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해 왔고, 같은 맥락에서 동물을 지배하고 사용해 왔다. 그러나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의 핵심은 우리가 대체 가능한 살아 있는 장난감과 논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하나의 고유한 영혼과 교류한다는 의미다.
■ 동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동물은 자원 아냐…고유명사인 이름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 가졌다는 뜻과 같아
인간에게 위계의식 벗어나 도덕적 책임 가질 것 요구하며 ‘생명의 자유’ 실현하는 길 알려주는 존재
어렸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아침 기르던 강아지가 집 앞에 나가 놀고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차가 달려와 강아지를 치고 지나갔다. 강아지 코에서 뿜어나오던 피가 아직 기억나고, 나는 이 장면을 지금도 계속 반복해 기억한다. 주택가를 그렇게 무섭게 질주하는 차가 있었던 건 폭력과 무법과 무식함의 1970년대라서 가능했던가?
어쨌든 나는 강아지를 구하지 못한 자다. 왜 강아지를 대문 밖에 내보냈던가? 이 죄인에게는 지금도 계속되는 괴로운 기억의 반복을 멈출 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치료받아서는 안 된다. 책임지지 못한 사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료란 있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동물이란 내겐 ‘죽어가는 동물’이다.
사람들은 동물을 보호한다. 동물이 활용가치가 높은 자원이라서 그런가? 인간은 살기 위해 환경을 필요로 하고, 동물은 그 환경의 일부이기에 보호하는가? 결국 인간을 위해서? 아니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정말 순수한 도덕적 책임을 가지는가?
인간은 거의 책임을 지지 않고 수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물에 대한 책임은 어쩌면 이야깃거리 정도로 철학사에 출현할 텐데, 가령 니체의 경우가 그렇다. 1889년 1월 초 토리노에 머물던 니체는 마부에게 얻어맞고 있는 말을 보고는 다가가 말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낀다. 그는 그 자리에서 뇌내출혈로 쓰러진 후 죽을 때까지 미쳐 있었다.
이 이야기는 묘한 기시감을 주는데, 바로 피타고라스의 개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날 길에서 매 맞고 있는 강아지를 보았을 때 피타고라스는 불쌍한 마음에 사로잡혀 이렇게 말했다. “그만하시오! 그 강아지는 내 친구의 영혼이오. 개가 울부짖을 때 나는 친구의 혼을 알아보았소.” 윤회설에 빠져 있긴 했으나, 이런 말을 대낮에 하는 피타고라스는 어쩌면 그때 니체만큼이나 미쳐 있었다.
약간 미친 철학자들만이 가졌던 이런 동물에 대한 관심은 철학사 속에선 물잔 속의 얼음처럼 잠깐 빛나다 미지근하게 되며 이성의 물밑으로 사라진다. 동물은 쉽게 ‘인간에 대한 존중 바깥으로’ 밀려난다. 가령 윤리의 문제를 한평생 숙고해온 에마뉘엘 레비나스 같은 철학자는 타자에 대한 책임의 근본성을 이야기해 왔는데, 레비나스의 이 ‘타자’에는 동물이 속하지 않는다.
타자는 그의 얼굴을 통해 고통을 드러내며 ‘살인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동물은 이런 호소하는 얼굴을 가지고 있을까? 예를 들면 뱀은? 레비나스의 대답은 문자 그대로 다음과 같다. “뱀이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철학은 이런 편견 속에서 인간만을 위한 윤리를 키워왔다. 자크 데리다가 말하듯 “육식의 희생이 본질적인 종교적 문화들에서”, 즉 전 세계적으로 퍼진 서구 종교의 문화 안에서 동물이란 결국 인간의 자산인 ‘고기’다. 불에 태워 신에게 바치고 인간도 먹는.
인간은 오래전부터 지구의 주인으로 행세해 왔고, 같은 맥락에서 동물을 지배하고 사용해 왔다. 이런 일의 기원에는 적지 않게 유대·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린 화이트가 유명한 논문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에서 잘 지적하듯 말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이유선 역)
이런 배경에서 자라난 서구의 사상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적 격차를 만들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란 칭호를 발명해 가졌고, 동물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인간적 영혼을 가지지 못하는, 물건처럼 물리적 법칙의 지배만을 받는 ‘동물 기계’(데카르트)가 됐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저 동물 기계에 대한 매력적인 반론을 가지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이다. “이 마을의 모든 소에게는 이름이 있었다. 이름이란 영혼의 표지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의 영혼을 지녔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반론이다.”(송동준 역) 여기서 동물은 익명적인 수량으로 계산되는 자원이 아니다. 한 짐승을 고유명사로 부른다는 것은 그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을 보라. 그 삶의 핵심은 우리가 대체 가능한 살아 있는 장난감과 논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하나의 고유한 영혼과 교류한다는 것이다.
