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1
9월25일[연중 2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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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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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NFI9A9XFiA
[서울대교구 김도훈 라파엘(제기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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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여름 내내 신앙학교 운영하느라 땀 흘리며 쌩고생한 형제들과 소풍을 왔습니다. 어떻게든 형제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산 너머 갯바위 포인트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물고기들도 약아 빠져 사람들 발길 닿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손맛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산더미입니다. 그걸 이고 지고, 깎아지르는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포인트에 겨우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고, 이고 지고 온 것을 다시 챙겨 산길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어디 다닐 때는 어떻게든 짐을 최소화해야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훈화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꾸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예수님의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씀인가요? 빵도 돈도 안 챙기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요? 여벌옷도 한 벌 안 챙기면, 만나는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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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A0JkqNpW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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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법칙>
언젠가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 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 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미는 이미 자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먹이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 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것없는 것 중의 보잘것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나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
선교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시도하는 데에서 집착이 사라지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 ‘평균 성공의 법칙’입니다. 앨런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 ‘평균 성공의 법칙’이 나옵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평균 성공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보험 영업하던 시절 그는 1:56이라는 평균 성공이율이 적용됨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보험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56명당 1명은 “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을 하루에 168번 하면 보험 계약을 하루에 3건씩 체결하게 되고, 그러면 보험 영업의 세계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게 됩니다.
앨런 피즈는 이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11세 때 집집이 다니며 고무 스펀지를 개당 20센트에 팔았습니다. 그때 평균 성공 비율은 10:7:4:2였습니다. 그는 학교가 끝나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방문판매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10곳마다 7곳이 문을 열었고, 그중 4곳이 나의 준비된 상품 소개를 들어주었으며, 그중 2곳이 고무 스펀지를 샀습니다.
다시 말해 10곳당 평균 판매액이 40센트였습니다. 그는 1시간에 평균 30곳을 돌았고, 2시간 동안 평균 12개를 팔아 평균 2달러 40센트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1962년 당시 11세의 호주 소년에게 2달러 40센트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10집당 40센트씩 번다는 것을 알고는 문을 열지 않는 3곳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관심 없다며 문을 닫는 3명과 구매를 거절하는 2명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0곳을 두드리면 40센트를 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평균의 법칙을 모르면 다음에 일어날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앨런은 방과 후에 무작위 전화 영업으로 냄비와 팬, 리넨과 담요를 팔았습니다. 이때도 당연히 평균의 법칙을 활용했는데, 활동 30여 일 만에 발견한 평균 성공 비율은 5:3:2:1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5명 중 3명이 그를 만나는 데 동의했고 3개의 약속 가운데 제품 소개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2번이었으며 2명 가운데 1명꼴로 물건을 구매해주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법칙을 쓰는 이유는 성공에 집중하여 실패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앨런은 나중에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가장 빠른 기간에 호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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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 주일학교에서 ‘필드트립(Field Trip)’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들은 4시에 모여서 필드트립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차량봉사를 해 줄 형제님들도 함께 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필드트립에 참가했습니다. 이번 필드트립의 장소는 텍사스 레인저스 구장이었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메츠와 양키즈 구장에 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야구장으로 향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는 몇 년 전에 ‘돔’구장을 신축했습니다. 야구장은 덥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응원했고, 텍사스 레인저스는 9회 말에 점수를 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1점차로 이겼습니다. 이런 필드트립이 좀 더 발전하면 필드필그림이(Field Pilgrim) 될 수 도 있습니다. 야구장, 농구장에 가서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주교좌성당이나, 성지에 가서 학생들이 함께 기도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3년간 ‘필드트립’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필드트립 장소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2000년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숫가 언덕에서 ‘행복선언’을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셨고,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필드트립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많은 ‘필드트립’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제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5년 전에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에파타와 탈리타쿰’을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기 바랬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서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은 희망으로,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빛으로, 근심 중에 있는 사람은 담대함으로 일어나길 바랐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필드트립을 할 수 있는 동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2월 13일, 저를 이곳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필드트립의 장소는 다르지만 제가 해야 할 소명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소명과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제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허위와 거짓말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너무 부유하게도, 너무 가난하게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부유하면 교만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난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이곳에서도 제 발의 등불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필드트립’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멋진 필드트립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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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1-6: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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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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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천 여 년 전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는 잘 안 맞는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이고, 영적인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도 적용되는 가르침들이고, 마음과 몸으로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가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는 극복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죄’와 ‘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극복됩니다. ‘가난’도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에 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만(몸만) 깨끗하면 깨끗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몸은 더러워도 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똑같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권한과 임무를 주시면서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더 많은 활동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활동비를 전혀 주시지 않았고, 또 ‘빈 손’으로 가라는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지시의 실천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제자들이 받은 임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복음 선포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로도 복음을 선포했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빈 손’으로 떠난 일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느님 나라의 부’를 선포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빈 손’은 세속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으로 가득 채운 손입니다.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에(루카 12,22-32) 연결됩니다. 만일에 활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활동비와 생활비를 많이 가지고 간다면, 그 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돈이 많다면 돈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걱정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과 걱정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 착한 사람들’이 천사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지시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를 겸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내린 이 모든 지시는, 제자들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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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여정에 필요한 떠남의 영성을 가르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말씀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이 자신들에게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들을 행할 때 사람들은 제자들을 떠받들고 대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대접받으려 하지 말고, 한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거나 집착하지 말고, 뒷일을 하느님께 맡기고 훌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가르치십니다.
