피라미 작가인 나의 수준이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를 통해 작가의 뜻을 펼쳐 놓았으나 하문이어서 알아듣지 못하고 항상 읽고 쓰는 모국어를 사용해도 알아듣게 쓰지도 못한다. 그래도 어쩌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견디지 못하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골방에서 진땀과 씨름 중이다.
날이 뜨거운데도 참새인지 직박구리인지 모를 새들이 호르르 호르륵 지나가다 나무 사이에 걸터앉는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들은 그 사이에서 무엇을 읽으려 하는가. 내가 읽어내지 못한 그들만의 언어가 궁금하다. 그 속에 알알이 박혀 있을 귀한 사념은 또 어찌 알아낼 것인가.
시간 덜어내기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오래전부터 나는 예술이라 지칭하는 모든 장르에 막연한 동경의 시선을 품어왔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며 어른들이 지시하는 방향 끝에는 목마른 슬픔이 그렁그렁했던 것 같은데 무얼 알고 그랬을지, 지금 돌이켜 보면 가소로운 일이다. 어디로 튈지 모를 미로는 신에 가까운 천재성을 지닌 예술가, 문화인의 창조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이 창조해내는 삶에도 복병처럼 숨어있다 불쑥불쑥 튕겨 나온다. 아니 모든 것이 불가해可解한 미로인지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라는 불특정 시간 위에 서 있는 나의 앎의 상한선을 뛰어넘고, 나름 열심히 펼치는 상상력의 소산을 치졸한 것으로 끌어내린다. 이런 것을 아는 정도가 되었으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겨우겨우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어떤 장르이건 하나만이라도 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위대한 사람들이 많지만, 작곡을 잘하고 지휘를 잘하고 글을 맛깔나게 쓰고 흉중에 있는 가슴을 그려낸다든가, 남 앞에서 자기의 논리나, 개발자를 뛰어넘어 발전시킨 이론을 피력하는 사람들도 위대하다. ‘당신의 오늘은 누군가 목이 마르게 갈망하던 그의 내일이었다.’ 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지만 나의 오늘은 그 반열에 끼지 못할 것 같아 부끄럽고 낯설다.
‘이것만 아니라면…’ 식의 탈출 욕구가 수도 없이 어느 울을 뛰어넘게 하고 어느 곳을 향하는지 모를 밤기차를 타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일들은 시간과 더불어 유예되다가 그의 만료 시기는 저절로 빠르게 지나쳐 가고. 스타트라인부터 엔드라인은 보일 듯 말 듯 늘 저만치서 위용을 뽐내곤 한다. 이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가끔 시간과 만난다. 그는 비정하게도 나를 가두고 흔들며 깨뜨렸다가 함몰시켜버리기도, 가만히 지켜보다가 도도하게 이해하는 자의 눈빛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가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주눅이 든다. 그러다 침묵에 들면 그것은 더 따갑고 차며 딱딱하여 먹어버릴 수도 뱉어낼 수도 없게 되니 불가해한 갈증을 껴안을 수밖에 없다. 불우했으나 행복했다고 여겨지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조용한 사람의 내면이 가장 소란스럽다’라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시간의 침묵도 많은 말을 품고 있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하기에 더욱 뜨겁고 알고 있기에 많이 애틋하다. 바람도 없는데 나는 흔들리고, 해도 뜨지 않는데 저만이 아는 길을 헤치고 나와 멀어진 내가 다시 찾아올까 봐 그와 타협하려고 한다. 그는 틈새를 보이지 않으면서 나를 축 삼아 궤도를 만들어 맴돌고 나를 낱낱이 기억하고 각종 변주를 곁들여 탐구하며 끊임없이 존재한다.
시간이라는, 그것은 결코 타자가 아니면서 나를 도발하며 대립각을 세우고 나의 무의식중에도 맑은 의식을 가지고 덤벼든다. 그렇다고 자아는 더더욱 아닌 것 같으니 그렇다면 무엇인가. 보이는 그대로가 전체 모습이 아니고 시간 그 뒤편에 감춰진 따뜻하고 엄격한 뜻이 모순처럼 내포되고 있음을 나의 치졸한 생각으로도 어느 정도 알아채기는 한다. 그러나 같이 버무려진 결코 깨달아지지 않는 미로 속의 미로가 나를 빨아들여 버리기 때문에 내 속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마그마의 온도가 용솟음쳐 볼 기회를 놓치고 형편없이 낮아진다. 이 용솟음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가없고(끝이 없고-편집자 주) 누구나의 엔드라인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가다 서다 지치면 그게 끝점이 아닐까.
스타트라인과 엔드라인 사이 가이드라인은 거의 무시되므로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든 시작과 끝은 무수히 반복된다. 어느 시작점 전에 놓고 온 내가 끝점 통과 후까지도 꼼짝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고 있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가면서 나를 완성하려고도 한다. 슬기로운 이들은 이러저러한 고개를 잘 파악하며 피해 가거나 슬슬 달래 가며 상황에 맞는 예지를 발휘하리라. 누군가의 시나 글이 보편적인 타당성과 손잡고 있으면서도 그만의 신비로운 아우라를 가지고 내 눈을 마주쳐올 때 그가 사방으로 내려뜨리는 거미줄에 이끌리어 숨어있던 나의 정체성이 슬그머니, 때로 낯설게 탐색 당하며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 긍정적 작용과 반작용을 즐기며 나도 가차 없이 가시를 돋우거나 그 글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통찰력과 상상력, 더 나아가 망상이라고 웃어넘겨 버려야 할지도 모를 특이성의 유무에 따라 복잡다단해지는 미로 찾아 나가기를 즐거워하거나 지루해 한다.
‘지금 살아있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은 지적했다. 그렇다면 분명 나도 살아있다는 증표가 된다. 그런 위안도 위로가 된다. 그러저러한 시간을 통과해 오는 동안 내 의식의 가난은 상당 수준인데 모호함과 덧없음에 대한 분노의 헐떡임까지 무게가 더해져서 나의 가녀린 목이 꺾일 판이다. 허나 나의 동경의 시선 끝에 남아 위대한 모습으로 위로와 질시를 보내오는 모든 현상과 사람 틈에 끼어서 나도 덩달아 살아지고 그런 시간 위에서 위험하고 안이한 줄타기를 계속할 수 있어 즐겁다.
지금 바깥은 초록이 지천이다. 도심 속 여기서는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야 볼 수 있는 배롱나무를 실컷 만날 수 있는 곳이 내 기억시간 속에 여전히 있는데 가지 못한다. 고향 집 울에 턱을 괸 능소화는, 온통 내 것인 것만 같던 벼 냄새는, 잘 익어가며 있는지 이맘때쯤이면 그들의 소식도 나를 목마르게 한다. 그나저나 요즘 세태에 사치스럽기까지 한 이런 그리움을 잠시 접어두고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옆 옆집에 이어서 아랫집까지 한 달 넘게 공사하는 소리가 이제 그만 그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영원히 우리 옆에 머물며 소소한 그리움을 그리워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팬데믹 시간이 어여 끝나고 역시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스승 중 미렐라 프레니가 불러주는 푸치니의 ‘어떤 개인 날’을 들으며, 감히, 멀리 있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손맛 나게 맞잡아보는 것이니, 시간이 많이 흘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