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로우시티, 청산도
임두환
하늘과산과 물이 모두 검푸른 청산도였다. 청산도는 진즉부터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느림을 통해 행복을 일깨워주는 슬로우시티로 지정되어서이다. 영화 ‘서편제’와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곳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청산도에서 그곳사람들과 만나 하룻밤을 지새우며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초등학교 동창 다섯 명이 오래 전부터 부부동반 모임을 갖고 있었다. 모임을 가진 지 오래지만 격월로 만나서 얼굴만 확인하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S친구의 주선으로 1박2일 코스로 청산도를 찾게 되었다. 완도에서 19.2㎞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에 5개 섬으로 이루어진 청산면은 2,500여명이 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완도항에서 페리호로 약 45분쯤 달리다 보니 청산도항이었다. 항구가 마치 소쿠리 안 같이 아늑하여 파도를 막아주는데 천혜의 조건이었다. 면소재지 도청리는 육지의 소도시에 버금갈 만큼 생기넘쳤고, 이곳저곳 팬션에서는 여행객을 맞느라 분주했다. 우리 일행은 도청리를 벗어나 해안가 권덕리 유자향펜션에 여장을 풀고서 곧바로 범바위 전망대에 올랐다.
청산도는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소도시 ‘그레베인 키안티’ 시장 사투르니가 현대 생활은 ‘빨리 빨리 살 것을 강요하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며 마을사람들과 느리게 살자고 세계를 향해 호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공해 없는 환경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존하면서 느림과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국제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슬로시티는 국제연맹본부의 현지답사를 거쳐 일정기준을 통과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까지 27개국 174곳인데, 우리나라에도 청산도를 비롯하여 11곳이 지정되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청산도는 논두렁 밭두렁이 그렇고 집들도 모두가 돌담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묘지도 돌담으로 둘러져 있어 언뜻 보면 제주도를 연상케 했다. 청산도의 돌은 하나같이 구들장 돌처럼 얇고 넓적했다. 땅만 일구면 지천으로 깔려있어 처치 곤란이라고 했다. 지형은 가파르고 물이 부족하다보니 농사를 짓는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제일 밑층에 큰 돌을 깔고서 층층이 돌과 흙으로 쌓은 뒤, 제일 위층에는 진흙으로 다지고서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것이 구들장 논이다.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으려는 섬사람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주민들은 평소 마을과 마을로 이동하던 슬로우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청산도를 온전히 구경하려면 이 길을 느릿느릿 걸어야 제격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어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슬로우 길의 진 맛을 놓칠 수 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범 바위였다. 보적산 8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위치한 범 바위는 어미호랑이가 뒤따라오는 새끼를 돌아보는 형상이었다. 범 바위 전망대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바다 비경과 청산도 전경全景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한 폭의 거대한 풍경화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거문도와 제주도가 보인다고 하여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렸지만 뿌연 안개로 흐릿할 뿐이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이 ‘서편제’ 영화촬영지 당리마을이었다. 당리마을에는 그 당시 촬영했던 초가집들이 잘 보존되었고,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과 송화, 동호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장면이 이채로웠다. 또한, 청산도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것은 고인돌이었다. 읍리마을에 고인돌 16기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 도로공사로 훼손되어 지금은 3기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청산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청산도 슬로우 길 10코스에는 지리해수욕장이 있다. 폭 100m에 길이 1.5km의 백사장은 밀가루 같은 잔모래가 펼쳐있어 이색적이었다. 주변 언덕에는 200여 년 된 소나무가 빽빽하여 텐트가 필요 없을 정도였고,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도 장관이었다.
청산도를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갯바위 낚시터, 상서마을 옛 담장, 진산리 갯돌해변, 향토역사문화전시관 등이 잘 보전되어 있었다. 청산도에 들어서며 첫 눈길을 끌었던 것은 슬로우 길 표지판이었다. 파란바탕의 나무목각에 새겨진 달팽이 모양은 슬로우시티를 알리는 일등공신이었다. 청정지역 청산도에서의 아쉬움은 생선회를 맛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하필이면 그 무렵 거제도에서 콜레라균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에 전복죽으로 대신해야 했다.
공기 맑고 아늑한 섬, 청산도는 이름 그대로 하늘과 바다와 산이 맞닿은 푸른 섬이었다. 앞으로 내 삶에 버거움이 따른다면 느릿느릿 걸어야 하는 곳, 청산도 슬로우시티를 다시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