이런 떠남의 영성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에즈라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감격에 차서 기도를 바칠 때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라고까지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얻은 영광이지만, 그 모든 은총을 그대로 받기에는 저질렀던 죄가 너무나 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종’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랬고,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께서도 당신을 종으로 낮추셨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었기에 빈자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높이 올라가기에 바쁜 세상이지만, 가끔 낮은 곳으로 향하는 ‘종’의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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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활할 때만이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8,25)라는 그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파견된 이들의 목적은 모든 이들에게 생명의 빵을 주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이 되게 위해서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어 당신을 따르도록 하셨고(5,1-11), 두 번째, 그들 중에서 열두 제자들을 구성하시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셨고, 그들을 교육시키셨다.(6,12-8,56까지)
그리고 이제 이렇게 준비된 이들을 파견하신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교육의 목적이다. 즉 부르심-교육-파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교육과정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일을 하게 하려고 제자들을 부르셨고 교육시키셨고 또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힘과 권한을 주셨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자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생활해야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힘과 권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귀가 가진 힘과 권한이 아니라(4,32.36) 죄를 사해주는 힘과 권한이다. 이 힘과 권한은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낫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된 사람들이다. 이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양육시켜 주셨고 파견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허락된 사람들만 알고 다른 이들은 비유로만 알아 듣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다. 선교를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참된 선교사인가 아닌가는 내가 어디에 있든 또 어떤 신분으로 있든 반드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을 하고 있는 가에 달려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이면서 아직까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용기가 없고 또 어떻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해야하는지 잘 모를 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줄 힘이 없다면 왜 그런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하는 법이다. 내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없다면 또 병자들을 고쳐줄 힘이 없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할 수 없고 또 병자들을 고쳐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힘을 갖게 하려고 그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해서 설명해주셨고 그런 교육을 통해서 병자들을 고쳐줄 힘을 기르도록 훈련을 시키셨다.
오늘 복음 이전의 모든 교육은 바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신 내용들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힘을 가지려면 성당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맹목적으로 믿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을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고 묵상한 말씀을 실행하면서 복음적으로 사는 삶의 방법을 훈련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복음 선포자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 지 오늘 복음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들을 묵상하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지팡이, 여행 보따리, 돈, 여벌 옷이다. 복음 선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마라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생활하신 방법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2,6-7)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복음 선포는 물질적인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코후8,9)
복음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가난한 모습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다.
복음선포자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 이토록 가난한 모습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복음 선포는 나의 능력이나 재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과 능력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코후12,10)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서 활동하신다. 제자들이 가지고 가지 말아야할 것들은 우리들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고 필수적인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지니지 마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복음 선포자는 선교를 떠나면서부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 하지 말고 "그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야 한다. "(마태 6,32-33)
지금은 우리가 이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의 여정은 항상 나만을 위한 생활에서 다른 이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진보하고 성숙해지는 여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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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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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9,3)
1964. 9. 14일 미국 성 십자가 관구(=미국 시카고) 소속 고난회 수도자 2명이 이 땅에 도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복음’의 씨앗을 척박한 토양에 뿌렸습니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저희 관구는 지난 2000년 5월, 중국의 공산화로 말미암아 1950년 초반 추방된 중국에 선교사 2명을 다시 파견함으로 중국 선교를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중국 형제들이 서안에 수도원과 아울러 여러 본당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 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임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며, 예수님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살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산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권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 곧 선교사가 선교지로 파견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즉 선교는 아무것도(=세상적인 재물) 지니지 않는 것, 곧 무소유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며, 또한 복음 선포자들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이며 태도입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유하게 되었습니다.”(2코8,9) 복음 선포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난다는 것은 오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에 그리고 성령의 힘에 자신을 내어 맡기면서 시작하라는 의미이겠죠. 더 나아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부유하게 해 주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가난(=영적으로 비워있다면)하면 가난할수록, 더 많은 것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교는 쉽지 않으며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막을 맨발로 걷는 일과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9,3)하고 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도움에 목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지원보다는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믿고 재물을 의지하다 보면 실망이 돌아옵니다. 헛소리가 들리며 잡음이 생깁니다. 주님께 매달려야 안정과 평화가 함께 합니다. 다만 솔로몬 임금과 같은 마음으로 선교사도 선교에 필요한 것을 매일 주님께 간청하여야 합니다. 즉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부귀와 명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비록 짧지만,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살아 본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교사가 너무 물질적으로 궁핍하면 많은 분심과 걱정으로, 하지만 너무 부유하다 보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모든 일을 다 자신이 한 것인 양 교만과 자만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 하시며, 심지어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십니다. (9,3참조) 지팡이는 지친 여행자에겐 몸의 의지가 되는 것이며 길을 걸을 때 위험(=동물이나 뱀)을 물리쳐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팡이마저도 지니지 말라 하심은 철저히 하느님께만 의지하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제자들에게는 당신이 주신 그 능력과 권한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9,1) 그 엄청난 일은 지팡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만이 그 유일한 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지팡이 대신 모든 귀신을 쫓아내고 병 고치는 능력과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과거 선교사로 파견되셨던 분들이나 내일 선교지로 떠날 분 그리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선교할 우리 모두 다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하느님의 힘과 권한만으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도록 합시다. 오직 하느님 말씀의 지팡이에 의지하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머니를 채우고,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방식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으로 갖춘 새 옷 한 벌만을 입고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데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신뢰하면서 길을 떠나도록 합시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9,3) <주님, 당신의 복음 선포자들이 빈손으로, 빈 가방으로 떠날지라도 당신께서 언제나 어디서든지 채워주실 것을 믿고 또 체험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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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이라는 글자와 ‘사랑’이라는 글자가 너무 닮았는데,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ㅁ’이 ‘ㅇ’으로 바뀌면 된다. ‘ㅁ’이 ‘ㅇ’이 되려면, 즉 모난 네모가 둥근 동그라미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부딪혀 깎여 나가고 닳아서 둥글둥글 해져야 한다.”