고유한 한 개체로서 동물과의 교류를 이야기하고 있는 몇몇 귀중한 기록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동물에 대해 이렇게 경험하고 있다. “동물의 눈은 하나의 위대한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이 고양이는 내 눈초리를 눈치채고 빛을 내뿜기 시작한 눈초리로 틀림없이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 나를 생각해 준다는 것이 있을 수 있나요? 사실은 당신은 나를 한갓 당신의 심심풀이로 삼으려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당신과 상관이 있나요? 나는 당신을 위해 있는 것인가요?’”(표재명 역) 여기서 동물은 물리적 세계의 사물이 아니라, 나와 대면한 ‘타인처럼’ 고유한 개체로서 말을 건네고 있다. 그것은 잡담 같은 말이 아니라, 인간을 ‘윤리적 시험대에 세우는 말’이다. ‘나는 한낱 당신의 심심풀이인가요? 나는 그저 당신을 위해 있는 것인가요?’
고양이에 대한 부버의 이런 체험은 후에 데리다가 다시 반복한다. 데리다는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에서 쓰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양이의 시선 아래 내가 발가벗은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보는 이 순간들보다 이웃의 이 절대적 타자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주지는 못할 겁니다.”(최성희 외 역) 태초에 창조주의 눈앞에서 아담은 발가벗은 몸을 수치스러워했는데, 이 발가벗은 몸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인간에게 도덕이 탄생했다. 저 구절이 보여주듯 이제 인간은 신뿐 아니라 동물의 눈앞에서도 자신이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동물은 그저 물건 같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처럼 시선을 던지는 타자로서 도덕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동물의 시선을 받을 때 이런 물음이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살해, 즉 ‘죽이지 말라’에 대한 모든 위반이 오직 인간만을 겨냥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요컨대 ‘인류에 반하는’ 범죄만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니, ‘동물에 반하는’ 범죄 역시 있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 역시 우리에게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동물의 호소를 인상 깊게 드러내는 다음 구절을 읽어보아야 한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는 정육점에 걸린 고기를 수없이 그렸는데, 이 그림들을 보면서 질 들뢰즈는 동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 짐승이고, 고통받는 짐승은 한 인간이다. … 예술, 정치, 종교 그 무엇에서든 혁명적인 사람이라면 죽어가는 송아지들 ‘앞에서’ 책임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극단적인 순간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이 순간에 그 사람은 한 마리의 짐승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동물은 단지 우리를 동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는 자로 지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동물은 우리에게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만들지만, 동물 그 자신은 신이나 인간이 만든 어떤 법 아래에도 놓이지 않는다. 법 아래에 놓이는 동물도 있긴 한데, 그것은 인간적 삶의 은유에 불과하다. 가령 ‘미녀와 야수’ ‘개구리 왕자’에서 신적 능력에 상응하는 마법의 처벌로 인해 야수가 되고 개구리가 되는 것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직자에게 감화돼 회개하는 모든 이야기 속의 동물도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은유다.
오히려 동물은 신과 인간이 부과하는 초월적 법을 어떻게 파괴하고 생명 그 자체를 구가할 수 있는지 인간에게 길을 안내해준다. 구스타프 말러는 좋은 예를 가지고 있다. 말러는 그의 위대한 교향곡들처럼 존중해야 하는 가곡집들을 썼는데, 그 가운데 독일 민중시에서 가사를 뽑은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가 있다. 이 가곡집에 실린 천재적으로 병맛 나는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는 인간적이거나 신적인 법을 벗어나는 동물의 모습을 즐겁게 그려나간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서 린 화이트의 글에서 인용했던 신과 인간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즐겁게 반박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 안토니우스는 교회에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에게 가서 설교했던 인물이다. 이 풍자적인 가곡 속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어떤 설교도 물고기들을 이토록 즐겁게 해 주진 못했네!” 물고기들은 뻐끔거리면서 열심히 설교를, 그러니까 신의 법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다. 그러나 노래의 마지막이 중요하다. “설교는 잊어버렸네! 설교는 그들을 즐겁게 했고, 그들은 다시 그전처럼 됐네!” 물고기들아, 성자의 말씀을 생까다니! 동물들은 설교는 즐겁게 듣지만, 설교에 따라서 신의 법 아래 복종하는 일은 없다. 설교는 그저 즐겁게 들었으면 됐고 그들은 돌아서서 그냥 하던 대로 한다. 생명이 허용한 그대로, 잉어는 포식하고 뱀장어는 사랑을 즐기고.
들뢰즈라면 이런 국면을 다음같이 표현했을 것이다. “‘동물 되기’에서 모든 형태는 붕괴한다.” 인간이 복종해 온 신의 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동물들은 이 법을 붕괴시키고, 생명의 자유를 실현하는 길을 열어준다. 인간이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서동욱 /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시인 아힘 폰 아르님과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독일 각지에서 수집한 독일 민중시 엮음이다. 괴테가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던 이 시집은 특히 말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1905년 3월 말러가 평론가 카르파트에게 쓴 편지를 보면, 작곡가들 가운데 오랜 세월 자기 가곡의 노랫말을 이 시집에서만 골라온 사람은 말러 자신밖에 없다고 회상하고 있다. 말러는 이 시집의 시들을 가지고 동명의 가곡집을 거의 12년 동안이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