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1556]松江선생5절 淸源棘裏[청원극리]
원문=松江原集卷之一 / 詩○五言絶句
淸源棘裏[청원극리] 淸源-江界別號。
松江 鄭徹[정철]
居世不知世。거세부지세
戴天難見天。대천난견천
知心惟白髮。지심유백발
隨我又經年。수아우경년
세상에 살면서 세상일을 모르고
하늘을 이고 살면서 하늘 보기 어려워라
다정한 것은 오직 백발이로다
나를 따라 또 한해를 넘기는구나
이하=윤기헌(尹耆獻)저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
○ 송강 공이 일찍이 어사가 되어 관북 지방을 순시할 때에 돌아 오는 길에
철령을 넘지 않고 미복(微服)으로 합포(合浦)로부터 시중대(侍中臺)에 오르고,
통천(通川)에 이르러 다시 총석정(叢石亭)에 올라서 자칭 정 진사(鄭進士)라 하고,
그 고을 군수와 실컷 술을 마시었다.
다음날 동침한 기생에게 말하기를,
“십년 후에는 감사가 되어 다시 오리라.”
하니, 기생의 말이,
“감사가 귀하고 높은 자리이긴 하나 그보다는 찰방이 더 얻기도 쉽고
오기도 빠를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그 11년 뒤에 과연 감사가 되어 이곳을 순시하자,
그 기생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공이 다음과 같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십년 전 언약이 / 一十年前約
감사냐, 찰방이냐였는데 / 監司察訪間
내 말이 비록 맞았으나 / 吾言雖或中
모두가 귀밑털이 반백이로세 / 俱是鬢毛班
이 이야기는 지금껏 관동 지방의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다.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이 공과 함께 화천현(花川縣)에서 잔 일이 있었는데,
벽상에 걸린 시를 바라 보고 마음에 몹시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왕명을 받들어 온 사람이라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렇지 않으면 해유(解由)를 어떻게 하겠소.”
하니, 좌중이 크게 웃었다.
공이 나와 함께 금강산 구경을 간 일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다.
화천관에서 술잔을 사양하던 밤 / 花川館裏逃觴夜
풍악에서 달을 대하던 때라네 / 楓岳山中對月時
이런 좋은 일들을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 勝事世間難再遇
소상강의 일엽주야, 가는 곳이 어디냐 / 瀟湘一葉竟何之
그때 선군께서 회양(淮陽)에 계시었는데,
공과 선군이 같이 술을 마시었다.
선군께서 장단시(長短詩)를 지으시니,
공이 화답하기를,
태수의 명성은 장단구에 있고 / 太守聲名長短句
사신의 풍류는 얕고 깊은 술잔에 있도다 / 使華風味淺深杯
하였으니, 그 호탕함을 알 만하다.
공이 순시 길에 망양정(望洋亭)에 이르렀는데,
바다 속에 바위가 솟아 있어
파도가 치면 부딪쳤다가 부서지는 광경이 기이하고 장관이었다.
공이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옥산을 깎아내어 편편히 날리고 / 剗却玉山飛片片
은기둥을 꺾어다가 층층이 떨어트렸네 / 折來銀柱落層層
이 시를 매양 그 묘사가 잘 되었다고 자랑을 하였다.
뒤에 함경도 감사로 갔을 때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경성(鏡城)에서 와병 중이었다.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역마를 빌려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말이 이르기 전에 고죽은 숨을 거두었다.
공이 만시(挽詩)에 쓰기를,
말 한 필 운중에 들어 왔는데 / 一馬入雲中
봄날에 어느 곳에서 울 것인가 / 春風何處嘶
장군이 병영에 누웠으니 / 將軍臥細柳
다시 운제에 오를 길이 없구나 / 不復上雲梯
이 운제는 바로 관외(關外)의 지명이었다.
이에 앞서 퇴도 선생(退陶先生)이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니
당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강가에 나와 전송을 하였다.
이때 공은 직학으로 있었는데, 공이 강가에 도착하였을 때는
선생이 이미 멀리 떠난 뒤였다. 공이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뒤쫓아 광나루에 오니 / 追至廣陵上
신선의 배 이미 아득하네 / 仙舟已杳冥
봄바람 강에 가득한 생각으로 / 春風滿江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르네 / 斜日獨登亭
경인 연간에 공이 좌상으로 강계(江界)에 안치되었는데
하루는 금오랑이 부내에 달려 들어오니,
부인(府人)들이 모두 놀래고 겁을 냈으나 공은 태연하게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은 웃음말로 함경도 사람인 유씨(柳氏) 여인에게 말하기를,
“정대감 위리위리[鄭令公危理危理]”
라 하였다. 위리란 말은 위급하다는 뜻의 방언인데,
때마침 공은 위리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공이 일찍이 아래와 같이 시를 지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일을 모르고 / 居世不知世
하늘을 이고 살면서 하늘 보기 어려워라 / 戴天難見天
다정한 것은 오직 백발이로다 / 多情唯白髮
나를 따라 또 한해를 넘기는구나 / 隨我又經年
공의 인품이 비록 가볍고 맑아서,
혼후하지는 못하나 지조만은 마음속에 뚜렷하여
죽고 사는 일에 동요됨이 없었으며,
그의 시 또한 맑고 산뜻하고 호방하여
티끌 세상을 벗어 산 운치가 있었다.
정철(鄭澈)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다.
조선 시가 문학의 대표적 형식은 시조와 가사이다.
가사는 시가 문학에서 서사 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문학 형식으로,
운문 형식에 산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짧고 단편적인 심상을 노래하는 시조보다
길고 풍부한 주제를 다루고자 탄생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가사 문학의 대가는 송강 정철이다.
정철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곡 많은 인생사를 겪으며 수많은 시조와 가사를 남겼다.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107수의 시조를 남겼는데, 사후 편찬된 《송강가사》, 《송강별집추록유사》, 《송강집》 등에 실려 있다.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우리말 어법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언어 구사,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두고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성산별곡〉은 그가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 외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편 〈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 : 왕의 후궁에게 내린 종2품의 작호)인 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 명종 즉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돼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정자(鄭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했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됐고, 맏형은 이때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 가던 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을 했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
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552년(명종 7) 17세에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星山: 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1566년(명종 21)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1570년(선조 3)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를 끝내고 벼슬길에 나가 직제학성균관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에 있을 때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인 1578년(선조 11)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했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했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임금을 사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