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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서막 - 한국전쟁과 당시 나의 고향에 있었다던 이야기
(아래의 이야기는 당시의 풍문과 목격담을 각색해 구상한 실화입니다.)
때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경 유엔군과 군경이 전남지역을 수복하면서,
좌익들은(인민군 일부와 빨치산)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빨치산 인민유격대 조직은 전남도당 유격사령부 예하에 6개 지구 체제로 재개편한 무장조직이었다.
약 6만여명이었던 이들은 남조선노동당 박헌영대장 휘하로,
전남도당 위원장은 박영팔, 부위원장 겸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선우이다.
이중 제5지구당 (불갑산)불갑지구는 함평, 영광, 무안, 목포가 활동무대로 약 2,500명이었다.
(위원장; 김용우, 빨치산사령관; 박정현, 모두 구빨치산 출신)
한편 1951년 2월 20일경 새벽 대대적인 불갑산 토벌작전인 남한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전개된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에 11사단 20연대와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지역우익단체가 동원됐다.
이 불갑산 토벌작전을 당한 빨치산중 일부는 나주 금성산으로 후퇴하여, 나중에는 영산강을 건너 장흥으로 향했다.
그중 금성산으로 퇴각하다 흩어진 몇몇 빨치산은 나주야산에 머물다,
봄에 피난주민 행색으로 위장한체 노안면 양천리 계량재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계량재 아래에 인가를 발견하고 내려가 왠 불탄 성당이 있어 내려가다 멈짓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숨는다.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망산,뿔바위 인근 전경
∇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계량마을 노안성당 (현제모습)
왜냐면 그 성당은 붉은색 성당으로 멀쩡했기에, 반공대가 유인책으로 그리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순간 선듯하다.
이들은 계량재를 지나 망산 인근에서 하산하여 인근마을(국룡)을 우회해 들판을 지나 산에서 발견한 방죽으로 향한다.
방죽(장등제) 들판으로 진입해 은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변을 바라보다,
원거리에 있는 기이한 풍경인 고인돌 유적지를 발견하게 된다.
이 빨치산은 순간 저 고인돌 유적지 주인은 아마 이지역의 지주일거라 판단하고,
야산길을 따라 고인돌이 있는 인근 마을로 향했다.
가면서 야산밭에서 일하던 지역 농민에게 고인돌 야산주인집을 수소문하여 그 마을로 향한다.
∇ 양천리 장등방죽으로 사진위 중간 남색둥근표시가 고인돌 유적지이다.
빨치산 : "수고하십니다. 전쟁 난리통을 격다 길을 잃어 배회중이외다.. 참, 저 신기한 고인돌 야산주인이 누구요?"
지역주민 : "아이고, 어쩌다 여기까지 피난 행렬이요?.. 그 야산주인은 저기 금동마을의 신철수아들네이지라~"
즉, 위 고인돌과 관련된 마을은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 양천리 금동마을이며, 나의 할아버지의 본가였던 집성촌 마을이다.
작은아들 ; "앰병~ 그럴거면 머하러 총을 겨누고 지랄이요? 차라리 좀 달라고 구걸하지.."
빨치산 간부 ; "이런 삭아지하고는.. 이보시오 동무, 총알받이로 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이나 대리고 나오시오."
하고는 나의 큰할머니인 중년여성이 챙겨주는것을 받고, 먼저 엄호하며 길을 나설 준비를 한다.
그럴즈음 집안의 가장 할아버지가(중년남성) 바깥일을 마치고 귀가중,
누가 뭐라하는 소리를 듣고 살피자 집안서 총을 든 괴한과 맞닥뜨린다.
집안의 중년남성은 만류하며 내아들 말고 나를 잡아가라 자처했고, 부하는 이내 중년남성을 인질로 하여 길을 나섰다.
왜냐면 총알받이로 소년은 불필요했으며, 간부도 이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 나의 할아버지 본가집터 옛모습
이 빨치산은 초저녁 인적이 드문 계림리를 거처 서광산(평동 남서쪽)을 지나
지금의 공항 남서쪽 천변을 끼고 서창동으로 향했다.
아마 무등산과 화순야산의 거점지 근황이 궁금해서인듯하다.
이 두명의 빨치산에게 인질이 처음엔 나의 할아버지 혼자였지만,
평동끝을 지나다 길에서 마주친 주민 두명을 생포해 인질이 셋이 된다.
인질 손을 묶은체 끌고가면서, 가다 주민이 물으면 빨치산 내통자를 끌고 가는거라 둘러댔으며,
주민은 낮선 반공대원이긴 하지만 국군총을 소지하고 있어 긴갑다했고,
그래도 의심하는듯 보이는 행인 둘을 잡아가는것이다.