사람이 서로 부딪혀야 사랑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고, 또 공감도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서로 부딪히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얼굴도 쳐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며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꾸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관계를 이어갈 때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성당에서는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왜 이런 고민을 안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면서 하소연 하십니다. 신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다면 잠시 미사만이라도 나오라고 말씀드리는데, 얼마 못 가 성당에서 뵙기가 힘들어집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거부감을 가지면 가질수록, 사람과 함께 사랑도 멀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시는데,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세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닌 주님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과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것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만나 소통하면서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세상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필요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난 부분을 깎아내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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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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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우리 님 그러하시듯
끊어진 것을 잇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잇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흩어진 것을 모으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모읍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씻어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굽은 것을 바루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바룹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메마른 것을 적시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적십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엉킨 것을 푸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풉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모난 것을 다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다듬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쓰러진 것을 일으키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일으킵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무른 것을 돋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돋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부족한 것을 채우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채웁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멈춘 것을 움직이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움직입니다
우리 님 그러하시듯
죽은 것을 살리는
우리 님 주신
힘과 권한으로
온 누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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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내 형제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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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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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
-복음선포와 회개, 믿음과 치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 오이다.”(시편119,105)
빛이자 길이요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어 표류하고 방황하기에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우선적으로 찾아야 할 바 빛이자 길이요 추구할 바 희망이자 꿈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꿈이자 희망이, 평생 화두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아니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역시 우리에게도 영원한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제가 자주 되뇌이는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예수님께 파견받은 열두 제자들처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제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의 선물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주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든 마귀를 쫓아 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목적은 단 하나 열두 제자들과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요 병자들의 치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목표가 뚜렷하니 삶은 아주 단순합니다. 소유의 삶이 아니라 전적 포기의 존재의 삶, 참 자유로운 삶입니다.
역시 안주의 삶이 아니라 도상(途上)의 삶, 순례자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믿는 이는 모두가 ‘길가는 사람’, 도인(道人)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흘러야, 떠나야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삶도 행복도 자유도 선택입니다. 말그대로의 무소유는 아닐지라도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무집착의 초연한 이탈의 가난한 삶을,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집착함이 없이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셨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함께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복음 선포의 양상은 다 다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자리 잡고 있는 내 삶의 제자리가 하느님 나라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를 살려는 우리에게 참 적절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이런 하느님께 두 가지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공감이 가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순수와 자족의 겸손과 무욕의 삶을 간청하는 내용이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도 참 적절하고 이어 계속되는 내용도 더욱 공감이 갑니다. 간청하는 자는 변질, 부패될지도 모를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있든 없든 부패와 타락이 없는 시종여일 한결같은 감사와 겸손, 절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나라와 치유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 감사와 겸손의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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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예수님처럼!>
오늘 복음(루카9,1-6)은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으신 열두 제자를 세상 안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뒤이어 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철저하게 '무소유와 무방비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육신을 위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만 의존하라.'는 말씀입니다.
지팡이와 여행 보따리와 빵과 돈과 여벌 옷은 여행 때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일은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세상 것에 의존하거나, 사람에게 의존하면서 하게 되면, 고통과 시련이 찾아 왔을 때 쉽게 무너집니다. 믿음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순수하고, 그분께서는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분의 말씀에 아무것도 보태지 마라. 그랬다가는 그분께서 너를 꾸짖으시고 너는 거짓말쟁이가 된다."(잠언 30,5-6)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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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루카 9, 3)
주님께
의존해야 할
가난한 우리의
여정입니다.
삶의 안전장치는
이와같이
주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내어맡김이
핵심입니다.
믿음은 지니고
있는 것에 의해
결코 좌우되지
않습니다.
지니고 있는
물건은 언제나
중간에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믿음의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물건과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을 살게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시간되십시오.
집착과 소유욕이
믿음이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고
단순한 믿음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때그때
우리에게
해 주실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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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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