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8일 (홍)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신부
복음; 루카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 니다.’ 하고 말하여라.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9 그곳 병자 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 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2027년에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본당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 책자의 발행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저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사제인 저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 지금 가난한 사람, 지금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감동입니다. 저는 늘 큰아들처럼 살아왔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성실함을 드러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큰아들도 사랑하였지만, 돌아온 아들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우리가 뉘우치면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고,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의 진정한 가치는 용서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회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믿음의 나무로, 사랑의 나무로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나누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 같습니다. 지친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시고, 함께 머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을 전해주시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저는 성가 엠마우스를 참 좋아합니다. 이 성가를 작곡하신 원선오 신부님도 존경합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사목을 하시다가 한국으로 오셨습니다. 한국이 어느 정도 발전을 하자 케냐로 가셨습니다. 케냐에서는 더욱 어려운 수단으로 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에 계실 때,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했던 학생들은 신부님의 따뜻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교문 앞에서 비를 맞고 있는 아이를 보았고, 우산을 들고 아이에게 가셨습니다. 우산을 함께 쓰고 데려다주신 신부님을 아이는 기억하였고 신부님의 영향으로 사제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길의 끝은 부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제게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복음입니다. 저 또한 따뜻한 이웃이 되도록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사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알려 주는 복음입니다. 여러분에게 루카 복음은 어떤 복음인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주 델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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