이들은 늦은밤 인적이 드문 지금의 광주시 서구 서창동(회재로) 인근 (백마산)큰야산에서 잠시 여장을 풀었다.
그러는 사이 송정리 인근 지역주민이 밤에 왠 수상한 사람들이 지나는것을 보고,
급히 지역 파출소 같은 반공치안대에 알렸다.
당시 반공치안대엔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이 규합해 반공조직을 관리감독하거나, 독거다이 왕초가 종종 있었다.
치안대에 당직을 서다 지역주민의 급보를 받은 서북청년단출신 대원은 전공을 독차지하고자
지역출신 대장에 따로 보고하지 않고, 총 몇개와 전쟁중에 노획해 숨겨둔 수류탄 한개를 챙기고,
급히 (반공청년단)반공대원을 소집하여 빨치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독거다이 왕초인 서북청년단출신 반공대원은 지리에 밝은 지역반공대원들을 앞세워 단독으로 빨치산을 추격해,
서창동 인근야산 아래 능선들판에서 애워싸며 매복한체(5명이상), 빨치산을 기다리며 급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쾅~"
때이른 새벽 빨치산이 야산에서 내려와 신작로 같은 탁트인 농로를 걸을즈음,
대각선방향에서 폭탄이 날아와 이들 앞에 떨어진다.
폭탄이 날아오기 몇초전 한 일질이(나의 할아버지) 대각선방향에서 누가 숨어 공격직전임을 감지하고,
위험하다 외치며, 손이 묶인체로 농로옆 도랑으로 몸을 내던지어 피신한다.
그 말에 순간 빨치산들은 총으로 엄호하며 두리번 거리는 순간, 이내 폭탄이 인근에 날아와 터진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폭탄과 함께, 미처 피하지못한 총알받이 인질 둘은 사지가 찢기어 그자리에서 죽고,
빨치산간부는 중상, 좀 뒤에서 걸어온 부하는 반사적으로 엎드리며 짐으로 몸을 엄호해 가벼운 부상을 당한다.
그간부는 위기의 순간에서 자신은 틀렸으니 후일을 도모하라며 부하에게 도망치라며 손타레친다.
빨치산부하는 급히 몸을 은폐하고 자신의 총이 멀쩡한지 확인후,
급히 무기를 챙기고 간부에게 경례를 신속히 한후 현장을 피한다.
그러는 사이 도랑으로 몸을 날려 몸을 피한 인질(나의 할아버니)은 폭탄은 피했으나, 그렇다고 몸이 건사한게 아니었다.
도랑에 처박힌듯 되어 허리,옆구리 부상등 크고 작은 전신 찰과상이 생겨 거의 중상자 처지가 되버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군도 재수없는자들이라 판단하고, 아무도 없는 쪽으로 무조건 도망을 쳤다.
한편 매복해 30M인근에서 수류탄을 막무가내로 까낸 사람은 서북청년단출신으로,
이런 막무가내 공격으로 나중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폭탄소리와 함께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하고 이후 덮치러 달려갔는데,
위기의 순간에도 빨치산 부하는 총을 쏘며 저항을 하였다.
그 바람에 지역반공대원 한명이 총상을 당하자, 순간 잠시 대원이 몸을 숨기는 사이, 그 빨치산은 서둘러 줄행랑을 쳤다.
부상당한 빨치산이 도망치는것을 보고, 대원 몇명은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폭탄이 터진 현장으로 향했다.
빨치산을 추격한 지역반공대원중 한명이 총을 들고 있었으나 총을 잘 쏘지못하여 총알이 헛나갔고,
빨치산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그것을 보고 답답한 서북청년단출신은 뒤늦게 적을 향해 격발했으나, 원거리라서 총알을 피해 이내 사라진 뒤였다.
그 와중에 한 반공대원은 도망치는 인질을 향해 아군이니 안심하라, 쉬었다가라 소리치지만 일없다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추격을 포기하고 폭탄현장으로 와 죽어가는 빨치산간부의 총을 수거해 확인해보니 격발이 되지않았다.
그총은 나무대머리판인 국군총으로 인민군총보다 견고치못하여,
폭탄파편을 맞고 붕떠서 굳은 길에 떨어져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보다 아군이 양민까지 죽인처사가 되고 말았으니, 반공대에 더 심각한 난관이 봉착한 것이다.
갑자기 당황해진 치안인솔자는 무과실전공으로 위장하고자 지역반공대원에게 삽하고 응급약을 챙겨오라 지시한다.
이후 인가에서 약과 삽들을 챙겨오자, 한명은 부상대원을 치료하고 나머지들은 음침한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한편 그곳 인가에서는 앞면있는 먼 지역주민(반공대원)이 왠 약과 삽을 달라해서 줬기는 줬으나 무슨일인가 궁금하여,
폭탄,총소리에 놀란 주민과 함께(몇명이) 그 대원을 미행했다.
그리고 멀찍이 숨어서 그 현장과 그들의 현장조치를 보고 이내 놀랄수밖에 없었다.
암매장하려던 사람이 빨치산이 아니라 어디서 본적이 있는듯한 주민으로 둘다 양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무등산,화순야산 인근에 임시주둔지로 두고 지역정찰을 하고 있던 몇명의 빨치산이,
5KM인근 고지대에서 폭탄 소리를 듣게된다.
본능적 직감이었는지 빨치산 동지와 직결된 상황이라 판단하고 그 빨치산은 서창동방향으로 향한다.
가다 매월동(회재로)을 지날즈음 서창동에서 폭탄부상을 당한 대원 한명을 만나게 되고,
그대원 동지가 알려준대로 사건현장으로 찾아갔다.
서창동 야산아래 언덕들판 인근에 도착하니 멀찍이서 반공치안대들이 시신을 암매장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탕, 탕.."
합세해온 빨치산이 현장으로 숨어와 사격하자, 서북청년단대원은 현장에서 즉사,
지역반공대원 한명은 총상을(총상 총 두명)맞고 쓰러진다.
그러자 나머지 반공대원들은 가져온 총만 챙긴체 뒤도 돌아보지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사건현장에 도착한 빨치산은 총상으로 미처 현장을 빠져나오지못한 반공대원 두명에게,
지금 무슨일을 벌이려고한거냐고 추궁한다.
그래서 시인하길 "서북청년단출신 사람이 전공에 눈이 멀어 신중한 작전을 뒤로하고 막무가내로 폭탄을 던졌어라.
그바람에 주민인 인질이 죽었지라, 그래서 이걸 숨기려 암매장하고, 폭탄으로 빨치산만 죽인걸로 위장하려고 했지라~..."
PS (추신; 덪붙임)
이사건의 진위는 당시도 그렇고 지금이라도 지역주민에 수소문하려한들 잘 알길이 없다.
왜냐면 당시 반공파 목격 주민 스스로도 누구에게 말하기 민망할만큼,
위처럼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황망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광주지역 반공치안대 스스로도 쪽팔려서 이사건을 입다물고 있었기에 더욱이 알수가 없다.
다만 알수있는것은 이처럼 빨치산에 비해 반공치안대에 의한 양민의 이러저러한 피해가 더 많았고(예; 누명),
그 행태 또한 치졸했다는것이다.
(1951년 봄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하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리고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 지시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을 했지만, 되려 인명피해가 더컸다고한다.
해보면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는 국군 5중대('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고한다.)
그리고 격전지가 이 백마산 인근인지는 확실치는 않다.
다만 지금은 고인이된 동네 문중큰어른이 당시 수소문한 바에 의하면,
첫댓글 전공독차지하려다 더난리났네요
근데 광주쪽이면 31사단도 있을텐데 11사단을 왜쓴건지...31사단이 창설되지않고어쩌고저쩌고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면 가능할것같긴한데...
11사단이 광주까지 왔었나요
당시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그렇다네요=> 1950. 915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벌인뒤, 광주지역은 1950. 10.3. 경찰부대가 광주시내에 진입했으나 치안이 회복된건 아니었다. 이 무렵 광주에 잔류한 인민군과 지방좌익세력은 무등산, 함평 불갑산, 지리산, 화순 백아산, 광양 백운산 등으로 입산하여 군경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0. 10. 10.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가 광주에 주둔함으로써 광주지역 치안은 회복되기 시작했다. 국군 제11사단 20연대는 화순, 장성, 담양, 곡성 등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함과 더불어 각 경찰서에서도 경비계에 토벌대를 두고 토벌작전 및 치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채널만호(광주) ㄱㅅ
@채널만호(광주) 아~11사단일부부대가 광주에 주둔했었군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네, 당시 관련 보도자료를 찾아보니 그런 참담한 사건이 있었군요..
‘함양·산청 양민 학살사건’은 1951년 2월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며 작전지역내 사람 모두를 총살하고 집을 불태우는 ‘견벽청야’작전으로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과 유림면 서주마을, 산청군 금서면 가현·방곡마을 등에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한 참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